법왕청신문 김지은 기자 | 여주 신륵사는 아름다운 경관과 많은 유물·유적들을 간직 하고 있으며 신라 진평왕 때 원효 대사가 창건했다는 설이 있고, 고려 우왕 2년 (1376년)에 나옹선사가 입적하면서 유명한 절이 되었다.
신륵사를 일명 "벽절" 이라 부르게 한 다층 전탑이 묵묵히 여강을 굽어보고 있으며 나옹선사의 당호를 딴 정자 강월헌(江月軒)에서는 그 옛날 시인 묵객들이 시 한수를 읊고 있는 것 같다.
신륵사는 남한강변의 수려한 자연 경관과 어우러져 많은 사람들이 자주 찾는 곳에 위치함으로서 대중과 접하고 구도의 기회를 넓힐 수 있는 곳이다. (국가지정문화재 8점, 도지정 문화재 7점)
신륵사 관광지
신륵사는 신라시대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진 전통사찰로 국내에서는 보기 드물게 강변에 위치한 사찰이며 1977년도에 32만 여평이 관광지로 지정 개발되어 현재 90%의 공정을 보이고 있다.
공공시설은 완공된 단계이며, 각종 편의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고, 서울에서 1시간대에 위치하고 있어 관광지로 각광 받는 곳을 법왕청신문이 탐貪 하였다.
![ 여주 신륵사 일주문 / 사진 법왕청신문 이존영 기자 ](http://www.wbstf.co.kr/data/photos/20230727/art_16883588641888_185a7a.jpg)
![여주 신륵사 대웅보전 사진=법왕청신문)](http://www.wbstf.co.kr/data/photos/20230727/art_16883588471934_de7cc2.jpg)
![ 여주 신륵사 다층전탑 驪州 神勒寺 多層填塔<br>
<br>
보물 제226호<br>
<br>
여주 신륵사 다층전탑은 아래로 한강이 보이고 멀리 평야를 마주하고 있는 바위 위에 세워져 있다. 전담이란 흙으로 구운 벽돌로 쌓은 탑을 이르며, 우리나라에서는 경기도와 경상북도 안동 지역에 몇 기가 남아 있다.<br>
<br>
이 탑은 2단으로 기단을 쌓고, 다시 3단의 계단을 쌓은 후 여러 층의 탑을 쌓아 올린 탑이다. 기단과 계단은 화강암으로 만들어져 있으며, 신부는 물 6층까지 쌓아 올렸는데, 그 위에 다시 몸돌 하나가 올라가 있어 7층으로 보이기도 한다.<br>
<br>
통일 신라 시대에 만들어진 전탑과 달리 몸에 비하여 지붕들이 매우 알아 전체적인 인상이 독특하다.<br>
<br>
지붕 밑면의 받침은 1~3층이 2단, 4층 이상은 1단으로 되어 있으며, 지붕 위로도 1층은 4단, 2층 이상은 2단씩의 받침을 두었는데 이 또한 특이한 형태이다. 꼭대기에 있는 머리 장식은 얇다.<br>
<br>
지금 탑의 형태를 원래의 모습으로 보기는 어렵다. 탑의 북쪽으로는 수리할 때 세운 비가 전해오는데, 그 비에 1726년 조선명조 2년에 고쳐 지었다고 적혀 있기 때문이다. <br>
<br>
현재 이 탑이 세워진 연대를 확실히 알 수는 없으나 벽돌의 문양 등을 근거로 고려 시대로 보는 견해가 많다.<br>
](http://www.wbstf.co.kr/data/photos/20230727/art_16883589122405_ee667b.jpg)
![신륵사삼층석탑 神勒寺 三層石塔<br>
<br>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33호<br>
<br>
여주 신륵사 삼층석탑은 화강암을 깎아 만든 삼층으로, 신륵사 전담 근처 강변의 암반에 세워져 있다. 불교에서 탑은 부처님의 사리를 모신 무덤 양식에서 기원한 것이다.<br>
<br>
탑을 지탱하고 있는 아랫부분인 기단부는 넓적한 한 장의 돌로 만들어져 있고, 그 위에는 사각형의 상대중석과 갑석을 올려 놓았다. <br>
<br>
상대중석의 각 면에는 기둥 모양의 우주와 주를 새겼고, 그 위를 덮고 있는 감석에는 연꽃무늬가 아래로 향하게 새겨져 있다.<br>
<br>
기단부 위의 탑신부는 3층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층과 2층의 탑신에 해당하는 홀의 네 모퉁이에는 기둥 모양의 우주가 조각되어 있으나 심하게 닮은 편이다. <br>
<br>
그 위에는 건축물의 지붕에 해당하는 옥개석이 올려져 있는데, 기울기가 비교적 완만한 편이고 그 아랫부분에 새겨진 받침은 3단이나 4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br>
<br>
현재 3층 탑신석은 없어진 상태이다. 탑의 맨 꼭대기를 장식하는 구조물인 상륙부도 모두 없어졌다.<br>
<br>
고려 말 나옹화상을 화장한 장소에 이 탑을 세웠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 그 시대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 탑은 조각이 부드럽고 탑신부의 짜임새가 간결하여 고려 후기 탑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br>
](http://www.wbstf.co.kr/data/photos/20230727/art_16883608623618_543710.jpg)
![ 신륵사에 600년된 은행 나무 뒤 쪽에서 촬영한 관세음보살 옆 모습사진 ](http://www.wbstf.co.kr/data/photos/20230727/art_16883588887073_30703c.jpg)
![(봉송각)<br>
이 곳 천년고찰 봉미산 신륵사에 조성된 봉송각(奉送閣)과 소대는 신륵사를 찾아주신 많은 분들께서 석탑 앞에 놓인 소래에 지극한 정성을 담아 남겨주신 동전을 10여성상 (星霜) 모은 것과 배(박)영애, 정영순 보살의 시주로 조성된 이곳은 사십구재, 또는 기타의 재를 모신 후 떠나가시는 영가님들을 극락세계에 태어나시도록 마지막 전송하는 전각(殿閣)입니다. 이 불사에 동참하신 모든 분들의 공덕이 일체의 증상에 널리 퍼져 극락세계에 환생하고 무량수불에 수기를 받고 불도를 닦아 성불하여지이다.<br>
<br>
봉송소(奉送疏)<br>
문밖에 나와서 전송하니 오늘 천도 받은 명가시여 아울러 함께 오신 여러 영가시여! 지금까지 시식하고 독경을 하며 일념으로 염불공덕 갖추었으니, 집착했던 망념들을 여의였는가?<br>
여<br>
의었다면 ㅣ천당, 극락 뜻대로 가고 여의치 못했으면 또 들으시라. 사대를 바라보니 꿈속과 같고 육신이여, 알음알이 본래 곰이라 부처와 조사의 뜻 알려하는가?<br>
서산에 해가지고 동산에 달이 뜨네.<br>
<br>
원왕생 원왕생 면화장세계 태어나서 모두 함께 불도 이루어지이다.<br>
<br>
불기 2554년 7월 15일, 서기 2010년 8월 24일<br>
<br>
봉미산 산방 한산 범선 졸기<br>
](http://www.wbstf.co.kr/data/photos/20230727/art_16883587941156_c5d7dd.jpg)
![ 명부전(冥府殿)<br>
명부(冥府)란 사람이 죽은 후에 가게 되는 세계를 상징하고, 명부전에는 사후세계의 심판관인 시왕(十王)이 봉안되어 있기 때문에 이것을 시왕전(十王殿)이라고<br>
부르기도 하며, 지장보살(地藏菩薩)이 주불(主佛)로 봉안되어 있어 지장전(地藏殿)이라고 부르기도 한다.<br>
<br>
불단의 구성은 지장보살을 중앙에 두고 좌측에 도명존자(道明尊者)와 우측에 무독귀왕(無毒鬼王)이 봉안되어 있고, 좌우로 명부의 시들이 차례로 안치되어 있으며 이 밖에도 판관(判官), 녹사(緣事), 장군(將軍) 등의 존상(像)이 갖추어진 전각이다.<br>
<br>
시왕은 죽은 자들의 사후에 생전에 지은 죄와 선행을 심판하는 10명의 판관이며, 일반인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 염라대왕은 시왕 가운데 다섯 번째 판관이다.<br>
<br>
사람이 죽으면 그날부터 49일안에 다른 세계로 태어나게 되는데 선망조상들과 부모님들이 왕생극락 하도록 천도재 및 기도를 지내고 있으며, 명부전은 살아있는 후손과 조상을 위하여 부처님전에 복을 발원하는 전각이다.<br>
<br>
불단 옆에 조성된 만년위패 단은 선망 조상들이 이생에서 지은 업이 소멸되어 극락왕생 하시길 염원하는 후손들의 지극한 정성을 모아 만년위패를 봉안하고 있습니다. <br>
](http://www.wbstf.co.kr/data/photos/20230727/art_16883587779128_da8ecc.jpg)
![ 원구형석조승탑暴州 神寺 形石幾個格<br>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34호<br>
<br>
여주 신륵사 원구형석조승탑은 명부전과 조사당 사이 서편 언덕에 있으며 주인을 알 수 없는 두 기의 석조 승탑 중 하나이다. 응답은 스님의 사리를 모시기 위해 세운 것으로 흔히 부도 또는 사리탑이라고도 부른다. 이 응답은 둥근 공 모양을 한 답신 위에 건축물의 지붕에 해당하는 옥개석이 올려져 있기 때문에 원구형 응답이라고 부른다. 보통 탑신에 명문을 새겨 승탑의 주인공을 표시하지만 이 승람에는 명문이 새겨져 있지 않아 어떤 스님의 승인지 알 수 없다.<br>
<br>
승달의 아랫부분인 기단부에는 사각의 지대석 위에 중대석과 상대석이 올려져 있다. 상대석에는 연꽃이 새겨져 있고, 중대석에는 팔각의 모서리에 세로로 구슬을 꿰맨 듯 연결시킨 모양의 연주문형 기둥이 새겨져 있다.<br>
<br>
당신 위의 옥개석은 기왓골이 선명하게 나타나 있으며, 용머리 4개가 사방으로 표현되어 있다. 옥개석 위의 상륜부는 가로로 구슬을 꿰맨 듯 연결시켜 만든 무늬가 새겨진 받침 위에 2단의 모든과 그 위에 1개의 보주가 올려져 있다.<br>
<br>
승탑의 형식으로 볼 때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으며, 아름다운 문양이 비교적 세밀하게 새겨져 있어서 중요한 문화재 자료로 평가할 수 있다.<br>
](http://www.wbstf.co.kr/data/photos/20230727/art_16883587696594_e38a1e.jpg)
![팔각원당형석조승탑八角圆堂形石造恰塔<br>
<br>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95호<br>
<br>
여주 신륵사 팔각원당형석조승탑은 원래 신륵사 조사당 뒤 북쪽 구름 너머에 있었는데, 1966년 지금의 위치로 옮긴 것이다.<br>
<br>
승탑은 스님의 사리를 모시기 위해 세운 것으로 흔히 부모 또는 사리탑이라고도 부른다. 이 달의 탑신부 안쪽에서 사리를 모신 사리함이 발견되었지만, 탑신에 승탑의 주인공을 표시하는 명문이 새겨져 있지 않아서 승탑의 주인은 알 수 없다. <br>
<br>
그 대신 각 면에 문비형과 도드라지게 새긴 점이 특이하다.<br>
<br>
이승탑은 통일 신라 시대부터 유행한 팔각형의 탑신 위에 건축물의 지붕에 해당하는 옥개석을 얹었기 때문에 팔각원당형 승탑이라고 부른다.<br>
<br>
승탑의 아랫부분인 기단부에는 사각의 지대석 위에 하대석, 중대석, 상대석이 차례로 올려져 있다. 하대석에는 연꽃무늬가 아래로 향하게 새겨져 있고, 중대석은 무늬가 없는 둥근 모양이며, 상대석에는 연꽃무늬가 위로 향하게 새겨져 있다. <br>
<br>
탑신 위의 옥개석 용머리 끝에는 여덟 개의 큼직한 귀국이 표현되어 있으며, 그 위의 상륜부에는 복발, 보름, 보주를 표현한 것으로 보이는 원형석이 차례로 올라가 있다.<br>
<br>
이승탑은 탑의 형식으로 볼 때 고려 말, 조선 초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승탑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br>
<br>
](http://www.wbstf.co.kr/data/photos/20230727/art_16883589266512_3c1dfd.jpg)
![ 여주 신륵사 600년 된 은행나무 전면에서 촬영한 사진으로 기도하는 관세음보살님 상 / 사진=법왕청신문](http://www.wbstf.co.kr/data/photos/20230727/art_16883587429413_059fdd.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