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우주의 진리는 큰 북과 같다. 크게 치면 큰 소리가 나고, 작게 치면 작은 소리가 난다. 이 한마디는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사회적 관계와 삶의 구조를 꿰뚫는 깊은 법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좋은 결과를 원한다. 인정받고 싶고, 사랑받고 싶고, 존중받고 싶어 한다. 그러나 정작 자신이 세상에 어떤 ‘소리’를 내고 있는지는 돌아보지 않는다. 북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강하게 치면 강하게 울리고, 약하게 치면 약하게 울린다. 세상 또한 다르지 않다. 내가 남을 대하는 태도, 말의 무게, 행동의 깊이, 그 모든 것이 결국 나에게 되돌아오는 울림이 된다. 거친 말로 세상을 대하면, 세상은 거친 소리로 응답한다. 이기적인 마음으로 사람을 대하면, 결국 고립이라는 메아리가 돌아온다. 반대로 따뜻한 마음으로 사람을 대하면, 그 온기는 반드시 다시 나에게 돌아온다. 이것이 인과因果다. 이것이 우주의 질서다. 오늘날 사회를 보면, 큰 소리를 내는 사람은 많다. 그러나 깊은 울림을 가진 사람은 드물다. 소리는 크다고 해서 울림이 깊은 것이 아니다. 진정한 울림은 ‘진심’에서 나온다. 작게 말해도 마음이 담기면 멀리 퍼지고, 크게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우리는 흔히 많이 배우고 많이 알아야 지혜롭다고 생각한다. 많은 정보를 알고, 많은 경험을 쌓아야 비로소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불교에서 말하는 참된 지혜는 그와 다르다. 많이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를 깊이 이해하는 데서 시작된다. 문일지십聞一知十,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안다는 뜻이다. 이 말은 단순한 총명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겉으로 드러난 하나의 현상 속에서 그 이면의 원리와 본질을 꿰뚫어 보는 지혜를 말한다. 어느 날 한 제자가 부처님께 물었다. “세존이시여, 어떻게 하면 지혜로운 사람이 될 수 있습니까?” 부처님께서는 조용히 말씀하셨다. “많이 들으려 하지 말고, 깊이 들으라.” 제자는 그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부처님은 다시 말씀하셨다. “하나의 가르침을 듣고도 그 속에서 열 가지를 깨닫는 사람이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이다.” 이 말씀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깊은 의미를 던진다. 우리는 수많은 정보 속에 살고 있다. 하루에도 수십 가지의 이야기를 듣고, 수많은 지식을 접한다. 그러나 정작 우리의 삶은 그만큼 깊어지고 있는가. 많이 듣고 많이 아는 것과 지혜롭게 사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문일지십의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산길을 걷다 보면 때때로 눈에 띄는 꽃이 있습니다. 화려하지도 않고,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 위해 애쓰지도 않지만 조용히 그 자리에 피어 있는 꽃이 있습니다. 바로 도라지꽃입니다. 보랏빛 다섯 갈래 꽃잎이 별처럼 펼쳐진 이 꽃은 마치 하늘을 향해 마음을 열고 있는 듯한 모습입니다. 도라지꽃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듭니다. “이 꽃은 왜 이렇게 조용하게 피어 있을까?” 사람들은 화려한 꽃을 좋아합니다. 큰 꽃, 향기 짙은 꽃, 멀리서도 눈에 띄는 꽃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자연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가장 오래 살아남는 꽃들은 대부분 조용한 꽃들입니다. 도라지꽃도 바로 그런 꽃입니다. 도라지는 꽃보다 먼저 뿌리를 깊이 내립니다. 땅속 깊이 내려간 뿌리는 세월을 견디고 비바람을 견디며 그 자리를 지킵니다. 그렇게 뿌리가 단단해지면 비로소 작은 꽃을 피웁니다. 불교에서 수행을 이야기할 때도 이와 같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수행을 특별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높은 산에 들어가거나 오랜 시간 좌선을 해야만 수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을 바르게 하고, 욕심을 줄이며, 인내하는 것이 곧 수행이다.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세상은 언제나 바쁘게 돌아갑니다. 사람들은 아침부터 밤까지 일을 하고, 목표를 향해 달려가며 쉼 없이 시간을 보냅니다. 더 많은 것을 얻기 위해 노력하고, 더 높은 자리에 오르기 위해 경쟁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분주하게 살아가다 보면 어느 순간 마음이 메마르고 삶의 여유를 잃어버리기 쉽습니다. 바로 이때 우리에게 필요한 마음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음풍농월吟風弄月입니다. 음풍농월이란 말 그대로 바람을 읊고 달을 희롱한다는 뜻입니다. 맑은 바람과 밝은 달을 벗 삼아 시를 짓고 마음의 흥취를 나누며 즐긴다는 의미입니다. 옛 선비들은 자연을 바라보며 마음을 닦고 삶의 깊이를 찾았습니다. 바람이 불면 바람을 느끼고, 달이 뜨면 달빛을 바라보며 마음을 쉬게 했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낭만이 아니라 삶의 균형을 지키는 지혜였습니다. 불교에서도 자연은 중요한 스승입니다. 산과 물, 바람과 달은 말없이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칩니다. 바람은 머무르지 않고 지나가며 집착을 내려놓으라고 말하고, 달빛은 어둠 속에서도 고요히 세상을 비추며 마음의 평화를 가르쳐 줍니다. 그래서 수행자는 자연 속에서 마음을 비추고 삶을 돌아봅니다. 오늘날 우리는 너무 많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어둠은 언제나 밖에서 오는 것처럼 보입니다. 세상이 어렵다 하고, 사람이 변했다 하고, 형편이 나쁘다 하며 우리는 쉽게 말합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십시오. 어둠은 본래 실체가 없습니다. 빛이 없을 뿐입니다. 어둠은 밀어낼 대상이 아니라 밝힐 대상입니다. 등불은 어둠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왜 이렇게 캄캄하냐”고 묻지 않습니다. 그저 자기 심지에 불을 붙일 뿐입니다. 작은 불꽃 하나가 넓은 방을 밝히고, 한 사람의 마음을 살리고, 한 시대의 방향을 바꿉니다. 등불은 크지 않아도 됩니다. 꺼지지 않으면 됩니다. 지혜로운 이는 환경을 탓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압니다. 환경은 조건일 뿐, 결정은 자기 마음이 한다는 것을. 비가 오면 우산을 쓰고, 눈이 오면 발걸음을 조심하며, 바람이 불면 몸을 낮추면 됩니다. 하늘을 원망한다고 날씨가 바뀌지 않습니다. 수행이란 무엇입니까? 바깥을 바꾸는 일이 아니라 안의 불을 지키는 일입니다. 누가 나를 헐뜯어도 마음의 등불을 꺼뜨리지 않는 것, 세상이 거칠어도 자비의 불씨를 놓지 않는 것, 형편이 궁해도 원력을 줄이지 않는 것. 그것이 수행입니다. 어둠이 깊을수록 등불은 더 또렷해집니다. 고난이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무위도식無爲徒食이란 말은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먹고 사는 것을 뜻한다. 이 말은 단순히 게으름을 꾸짖는 말이 아니다. 불교에서는 이 말 속에 삶에 대한 태도를 묻는 깊은 뜻이 담겨 있다. 부처님은 수행자들에게 늘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몸은 공양을 받는 몸이니, 그 공양만큼 세상에 보답하라.” 공양을 받는다는 것은 책임을 진다는 뜻이다. 불교에서 밥 한 끼는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다. 한 숟가락 밥에는 농부의 땀과 자연의 은혜, 그리고 공동체의 신뢰가 담겨 있다. 그래서 출가자는 말한다. “이 밥값을 무엇으로 갚을 것인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먹는 삶, 즉 무위도식이란 몸은 살아 있으나 마음은 이미 수행을 떠난 상태를 말한다. 불교에는 ‘무위無爲’라는 말이 있다. 이는 억지로 꾸미지 않는 자연스러운 삶을 뜻한다. 그러나 무위와 무위도식은 전혀 다르다. 무위는 집착을 내려놓은 행위이고, 무위도식은 책임을 내려놓은 태도다. 부처님은 하루도 빈손으로 살지 않으셨다. 말 한 마디, 발걸음 하나, 침묵조차도 중생을 이롭게 하는 법문이 되게 하셨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헛되이 살지 않으셨다. 일하지 않는 손보다, 마음을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세상은 늘 편을 가르려 합니다. 내 편과 네 편, 옳고 그름 이전에 서로의 자리를 먼저 나눕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길은 언제나 그 한가운데에 서 있었습니다. 치우치지 않고, 무리에 휩쓸리지 않는 자리. 그 자리를 가리켜 우리는 무편무당無偏無黨이라 부릅니다. 무편무당이란, 아무 생각도, 아무 입장도 가지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가장 깨어 있는 태도입니다. 치우침은 마음이 먼저 결론을 내릴 때 생기고, 무리는 생각을 대신해 판단해 줄 때 만들어집니다. 그 순간, 우리는 편해지지만 진실에서는 멀어집니다. 부처님께서는 “중도는 양쪽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양쪽을 다 살피는 지혜”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무편무당은 옳고 그름을 가리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사람이 아니라 사안을 보고, 감정이 아니라 인연을 살피라는 가르침입니다. 오늘의 사회를 비추는 무편무당 오늘 우리는 의견보다 진영을 먼저 묻고, 사실보다 소속을 먼저 확인합니다. 그러나 불교의 눈으로 보면 그 순간부터 갈등은 시작됩니다. 무편무당의 사람은 누구의 말인지보다 무슨 말인지를 듣고, 어느 편인지보다 얼마나 고통이 있는지를 봅니다. 그래서 중재자가 되고, 그래서 신뢰가 생기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요즘 세상엔 함흥차사咸興差使 보내는 사람은 많으나, 돌아오는 사람은 드물다. 약속은 화려하고, 선언은 요란하지만 결과는 늘 “연락 중”이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함흥차사를 기다리듯 책임을 기다린다. 함흥차사란, 보내놓고도 돌아오지 않는 사람을 말한다. 조선의 옛 이야기 속 한 장면이지만 지금의 세상에선 전혀 낯설지 않다. 말로는 백성을 위한다 하고, 공약으로는 내일을 약속하지만 정작 물을 때가 되면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말은 업을 만들고, 행은 과보를 낳는다.” 말만 남기고 행이 없다면 그 말은 공덕이 아니라 허업虛業이 된다. 오늘의 정치도, 오늘의 조직도, 오늘의 인간관계도 마찬가지다. 보내는 약속이 아니라 돌아오는 책임이 사람을 판단한다. 함흥차사가 되지 말라. 보내졌다면 돌아오고, 맡았다면 응답하라. 그것이 사람의 도리이며 시대가 요구하는 수행이다. 한 줄 법문 “말은 떠났는데 책임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 자리는 이미 공空이다.”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계포일낙季布一諾”, 한 번 한 약속은 반드시 지킨다는 뜻이다. 한나라의 장수 계포는 말 한마디에 생명을 걸었고, 사람들은 그의 약속을 천금보다 무겁게 여겼다. 약속이 곧 인격이던 시대였다. 그러나 오늘의 사회는 어떠한가. 정치의 약속은 선거가 끝나면 희미해지고, 조직의 공언은 상황 논리에 밀리며, 일상의 다짐조차 “그때 가 봐서”라는 말로 가볍게 흘러간다. 약속은 남발되고, 책임은 실종되었다.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말은 마음의 그림자요, 행위는 말의 증거이다.” 말이 가벼워지면 마음이 흐려지고, 마음이 흐려지면 업業은 어그러진다. 불교에서 경계하는 망어업妄語業, 즉 거짓말의 업은 남을 속이는 죄 이전에 자기 자신을 무너뜨리는 업이다. 약속을 어긴다는 것은 단순한 실수가 아니다. 그 말을 믿고 방향을 정한 사람의 인연을 끊는 일이며, 공동체의 신뢰를 무너뜨리는 행위다. 사회가 병들기 시작하는 지점은 언제나 말과 행동이 어긋나는 순간부터였다. 물론 사람은 완벽할 수 없다. 지키지 못할 상황도 생긴다. 그러나 계포일낙의 본뜻은 ‘절대 실수하지 말라’는 명령이 아니다. 지키려는 마음을 버리지 말라는 가르침이다. 지킬 수 없게 되었을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어부지리漁父之利” 란, 두 사람이 다투는 사이, 아무 노력도 하지 않은 제삼자가 이익을 얻는다는 말이다. 이 말은 단순한 고사성어가 아니라 오늘의 사회 구조를 정확히 꿰뚫는 거울이다. 현대사회는 끊임없이 사람들을 갈라놓는다. 세대와 세대, 지역과 지역, 이념과 이념, 직장 안에서는 부서와 부서, 온라인에서는 진영과 진영이 맞서 싸운다. 서로를 향한 말은 점점 거칠어지고, 상대의 말은 들으려 하지 않는다. 옳고 그름보다 이기고 지는 것이 먼저가 된다. 그러나 그 치열한 싸움의 끝에서 정작 웃고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유튜브 불교연합방송 바로가기 다투는 당사자들이 아니다. 댓글로 싸우는 시민도 아니고, 현장에서 고생하는 노동자도 아니다. 갈등을 설계한 자, 분열을 이용한 자, 침묵 속에서 이익을 챙긴 자가 어부가 된다. 불교의 눈으로 보면 어부지리는 단순한 기회주의가 아니라 번뇌가 낳은 업의 결과다. 분노가 커질수록 판단은 흐려지고, 집착이 강해질수록 시야는 좁아진다. 그 틈을 타 누군가는 말없이 그물을 던진다. 부처님께서는 “분노는 분노로써 그칠 수 없고, 지혜로써만 멈출 수 있다”고 하셨다. 어부지리가 반복되는 이유는 사람들이 자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선우후락先憂後樂”이란, 먼저 근심하고, 뒤에 즐거워한다는 이 말은 고단한 도덕 교훈이 아니라 지도자의 자세이자 공동체의 양심을 가리킨다. 그러나 오늘의 사회는 어떤가, 근심은 남에게 맡기고, 즐거움은 먼저 차지하려는 풍경이 낯설지 않다. 문제가 생기면 책임은 아래로 흐르고, 성과가 나면 공은 위로 올라간다. 선우후락은 교과서 속 문장이 되었고, 현실은 ‘선락후우先樂後憂’로 뒤집힌 듯하다. 불교의 눈으로 보면 이 현상은 단순한 도덕의 붕괴가 아니라 마음의 방향이 바뀐 결과다. 부처님께서는 “자신을 먼저 살피고, 타인을 나중에 헤아리라”고 하셨다. 이 말은 이기적으로 살라는 뜻이 아니다. 자신의 마음이 바르지 않으면 어떤 자리에서도 바른 선택을 할 수 없다는 경계다. 선우후락의 ‘우憂’는 불안이나 걱정이 아니라 책임의 다른 이름이다. 내가 이 자리에 있는 이유, 내 결정이 누군가의 삶에 미칠 파장, 그 무게를 먼저 느끼는 것이 ‘선우’다. 그러나 현대사회는 속도를 미덕으로 삼고, 성과를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한다. 그 과정에서 “조금만 더 살피자”는 목소리는 느리다고 배제되고, “잠깐 멈추자”는 제안은 비효율로 취급된다. 그 결과, 즐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만학천봉萬壑千峰이란, 수없이 많은 골짜기와 천 개의 봉우리가 겹겹이 이어진 장관을 뜻하는 말이다. 웅장하고 아름다운 풍경을 가리키는 동시에, 한눈에 가늠하기 어려운 복잡한 세계의 모습을 비유한다. 오늘의 사회는 이 말과 너무도 닮아 있다. 우리는 지금 정보의 골짜기와 선택의 봉우리를 넘나들며 산다. 뉴스는 쏟아지고, 의견은 갈라지며, 옳고 그름조차 단순하지 않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묻기도 전에 이미 수많은 길 앞에 서 있다. 현대인은 흔히 말한다. “세상이 너무 복잡하다.” 그러나 문제는 세상이 복잡해진 것이 아니라, 마음의 중심을 잃은 채 그 안을 걷고 있다는 데 있다. 불교의 시선에서 보면 만학천봉은 피해야 할 풍경이 아니다. 수행자는 골짜기가 많다고 길을 포기하지 않고, 봉우리가 높다고 발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풍경의 크기가 아니라 내가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 아는 마음이다. 오늘의 사회는 끊임없이 비교하게 만든다. 저 봉우리는 왜 저리 높아 보이는지, 나는 왜 저 골짜기에 머무는지. 그러나 산은 경쟁하지 않는다. 각 봉우리는 제 높이로 존재하고, 각 골짜기는 제 깊이로 자리를 지킨다. 문제는 우리가 남의 봉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남가일몽南柯一夢.”이란, 한때는 분명히 현실이었던 것이, 돌아보면 한낱 꿈처럼 사라져버린 일을 이르는 말이다. 인생의 영화榮華와 성공, 권세와 명예가 모두 이 말 안에 들어 있다. 오늘의 세상은 이 남가일몽을 너무도 자주, 너무도 크게 반복한다. 유튜브 불교연합방송 바로가기 우리는 흔히 말한다. “그때는 잘나갔지.” “한 시절을 풍미했지.” 그러나 부처님의 시선에서 보면, 그 모든 것은 잠시 스쳐 간 인연일 뿐이다. 붙잡을 수 없고, 오래 머물지 않으며, 결국은 놓아야 할 것들이다. 문제는 꿈을 꾸는 것이 아니라, 꿈인 줄 모르고 사는 것이다. 권력에 취하고, 돈에 매달리고, 인정에 흔들리며, 그것이 영원할 것처럼 살아간다. 그러다 어느 날 건강이 무너지고, 관계가 끊어지고, 자리가 사라질 때 비로소 우리는 묻는다.“도대체 무엇을 위해 이렇게 애써 왔는가.” 불교는 이 질문을 피하지 않는다. 오히려 분명히 말한다. 이 세상의 모든 성취는 무상無常하며, 집착할수록 괴로움이 커진다고. 남가일몽을 깨닫는 순간은 허무의 순간이 아니라, 지혜의 문이 열리는 순간이다. 꿈에서 깨어나야 비로소 길이 보인다. 꿈에서 깨어나야 비로소 사람의 소중
법왕청신문 이존영 기자 | “자강불식自强不息.”은 스스로를 강하게 하되, 그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 말은 오늘의 우리에게 유난히 아프게 다가온다. 우리는 너무 자주 지치고, 너무 쉽게 포기하며, 쉬어야 할 때와 멈춰야 할 때를 혼동한 채 살아가기 때문이다. 유튜브, 불교연합방송 바로가기 현대사회는 끊임없이 속도를 요구한다. 성과는 즉각적이어야 하고, 결과는 눈에 보여야 하며, 노력은 숫자로 환산되기를 강요받는다. 그러다 보니 많은 이들이 “강해져야 한다”는 말 앞에서 스스로를 몰아붙인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 속 자강불식은 그런 강요가 아니다. 그것은 남보다 앞서기 위한 힘이 아니라, 어제의 나를 넘어 오늘의 나를 세우는 꾸준함이다. 자강불식은 쉼을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바른 쉼을 포함한다. 쉬지 않겠다는 뜻이 아니라, 마음이 무너진 채로 방치하지 않겠다는 서원이다. 몸이 피곤하면 쉬되, 마음의 방향은 놓치지 않는 것. 이것이 수행자의 자강불식이다. 우리는 실패 앞에서 자주 자신을 탓한다. 그러나 불교는 말한다. 실패는 업의 끝이 아니라 과정이라고. 중요한 것은 결과가 아니라, 다시 일어나는 마음의 태도다. 한 번 더 숨을 고르고, 한 걸음
법왕청신문 이존영 기자 | “호사수구狐死首丘”란 여우는 죽을 때, 자신이 살던 굴이 있는 언덕을 향해 머리를 둔다고 한다. 이는 죽음 앞에서도 자신의 근본과 뿌리를 잊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 오래된 말은 오늘의 우리 사회를 향해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유튜브 불교연합방송 바로가기 우리는 지금 어디를 향해 살고 있는가. 현대사회는 빠르다. 성과는 속도로 평가되고, 성공은 숫자로 증명되며, 사람의 가치는 직함과 재산으로 분류된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잃었다. 고향을 떠나고, 관계를 끊고, 전통을 가볍게 여기며, 심지어 자신의 신념마저 상황에 따라 바꾸는 데 익숙해졌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은 분명하다. 근본을 잃은 성취는 공허하며, 뿌리 없는 성공은 오래가지 못한다. 아무리 높은 자리에 올라도, 아무리 많은 것을 소유해도, 자신이 누구인지 잊는 순간 그 삶은 이미 흔들리고 있다. 호사수구는 과거로 돌아가라는 말이 아니다. 시대에 뒤처지라는 가르침도 아니다. 그것은 아무리 멀리 가더라도, 어디서 왔는지를 잊지 말라는 수행의 기준이다. 부모의 은혜, 스승의 가르침, 공동체의 품, 그리고 스스로 세운 삶의 원칙. 이것이 바로 우리가 머리를 두어야 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