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불교의 모든 가르침을 한 줄로 묶는다면 어디에 닿을까. 수많은 경전과 논서, 선사의 어록과 법문이 서로 다른 언어로 같은 곳을 가리키고 있다면, 그 중심에는 무엇이 놓여 있는가. 나는 그 물음의 답을 묘법연화경, 그중에서도 방편품 제2의 한 구절에서 본다. 부처는 중생으로 하여금 자신의 지견(知見)을 열게 하고(開), 보여주며(示), 깨닫게 하여(悟), 마침내 그 길에 들게 한다(入)고 하였다. 이 네 글자는 교학의 문장인 동시에 수행의 지도이며, 존재의 구조를 해명하는 철학이자 삶의 윤리다. 나는 이 네 글자를 하나의 창(窓)으로 삼아, 담화선창이라 이름 붙인다. 창은 밖을 보게 하고, 동시에 안을 비춘다. 그 창을 통해 우리는 부처를 바라보지만, 끝내는 우리 자신을 보게 된다. 첫째, 열림(開)이다. 인간은 스스로를 닫아놓은 존재다. 우리는 세상을 향해 열려 있다고 말하지만, 실상은 익숙한 관념과 판단, 두려움과 욕망으로 촘촘히 짜인 울타리 안에 머문다. 그 울타리는 외부의 적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는 동시에, 진실로부터 우리를 가둔다. 부처의 가르침은 이 울타리를 부수려 하지 않는다. 다만 문이 있음을 일깨운다. 문은 언제나 안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한켠, 가을빛 낙엽 사이로 강렬한 붉은 원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단순한 형태지만 결코 단순하지 않은 이 조형물은 인도네시아 조각가 아르소노(Arsono)의 작품 「원(Circle)」이다. 철로 이루어진 이 거대한 원은 자연과 인간, 시간과 존재를 하나로 잇는 상징적 언어로 서 있다. 1940년 2월 7일, 인도네시아 욕야카르타에서 태어난 아르소노는 미술아카데미에서 조각을 전공하며 예술적 기반을 다졌다. 이후 인도네시아를 중심으로 아시아 각국에서 개인전을 개최하며 독자적인 조형 세계를 구축해왔다. 특히 그는 공공미술 영역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도시 공간 속에서 인간의 사유를 확장시키는 작품들을 꾸준히 선보여왔다. 현재는 자카르타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의 작품 「원」은 높이 200cm, 폭 60cm, 길이 200cm 규모의 철 구조물이다. 붉은 색채로 강조된 이 원형 조형은 내부에 기하학적 구조를 품고 있어, 보는 각도에 따라 전혀 다른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외형은 완전한 원이지만, 내부는 비어 있고 동시에 채워져 있다. 이 대비는 ‘존재와 공(空)’이라는 동양적 사유를 떠올리게 한다. 특히 이 작품이 놓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도저히 풀리지 않을 것 같은 문제와 끝이 보이지 않는 고민 앞에 서게 됩니다. 마음은 복잡해지고,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며 밤이 깊어도 쉬지 못합니다. “왜 나는 아직도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가” “언제쯤 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이러한 질문은 누구에게나 찾아옵니다. 그러나 오늘 여러분께 한 가지 분명히 전하고 싶은 진리가 있습니다. 깨달음은 오래 걸리는 것이 아니라, 단 한순간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불가에서 말하는 홍로점설紅爐點雪, 즉 ‘붉게 달아오른 화로 위에 떨어진 눈’의 비유는 이 진리를 가장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눈송이는 차갑고 고요하게 존재합니다. 하지만 뜨겁게 달궈진 화로 위에 떨어지는 순간, 그 존재는 흔적도 없이 사라집니다. 그것이 바로 깨달음의 본질입니다. 오래된 고민은 “시간”이 아니라 “집착”이다. 우리는 흔히 말합니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것이다.” 그러나 시간은 문제를 해결하지 않습니다. 단지 우리를 익숙하게 만들 뿐입니다. 마음속에 남아 있는 집착, 놓지 못하는 감정, 끝까지 붙들고 있는 생각이 문제를 계속 살아 있게 만듭니다. 즉, 문제가 오래된 것이 아니라 놓지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사람은 처음부터 지혜로운 존재로 태어나지 않는다. 우리는 모두 무지와 미망 속에서 삶을 시작한다. 무지無知는 알지 못함이고 미망迷妄은 그릇되게 알고 헛되게 집착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에 집착하고 그 집착 속에서 괴로움을 만들어 낸다. 욕심을 따라가고 분노에 휘둘리며 자신의 마음을 보지 못한 채 세상을 탓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사람은 언제든 바뀔 수 있다.” 처음에는 어둠 속에 있었을지라도 그 어둠을 깨닫고 벗어나려는 순간 그 사람은 이미 빛을 향해 걷고 있는 것이다. 법구경은 말한다. “어리석던 사람이 나중에 지혜로워지면 세상을 비춘다.” 이 가르침은 깊은 희망을 담고 있다. 과거가 어떠했든 지금의 마음이 바뀌면 삶은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는 뜻이다. 무지 속에 살던 사람이 자신을 돌아보고 마음을 다스리며 한 걸음씩 나아갈 때 그 변화는 그 누구보다도 크다. 왜냐하면 어둠을 깊이 경험한 사람일수록 빛의 가치를 더 잘 알기 때문이다. 그는 더 이상 과거에 머물지 않는다. 어둠을 딛고 자신을 넘어 지혜의 길로 나아간다. 그래서 그 삶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빛이 된다.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사람은 살아가면서 앞날에 대한 불안을 안고 산다. “앞으로 어떻게 될까” “이 길이 맞는 걸까” 보이지 않는 미래 앞에서 마음은 흔들리고 불안은 커져간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묻는다. “내 앞길은 밝은가” 그러나 불교에서는 이 질문 자체를 다르게 본다. 앞길이 밝은가 어두운가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의 마음이 밝은가 그것이 더 중요하다. 전도양양前途洋洋, 앞길이 넓고 밝아희망이 가득하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 말은 단순히 미래가 좋다는 의미가 아니다. 마음이 밝을 때 앞길도 밝아진다는 뜻이다. 우리는 종종 상황이 좋아지면 마음이 편안해질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진실은 다르다. 마음이 바뀌어야 상황이 달라 보인다. 같은 길을 걸어도 어떤 사람은 희망을 보고 어떤 사람은 두려움을 본다. 길이 다른 것이 아니라 마음이 다른 것이다. 불교에서는 말한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들어낸다는 뜻이다.그래서 앞길 역시 마음이 만드는 것이다. 마음이 어두우면 길은 막힌 것처럼 보이고 마음이 밝으면 길은 열려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수행자는 미래를 걱정하지 않는다. 대신 지금의 마음을 밝히는 데 집중한다. 지금 이 순간 마음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지붕이 허술하면 비가 새듯이 수련되지 않은 마음에는 탐욕이 스며든다.” 이 말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다. 우리의 삶을 꿰뚫는 깊은 가르침이다. 비는 막으려 하지 않아도 내린다. 지붕이 튼튼하면 그 비를 막아내지만 지붕이 허술하면 작은 틈으로도 물이 스며들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작은 물방울이다. 그러나 그것이 쌓이면 집을 무너뜨릴 만큼 큰 피해가 된다. 우리의 마음도 이와 같다. 마음이 단단하게 다져져 있지 않으면 작은 욕심 하나가 스며들기 시작한다. “이 정도는 괜찮겠지” “조금 더 가지면 어떨까” 이 작은 생각이 점점 커지고 걷잡을 수 없이 퍼진다. 그래서 탐욕은 처음에는 작게 시작하지만 결국 삶 전체를 흔들어 놓는다. 불교에서는 탐욕을 괴로움의 근원이라 말한다. 많이 가지면 행복해질 것 같지만 실상은 더 많이 가질수록 더 많은 걱정과 불안이 따라온다. 잃을까 두렵고 남과 비교하며 마음은 점점 더 불안해진다. 그래서 부처님은 마음을 먼저 닦으라고 말씀하셨다. 지붕을 고치지 않으면 비를 막을 수 없듯이 마음을 다스리지 않으면 탐욕을 막을 수 없다. 수행이란 거창한 것이 아니다. 작은 생각 하나를 돌아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마음 밖에는 아무 것도 없다 물고기가 헤엄치니 흙탕물이 일고, 새가 날아가니 깃털이 떨어진다. 자연은 늘 움직이며 그 흔적을 남긴다. 그러나 그 움직임 속에서도 본래의 이치는 변하지 않는다. 우리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여전히 고해苦海 속을 헤매며 바깥을 향해 답을 찾고 있지는 않은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몸으로 느끼고 있으면서도 정작 그 본질은 놓치고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할 때이다. 선가禪家에서는 “진흙소가 달을 몰고 간다(泥牛運月)”는 말을 한다. 고요한 밤, 아무도 모르게 진흙으로 된 소가 달을 끌고 간다는 이 말은 겉으로는 이해할 수 없지만 그 안에는 깊은 깨달음이 담겨 있다. 이는 곧 보이는 세계 너머에 있는 진리를 마음으로 보라는 뜻이다. 그래서 수행자는 형상에 집착하지 않고 마음을 바로 세우는 데 힘쓴다. 오랜 시간 지속적으로 정신을 집중하기 위해 결가부좌結跏趺坐나 반가부좌半跏趺坐를 취하고 몸을 바르게 하며 숨을 고르게 하고 마음을 고요히 한다. 이 모든 수행은 특별한 능력을 얻기 위함이 아니라 본래의 마음을 바로 보기 위함이다. 불교의 근본 가르침은 명확하다. 心外無佛심외무불, 卽心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사람은 누구나 완전하지 않다. 살아가면서 실수를 하고 때로는 악한 생각과 행동을 하기도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의 과거를 부끄러워하고 때로는 그 과거에 스스로를 가두며 살아간다. “나는 잘못된 사람이다.” “나는 이미 늦었다.” 이런 생각 속에서 스스로를 어둠 속에 두는 것이다. 그러나 법화의 가르침은 다르게 말한다. “사람은 과거로 정해지는 존재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 어떤 마음으로 어떤 삶을 살아가느냐이다. 처음에는 어둠 속에 있었을지라도 그 어둠을 깨닫고 벗어나려는 순간 그 사람은 이미 다른 길 위에 서 있는 것이다. 악한 행동을 했던 사람이라도 그 잘못을 알고 스스로를 바꾸려 한다면 그 변화의 힘은 그 누구보다 크다. 왜냐하면 어둠을 깊이 알았기 때문에 빛의 소중함을 더 잘 알기 때문이다. 법화경은 말한다. “뒤에 가서 그 악한 행을 극복한 사람은 세상을 비춘다.” 이 말은 단순한 위로가 아니다. 진실이다. 자신의 잘못을 외면하지 않고 그것을 직면하고 바꾸려는 사람은 이미 깨달음의 길 위에 있는 사람이다. 그 사람은 더 이상 과거에 머물지 않는다. 과거를 딛고 앞으로 나아간다. 그래서 그 삶은 다른 사람들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흰 새 한 마리가 태양을 향해 날아오릅니다. 어둠을 뚫고, 바람을 가르며, 끝내 빛을 향해 나아갑니다. 그 모습은 단순한 비상이 아니라, 깨어난 영혼의 길을 상징합니다. 법화경에서는 말합니다. “잠에서 깨어난 이는 이미 다른 하늘을 산다.” 사람은 누구나 잠들어 있습니다. 눈을 뜨고 살아가지만, 마음은 어둠 속에 머물러 있습니다. 탐욕과 분노, 어리석음이라는 세 가지 독三毒에 묶여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모른 채 살아갑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자기 마음을 돌아보는 이가 나타납니다. “이것이 나인가?” “이 고통의 끝은 어디인가?” 이 질문이 바로 ‘깨어남’의 시작입니다. 깨어난 사람은 더 이상 세상에 끌려가지 않습니다. 세상의 칭찬에도 흔들리지 않고, 비난에도 무너지지 않습니다. 그는 이미 마음의 중심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경전에서 말하는 ‘마라’란 외부의 적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마음입니다. 욕심이 마라요, 분노가 마라요, 집착이 마라입니다. 그래서 수행자는 세상을 이기려 하지 않고, 자신의 마음을 이기려 합니다. 마라와의 싸움은 밖에서 일어나지 않습니다. 바로 내 안에서 일어나는 전쟁입니다. 욕심이 올라올 때 그것을 알아차리고 내
법왕청신문 이준석 기자 | 우리는 ‘성공’을 말할 때 대개 결과를 떠올린다. 돈, 지위, 성취, 그리고 남들이 인정하는 어떤 위치,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사람들은 깨닫게 된다. 진짜 성공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어떻게 다스리느냐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현대 사회는 빠르게 변하고 있다. 정보는 넘쳐나고, 선택은 많아졌지만 사람들의 마음은 오히려 더 불안해지고 있다. 왜일까. 답은 단순하다. 우리는 바깥을 바꾸는 데에는 익숙하지만 마음을 다루는 법은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불교설화의 가치는 다시 살아난다. 담화총사의 불교설화는 단순한 옛이야기가 아니다. 그 안에는 욕심, 분노, 집착, 후회, 인간관계와 같은 인생의 본질적인 문제를 꿰뚫는 지혜가 담겨 있다. 특히 설화는 논리가 아니라 이야기로 전해진다. 그래서 머리로 이해하는 것을 넘어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만든다. 사람은 설명보다 이야기에 더 깊이 움직인다. 한 편의 이야기가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꾸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담화총사의 불교설화는 어려운 경전의 언어를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삶의 이야기로 풀어낸다. 그래서 이 설화를 듣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삶을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사람들은 흔히 묻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부유해질 수 있습니까?” 이 질문 속에서 말하는 부유함은 대개 돈이 많고, 집이 넓고, 여유가 있는 삶일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부유富有는 지갑의 두께가 아니라 마음의 깊이를 뜻합니다. [담화총사 : 네이버 동영상 2,500개 바로보기] 그래서 불교에서는 부유만덕富有萬德이라 말합니다. “참으로 부유한 이는 만 가지 덕을 갖춘 사람이다.” 덕이 없는 부유는 오래가지 않는다. 재물은 쌓일 수 있지만, 덕이 없으면 흩어집니다. 말이 거칠고, 사람을 이용하고, 자기 이익만 앞세우면 아무리 많은 것을 가져도 그 삶에는 늘 불안이 따릅니다. 부처님은 이를 무덕부無德富라 하셨습니다. 겉은 풍족하나, 속은 늘 결핍된 상태입니다. 덕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삶을 지탱한다. 덕이란 무엇입니까? - 남의 입장을 한 번 더 헤아리는 마음 - 손해를 보더라도 도리를 지키는 태도 - 말 한마디를 삼키는 인내 - 가진 것을 나눌 줄 아는 여유 - 이 모든 것이 덕입니다. 덕은 통장에 기록되지 않지만, 사람의 마음에 남고 시간이 지나 다시 돌아옵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말합니다. 덕은 가장 안전한 자산이라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이 역사적 선언의 중심에는 세계불교 초대법왕 일붕 서경보一鵬 徐京保 세계법왕이 있었다. 냉전의 긴장이 완전히 해소되지 않았던 1990년대 초반, 세계는 여전히 전쟁과 분단, 종교 간 갈등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일붕 서경보 법왕은 이 시대적 상황 앞에서 분명한 문제의식을 가졌다. 불교가 더 이상 사찰과 수행의 울타리 안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판단이었다. 부처님의 자비와 평화 사상은 개인의 해탈을 넘어, 인류 공동체를 향해 발언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확고한 신념이었다. 불교, 침묵이 아닌 선언으로 나아가다 1992년 제정·공포된 세계불교평화의 날은 단순한 기념일이 아니다. 이는 불교가 인류 공동체 앞에 공식적으로 내놓은 평화 선언이며, “전쟁과 폭력 앞에서 더 이상 침묵하지 않겠다”는 불교의 집단적 의지 표명이었다. 일붕 서경보 법왕은 제정 공포문에서 다음과 같이 분명히 천명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개인의 깨달음에 머무르지 않는다. 고통받는 세계를 향해 나아갈 때, 그 가르침은 비로소 완성된다.” 이 선언은 이후 세계 각국의 불교 지도자들과 국제 종교·평화 단체들에 깊은 울림을 주었고, 불교가 평화 외교와 인류 윤리의 주체로 등장
법왕청신문 강경희 기자 | 요즘 세상은 빠르고, 판단은 더 빠릅니다. 뉴스를 보아도, 사람을 보아도 우리는 묻기보다 먼저 결론을 냅니다. 그 결론의 끝에는 종종 이런 마음이 숨어 있습니다. “내가 옳다.” “내 입장에서 보면 그렇다.” 옛사람들은 이를 한마디로 불렀습니다. 아전인수我田引水, 자기 논에만 물을 끌어다 쓰는 마음입니다. 아전인수我田引水란, 자기에게 유리하도록만 생각하고 해석하는 태도를 말합니다. 불교의 눈으로 보면 이것은 단순한 이기심이 아니라 무명無明에서 비롯된 마음의 습관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사람이 괴로워지는 이유는 세상이 불공평해서가 아니라 ‘나’라는 기준을 절대화하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오늘의 사회를 돌아보면 아전인수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전체의 병처럼 번져 있습니다. 정치는 자기 진영의 논만 적시고, 조직은 성과만 자기 공으로 돌리며, 관계에서는 상처받은 이유는 크게 말하고 상처 준 이유는 작게 말합니다. 모두가 물을 끌어오지만 정작 논두렁은 무너지고, 공동의 밭은 메말라 갑니다. 불교에서는 이 마음을 아집我執이라 부릅니다. ‘나’라는 생각에 집착할수록 사람은 진실에서 멀어집니다. 아전인수의 문제는 물이 흐르지 않는 데 있습니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우리는 하루에도 수없이 많은 말을 듣고, 수많은 다짐을 한다. 그러나 그중 얼마나 많은 말이 마음에 새겨지고, 얼마나 오래 남는가를 돌아보면 대답은 늘 조심스러워진다. 명심불망銘心不忘, 마음에 새겨 결코 잊지 않겠다는 이 네 글자는 단순한 기억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삶의 태도이며, 수행자의 자세이며, 인간이 인간다움을 지키는 마지막 약속이다. 불교에서 ‘기억한다’는 것은 단순한 회상이 아니라 깨어 있음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잊지 않는다는 것은, 고통 앞에서 자비를 선택하고, 욕망 앞에서 절제를 선택하며, 두려움 앞에서 지혜를 선택하겠다는 서원이다. 이 글은 명심불망이라는 한 문장을 통해, 우리가 무엇을 마음에 새기고 살아야 하는지, 그리고 무엇을 끝내 잊지 말아야 하는지를 다시 묻는 작은 등불이 되고자 한다. 銘心不忘은 새길 명銘, 마음 심心, 아닐 불不, 잊을 망忘이다. 마음 깊은 곳에 새겨 두어, 어떤 순간에도 잊지 않겠다는 뜻이다. 불교에서 마음은 단순한 감정의 그릇이 아니다. 마음은 업이 쌓이는 자리이며, 깨달음이 시작되는 자리다. 그래서 부처님은 늘 “마음을 잘 살펴라”고 말씀하셨다. 사람은 기억하는 대로 살아간다.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요즘 세상은 빠릅니다. 한 번의 만남으로 판단하고, 한 번의 말로 관계를 정리합니다. 기다림은 낡은 미덕이 되었고, 정성은 비효율이라는 이름으로 밀려났습니다. 그러나 옛사람들은 알았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재능보다도, 지위보다도, 정성에 먼저 문을 연다는 사실을. 그래서 남겨진 말이 있습니다. 삼고초려三顧草廬란, 세 번이나 초가집을 찾아갔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 말의 핵심은 ‘세 번’이 아니라 ‘돌아감’에 있습니다. 한 번 찾아갔다가 만나지 못해도 돌아서며 원망하지 않고, 두 번 찾아가 거절당해도 체면을 세우지 않으며, 세 번째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사람의 마음이 열렸습니다. 불교에서는 이를 하심下心이라 합니다. 마음을 낮추는 수행입니다. 부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법은 높아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낮아질 때 스며든다.” 삼고초려는 사람을 모시는 이야기 같지만, 실은 자기 마음을 닦는 이야기입니다. 요즘 우리는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하면 상대를 탓하고, 세상을 탓합니다. 그러나 돌아보면 정말로 세 번이나 마음을 다해 두드려 본 적이 있었는지 스스로에게 묻게 됩니다. 인연은 한 번의 요청으로 맺어지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