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군웅할거란 말은 영웅들이 서로 땅을 나누어 다투는 난세의 모습을 이릅니다. 그러나 이것은 곧 우리 마음속의 갈등과 분열을 비추는 거울이기도 합니다. 종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는 많은 종교가 있고, 길도 다르고, 가르침도 다르지만 그 근본의 뜻은 ‘중생을 이롭게 하고, 평화를 이루는 것’으로 같습니다. 불교는 자비로써 사람을 이롭게 하고, 기독교는 사랑으로 이웃을 품으며, 유교는 덕으로 세상을 바로잡고, 도교는 자연의 조화에 따라 마음을 비웁니다. 겉모습은 달라도 사람을 살리고, 마음을 밝히는 것은 모든 종교의 공통 뿌리입니다. 그러므로 종교 간의 분쟁은 역사 속 군웅할거와 다르지 않습니다. 나뉘어 싸울수록 모두가 약해지고, 합할수록 하늘의 뜻에 가까워집니다. 佛陀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종교를 비방하지 말라. 그리함은 스스로의 길도 잃게 되느니라.” 예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평화를 이루는 자는 복이 있나니.” 모든 성자가 남긴 말씀은 한결같습니다. 원만한 화합, 진정한 평화, 그리고 사랑... 군웅할거의 시대는 힘으로 천하를 다투다가 결국 모두 무너졌습니다. 그러나 종교화합의 길은 누가 이기고 지는 길이 아니라, 모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사람의 마음을 돌이켜 본래 자리로 돌아가게 하는 ‘마음 회回, 마음 심心’의 노래이다. 회심곡은 그 가운데서도 가장 한恨과 정情, 그리고 불교의 진리가 깊이 서린 버전으로 알려져 있다. 1. 회심곡의 첫머리..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난 까닭 노래는 이렇게 시작한다. “억조창생 만민님네 이내 말씀을 들어보소 이 세상에 나온 사람 뉘 덕으로 나왔는가” 우리가 스스로 세상에 나온 것이 아니라, 부처님의 공덕, 부모님의 은혜, 조상과 천신들의 가피로 태어났음을 일깨운다. 아버지의 뼈, 어머니의 살, 칠성님의 목숨, 제석천의 복덕... 그 모든 것이 모여 이 몸이 생긴 것이다. 2. 부모 은혜를 일깨우는 깊은 서정 회심곡의 중심부는 ‘부모 은공’을 이야기하는 대목이다. 이 부분은 듣는 이의 마음을 가장 강하게 움직인다. 한여름 모기·빈대 뜯을까봐 지친 몸으로 부채질하며, 한겨울 찬 바람 속에서도 아이가 추울까 이불을 더 덮어주던 부모. 쓴 것은 자신이 드시고, 단 것은 아이 입에 넣으며 “금자동아 은자동아 나라에는 충신동아, 부모에는 효자동아…” 라고 속삭이던 그 부모의 사랑. 회심곡이 ‘세대를 넘어 이어져온 노래’가 될 수 있었던 이유가 여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공휴일궤功携一簣는 『맹자孟子』에 나오는 말로, 즉, “산을 쌓는 큰 공도 흙 한 삼태기를 더하지 않으면 이루어지지 않는다.” 라는 뜻입니다. 오랜 노력도 마지막 한 번의 실천이 없으면 헛되이 무너질 수 있음을 경계하는 말씀입니다. 옛날 어떤 마을에 큰 둑을 쌓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수년간 정성껏 흙을 나르고, 돌을 쌓아 둑을 거의 완성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그를 칭찬하며 “이제 곧 마을이 홍수에서 벗어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마지막 흙 한 삼태기를 옮기지 않고 일을 멈추었습니다. 그 작은 틈새로 물이 스며들어, 결국 큰 둑은 무너지고 마을은 물난리를 겪게 되었습니다. 이 일로 마을 사람들은 깊이 깨달았습니다. “큰일은 작은 마무리에 달려 있다.” 학문을 닦다가 마지막 노력이 부족하면, 쌓은 공부가 허사가 됩니다. 수행을 하다가 방심하면, 오랜 정진도 한순간에 무너집니다. 사업을 하다가도 마지막 신뢰를 지키지 못하면, 평생의 공이 무너집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이를 마지막 한 생각, 끝맺음의 정성을 강조하며, “염념분명念念分明, 매 순간을 분명히 하라.”고 가르칩니다. 작은 일의 마무리를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큰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물아일체物我一體란 “나와 만물이 하나다”라는 뜻입니다. 나我와 사물物, 더 나아가 모든 존재가 분리되지 않고, 본래 하나의 생명망 속에 연결되어 있음을 말합니다. 불교의 연기緣起 사상과 깊게 맞닿아 있습니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사라지면 저것도 사라진다. 차유고피유此有故彼有, 차무고피무此無故彼無”는 가르침이 바로 물아일체의 본질입니다. 한 청년이 숲속을 거닐며 나무를 베려 했습니다. 그때 노스님이 다가와 말했습니다. “그대가 나무를 베면, 바람이 머무를 자리가 사라지고, 새가 깃들 곳이 없어지고, 결국 그대가 쉴 그늘도 사라지리라. 그대와 나무는 둘이 아니라 하나다.” 청년은 그제야 깨달았습니다. “내가 나무를 아끼는 것이 곧 나를 살리는 길이구나.” 인간과 자연을 둘로 나누어 생각할 때 파괴가 일어납니다. 그러나 물아일체의 관점에서는 숲이 곧 나이고, 바다가 곧 나이므로, 환경을 해치는 것은 곧 나를 해치는 일입니다. 나와 남을 둘로 나누어 “우리 편, 네 편”이라 집착할 때 다툼이 생깁니다. 그러나 물아일체라면, 남의 아픔은 곧 나의 아픔이며, 남의 행복은 곧 나의 행복입니다. 기업이 이익만을 좇다 공동체를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聽而不聞청이불문”이란, 듣기는 하나, 참되게 듣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귀는 열려 있지만 마음은 닫혀 있어, 소리를 들으면서도 그 의미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불교적으로는, 법문을 귀로만 듣고 가슴으로 새기지 못할 때를 경계하는 말씀입니다. 어느 날, 한 제자가 부처님 곁에서 늘 법문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법문이 끝나기가 무섭게, 마치 물 위에 떨어진 빗방울처럼 흘려버렸습니다. 부처님께서 제자에게 물으셨습니다. “그대는 매일 법문을 들으면서 무엇을 얻었는가?” 제자는 잠시 머뭇거리며 대답했습니다. “스승님, 들은 듯도 하고 모르는 듯도 합니다.” 그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聽而不聞청이불문, 그것은 귀로만 듣고 마음으로 듣지 않는 것이다. 마음이 비워지고 탐·진·치貪瞋癡가 가라앉을 때, 비로소 들리지 않던 진리가 들릴 것이다.” 우리는 많은 말을 듣습니다. 뉴스, 사람들의 조언, 법문, 책 속의 지혜. 하지만 마음이 욕심과 집착에 가려 있으면, 아무리 들어도 공허하게 흘려보내게 됩니다. 귀로만 듣는 사람은 지식을 쌓지만, 마음으로 듣는 사람은 지혜를 얻습니다. 누군가 말할 때, 귀로만 듣지 말고 마음을 비우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음덕陰德이란, 음덕은 남들이 알지 못하는 자리에서 행하는 선행입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덕행이 아니라, 아무도 보지 않을 때 묵묵히 남을 위해 베푸는 것, 이것이 음덕입니다. 예를 들어 이름 없이 기부하는 것, 남이 흘린 것을 주워두는 것, 남모르게 어려운 이웃을 돕는 것 등이 모두 음덕입니다. 불교에서는 이를 숨은 선업善業이라 하며, 보이지 않지만 반드시 복덕으로 이어진다고 가르칩니다. 양보陽報의 이치, 양보란 밝은 보답을 뜻합니다. 음덕은 숨겨져 있지만, 그 공덕은 반드시 드러나 세상에 빛처럼 나타납니다.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결국은 스스로가 알게 되어 행복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경전에서는 “善有善報선유선보, 惡有惡報악유악보(선에는 선의 과보, 악에는 악의 과보)”라 하였고, 또 “陰德積久음덕적구, 必有陽報필유양보(음덕을 오래 쌓으면 반드시 밝은 보답이 있다)”라 하였습니다. 우리가 은밀히 베푼 선행은 사라지지 않고, 보시한 만큼 삶의 향기로 돌아옵니다. 때로는 건강과 장수로, 때로는 자녀의 평안으로, 때로는 위기에서의 보호로 나타납니다. 음덕은 보이지 않지만 반드시 드러나며, 그 보답은 언젠가 삶을 밝혀줄 등불이 됩니다.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우리는 언제나 빠름을 갈망합니다. 빠른 인터넷, 빠른 성공, 빠른 답을 원합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오래전부터 말씀하셨습니다. “욕속부달欲速不達, 빨리 이루려 하면 오히려 이루지 못한다.” 이 말은 단순한 옛 성현의 경계가 아니라, 오늘날 우리 삶의 본질을 꿰뚫는 가르침입니다. 서두름은 번뇌의 불씨니라, 한 제자가 있었습니다. 법문을 듣고 곧바로 깨달음을 얻고자 마음을 재촉했지요. 밤낮으로 수행했으나 번뇌만 커지고, 지혜는 열리지 않았습니다. 부처님께서 그를 보시고 말씀하셨습니다. “활을 지나치게 당기면 끊어지듯, 서두름은 수행을 무너뜨리는 독이 된다.” 서두름은 마음을 억누르고, 억눌린 마음은 번뇌로 되살아납니다. 결국 조급심은 깨달음을 멀리하는 불씨일 뿐입니다. 과정의 정성이 곧 깨달음이다. 꽃은 계절을 기다려 피어납니다. 씨앗이 발아하고, 줄기가 자라며, 햇빛과 물을 받아 조금씩 피어날 때 비로소 향기를 발하지요. 수행도, 공부도, 삶의 모든 길도 이와 같습니다. 과정을 건너뛰고 결실만을 원한다면, 이는 씨앗을 심고 바로 꽃을 바라보는 어리석음입니다. 부처님은 늘 말씀하셨습니다. “인연이 무르익어야 열매 맺는다.” 과정을 믿
법왕청신문 장규호 기자 | 사양지심이란, 겸손하게 양보할 줄 아는 착한 마음을 말합니다. 맹자는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지닌 네 가지 선한 마음 중 하나로 사양지심을 꼽았습니다. 우리의 일상에서 사양지심은 그리 멀리 있지 않습니다. 가족 안에서는 부모가 아이에게, 형제가 서로에게 먼저 배려하는 것이 사양지심입니다. 부부가 서로 “내가 옳다”를 고집하기보다, “당신 말이 맞다” 하고 양보할 때 가정의 평화가 깃듭니다. 직장에서는 사소한 성과를 두고 서로 다투지 않고, “이 일은 동료의 공이 큽니다”라며 함께 나누는 것이 사양지심입니다. 승진이나 포상의 기회가 올 때, 욕심을 내어 다투기보다 겸손히 사양하는 모습이 결국 더 큰 신뢰와 존경을 불러옵니다.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운전할 때 한 발 양보하는 것이 교통문화를 바꾸고, 줄을 설 때 먼저 세우는 작은 행동이 큰 미덕을 만듭니다. 사양하는 그 마음 속에 따뜻한 공동체가 자랍니다. 부처님께서는 “양보하는 이는 결코 잃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조금 사양한 것 같아도, 그 마음이 돌아와 더 큰 평화와 행복이 됩니다. 오늘 하루, 내가 조금 양보하고, 내가 조금 사양하는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가정에는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부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늘 말씀하셨습니다. “승가僧伽는 하나의 몸과 같아야 한다.” 팔과 다리가 서로 다르지만, 모두가 한 몸을 위해 움직이듯, 우리의 삶 또한 동심협력同心協力 할 때에만 원만해집니다. 동심同心이란 단순히 의견이 같다는 뜻이 아닙니다.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지고도, 큰 뜻 하나를 향하여 마음을 합친다는 의미입니다. 부처님 법을 따르는 우리라면, 서로의 차이를 넘어 자비와 공존이라는 큰 길에 마음을 모아야 합니다. 협력協力이란 단순히 돕는 것이 아닙니다. 내 힘을 보태고, 남의 힘을 북돋우며, 마침내 함께 성취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쌓은 공덕은 작지만, 여러 사람이 협력하여 쌓은 공덕은 산과 바다처럼 크고 깊습니다. 오늘날 사회는 경쟁과 갈등이 가득합니다. 그러나 불자에게는 대립보다 협력, 이기보다 공존이 바른 길입니다. 가정에서, 일터에서, 그리고 도량에서 서로 마음을 함께하고 협력할 때, 그곳이 곧 부처님의 정토淨土가 됩니다. 동심협력은 단순한 협동이 아니라, “내 마음을 열어 남과 하나 되는 수행”입니다. 마음을 함께하고 힘을 합치면, 작은 도량도 큰 불국토가 되고, 작은 인연도 큰 깨달음의 길이 됩니다.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오늘은 법구비유경 제2편에 전해 내려오는 “우둔한 수행자가 아라한이 되다”라는 이야기를 통해 불법의 참뜻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부처님 당시, 사위국에 한 수행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나이가 많고 머리가 둔하여, 아무리 가르쳐도 한 게송조차 외우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비웃고 천대했지만, 부처님께서는 그의 마음 밭이 성실하고 곧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직접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입을 다물고, 뜻을 고요히 하고, 몸은 악을 범하지 말라. 이것을 실천하면 반드시 깨달음을 얻으리라.” 라고 하셨습니다. 그는 이 한 구절을 마음 깊이 새겨 평생 붙잡고 실천했고, 마침내 아라한의 경지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에도 교훈이 있습니다. 천 마디의 법문을 알아도, 그것을 실천하지 못하면 헛것입니다. 그러나 단 한 마디라도 깊이 새겨서 실천한다면, 그 힘은 무량한 깨달음으로 이어집니다. 부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천장을 외워도 행실을 바르게 하지 않으면, 한 구절을 듣고 악을 끊음만 못하다.” 지식보다 중요한 것은 실천이며, 기억보다 더 귀한 것은 삶 속의 실현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나는 부족하다’, ‘나는 잘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아무리 먼 길이라도 기꺼이 마다하지 않고 찾아간다는 뜻입니다. 부처님 법을 구하는 길 또한 이와 같습니다. 마음의 법法은 책 속에만 있는 것도, 멀리 산속에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진리를 갈망하는 마음 하나로, 천리를 넘고 만리를 넘어 부처님을 친견하고자 했던 제자들의 간절함이 오늘 우리에게 불원천리라는 가르침으로 남아 있습니다. 신심信心의 힘, 진리를 구하는 이는 거리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천리를 걸어가서라도 법을 듣고자 하는 그 마음은 신심信心이 불러일으킨 원력願力입니다. 믿음이 있으면 산도 바다도 장애가 되지 못합니다. 수행修行의 길, 수행의 길 또한 멀고 험난합니다. 탐진치貪瞋癡의 마음을 내려놓는 일은 천리를 가는 것보다 더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불원천리의 정신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다면 결국 도道의 언덕에 오를 수 있습니다. 오늘의 불원천리, 오늘날 우리에게 천리란 물리적 거리가 아니라 마음속의 게으름, 회의심, 두려움일 것입니다. 그러나 작은 정성, 작은 기도가 모여 결국 천리를 넘어 부처님 마음에 이르는 다리가 됩니다. 회향回向의 말씀. 그러므로 불원천리不遠千里는 단순히 먼 거리를 마다하지 않는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오늘은 두 구절의 말씀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萬古無心만고무심, 白雲靑峰백운청봉.”이란 법문입니다. 萬古無心만고무심이란, 만세토록 변하지 않는 진리의 마음은 본래 텅 비어있고 집착이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며 수많은 일을 겪습니다. 기쁨과 슬픔, 성공과 실패, 사랑과 미움이 끊임없이 우리를 흔듭니다. 하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은 말합니다. 본래의 마음은 일체의 번뇌에 물들지 않고, 늘 고요하며 맑다는 것입니다. 번뇌가 마음을 덮을 수는 있어도, 본래의 성품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마치 하늘 위로 구름이 스쳐가도, 하늘은 언제나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바로 “만고무심”의 가르침입니다. 白雲靑峰백운청봉이란, 푸른 봉우리에 흰 구름이 유유히 흐른다는 뜻입니다. 푸른 산은 자리를 옮기지 않고 굳건히 서 있고, 구름은 때로는 모였다 흩어지며 자유롭게 흘러갑니다. 우리 삶도 이와 같습니다. 세상일은 구름처럼 생겼다 사라지지만, 도량과 진리는 봉우리처럼 굳건히 자리를 지킵니다. 우리가 불법에 귀의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구름처럼 변하는 인연 속에서, 산처럼 변치 않는 진리를 배우기 위함입니다. 사랑하는 불자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마음이 곧 부처라 하였습니다. 진리를 멀리서 찾을 필요 없습니다. 오늘 하루, 우리가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에 깊은 의미를 담고, 우리가 내쉬는 한숨 한숨마다 자비의 향기를 머금는다면, 그 자리가 곧 도량道場이요, 그 삶이 곧 수행修行이 됩니다. 사람은 본래 청정한 존재입니다. 번뇌도, 탐욕도, 미움도 덮여진 것이지, 태어난 마음은 맑고 고요합니다. 그러니 다른 데서 길을 찾지 마십시오. 당신의 마음 안에 이미 그 길이 있습니다. 오늘 하루도 자비로움으로 말하고, 지혜로 듣고, 감사함으로 걸으십시오. 그리하면 당신의 삶은 그 자체로 부처님의 법문이 됩니다.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법성본무생法性本無生이란, 법의 본성은 애초에 생겨남도, 사라짐도 없는 자리입니다. 태어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 것. 그것이 바로 참된 자성自性입니다. 그러나 중생의 눈에는 세상 모든 것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변화로 보이기에, 거기에서 온갖 집착과 번뇌가 일어납니다. 시현이유생示現而有生이란, 부처님은 이러한 중생의 눈높이에 맞추어, 생겨남이 있는 듯 시현해 보이십니다. 진리는 말 없이도 머무나, 중생의 깨달음을 돕기 위해 부처는 모습과 소리를 빌려 진리를 설하시고, 그 진리를 일깨우기 위해 육신을 드러내십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방편方便'입니다. 시중무능현 역무소현물 是中無能現 亦無所現物이라, 그렇다면 이 모든 시현 속에는 '나타내는 자'도, '나타나는 대상'도 없습니다. 이는 곧 ‘주체와 객체’, ‘너와 나’라는 이분법적 분별이 진실이 아님을 뜻합니다. 보는 이도 없고, 보이는 것도 없는 경계, 그것이 바로 무생법인無生法忍의 세계입니다. 세간의 눈에는 분명히 '있다'고 보이지만, 진리의 눈으로 보면 거기엔 실체가 없습니다. 불생불멸, 무소무위한 그 자리를 본다는 것, 그것이 바로 법성法性을 보는 눈, 지혜의 눈입니다. 오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옛날 어느 마을에, 한 사람은 재산이 많은 늙은 부자였고, 다른 한 사람은 가난한 홀아비였다. 이 홀아비에게는 총명하고 예쁜 딸이 하나 있었지만, 살림이 몹시 궁핍했다. 그래서 그는 자주 이웃의 부자 노인에게 돈을 꾸어 생활을 이어갔다. 처음엔 적은 돈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빚이 커져 갚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때 부자 노인은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이젠 이 홀아비가 내 돈을 갚지 못할 테니, 그 딸을 대신 받는 게 좋겠군.” 는 입가에 음흉한 미소를 띠며, 바로 그 집으로 찾아갔다. 그날도 딸과 함께 앉아 근심에 잠겨 있던 홀아비는 노인의 방문을 받고 섬뜩한 예감을 느꼈다. ‘이 영감이 이제 와서 빚 독촉을 하려는구나…’ 그러나 손님을 차갑게 대할 수 없어, 겉으로는 반갑게 맞아들였다. 노인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점잔을 떨다가 슬쩍 말을 꺼냈다. 요즘 살림살이는 어떤가?” “어렵게 지내고 있습니다.” “그럼, 끼니라도 잇도록 내가 돈을 좀 더 빌려주지…” 뜻밖에도 돈을 먼저 꺼내려는 태도에 아버지는 더욱 불안해졌다. 그러자 노인은 본심을 드러냈다. “이 나이에 혼자 살기가 외롭소. 그러니 그대 딸을 내 곁에 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