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사람은 누구나 마음에 두고 아끼는 것이 있다. 사람일 수도 있고 관계일 수도 있고 오랜 시간 쌓아온 인연일 수도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쉽게 끊지 못하고 쉽게 놓지 못한다. 그러나 삶에는 반드시 결단해야 하는 순간이 있다. 그 순간을 피할 수는 없다. 읍참마속泣斬馬謖, 눈물을 흘리며 아끼는 이를 베어낸다는 뜻이다. 이 말은 단순한 냉정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가장 깊은 고통 속에서 가장 큰 결단을 내리는 순간을 말한다. 사람은 흔히 정情에 이끌려 판단을 흐리게 한다. 아끼기 때문에 봐주고 좋아하기 때문에 눈을 감는다. 그러나 그것이 옳은 선택이 아닐 때가 있다. 그 순간 정은 오히려 잘못을 키우는 원인이 된다. 불교에서는 지혜와 자비를 함께 말한다. 자비는 사랑하는 마음이지만 지혜는 바르게 판단하는 힘이다. 이 둘이 함께하지 않으면 참된 길은 열리지 않는다. 아무리 사랑한다 하여도 그 길이 잘못되었다면 바로잡는 것이 진정한 자비이다. 아무리 가까운 사람이라도 그 행동이 옳지 않다면 멈추게 하는 것이 진짜 인연이다. 읍참마속은 냉정한 선택이 아니라 더 큰 것을 지키기 위한 결단이다. 작은 정을 끊어 큰 도를 지키는 것 그것이 바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사람은 혼자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수많은 인연 속에서 만나고, 헤어지며, 함께 살아간다. 그러나 그 많은 인연 가운데 진정으로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되는가. 고사성어 ‘문경지교刎頸之交’는 서로를 위해서라면 목이 잘린다 해도 후회하지 않을 정도의 깊고도 굳은 인연을 말한다. 단순한 친분을 넘어 생사까지 함께할 수 있는 관계, 그것이 바로 문경지교이다. 오늘날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다. 전화번호 속에는 수백 명의 이름이 있고 SNS에는 수천 명의 관계가 존재한다. 그러나 정작 마음을 터놓고 진심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왜일까. 관계는 많지만 마음은 닿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서로를 알고 있지만 서로를 이해하지는 못한다. 겉으로는 가까워 보이지만 마음은 멀리 떨어져 있다. 그래서 쉽게 상처받고 쉽게 등을 돌리며 쉽게 인연을 끊어버린다. 그러나 진정한 인연은 다르다. 문경지교는 조건으로 맺어진 관계가 아니다. 이익으로 이어진 관계도 아니고 상황에 따라 변하는 관계도 아니다. 마음으로 이어진 인연이다. 그 마음은 흔들리지 않는다. 어려울 때 더 가까워지고 힘들 때 더 깊어진다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우리는 매일 무언가를 원하며 살아갑니다. 더 많은 돈, 더 높은 자리, 더 큰 인정, 더 편한 삶. 이러한 바람은 인간으로서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그 욕망이 커지고 집착으로 변할 때 삶은 점점 무거워지고 마음은 점점 불안해집니다. 부처님께서는 욕망을 ‘마른 풀로 만든 횃불’에 비유하셨습니다. 바람을 향해 횃불을 들고 달린다면 그 불길은 결국 내 손을 태우고 나아가 내 몸까지 태워버릴 것입니다. 이 비유는 단순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바로 우리의 삶을 그대로 비추는 거울입니다. 욕망을 붙잡고 살아가는 우리는 마치 횃불을 움켜쥔 채 달리는 사람과 같습니다. 더 얻기 위해 애쓰고, 남보다 앞서기 위해 경쟁하며,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붙잡으려 합니다. 그러나 그 끝은 어떠합니까? 마음은 점점 조급해지고, 비교 속에서 괴로워지며, 결국 스스로를 태우는 고통 속에 빠지게 됩니다.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 횃불을 놓아라.” 놓는다는 것은 포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집착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욕망을 완전히 없애라는 것이 아니라, 그 욕망에 끌려다니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또 하나의 비유가 있습니다. 잘 익은 과일이 달린 나무를 보고 한 사람은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오늘은 어제의 생각에서 비롯되었고, 현재의 생각은 내일의 삶을 만든다.” 사람의 삶은 겉으로는 사건과 인연으로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깊이 들여다보면 그 모든 것은 결국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불교에서는 이를 두고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고 말합니다. 모든 것은 마음이 지어낸다는 뜻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 하루도 사실은 어제의 생각이 만들어 낸 결과입니다. 어제 마음속에 품었던 생각이 오늘의 말이 되고 행동이 되며, 그 행동이 다시 우리의 삶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사람들은 흔히 환경이 삶을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누구를 만나느냐, 어떤 일을 하느냐, 어떤 상황에 놓이느냐가 삶의 방향을 결정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그보다 더 깊은 진실을 말씀하셨습니다. “생각이 삶을 만든다.” 어떤 사람이 늘 불평과 원망 속에서 살아간다면 그 사람의 마음속에는 이미 어둠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마음속에 어둠이 있으면 세상도 어둡게 보입니다. 반대로 마음속에 자비와 감사가 있는 사람은 같은 세상을 살아가더라도 전혀 다른 세상을 경험합니다. 이것이 바로 마음의 힘입니다. 법화경에서는 우리의 마음을 마치 씨앗과 같다고 비유합니다. 좋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우리는 매일 숨을 쉽니다. 밥을 먹고, 일을 하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묻겠습니다. 그 모든 순간에 나는 깨어 있었습니까? 몸은 움직였으나 마음은 딴 데 가 있지 않았습니까? 입은 말했으나 뜻은 없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삶이 아니라 단지 생존일 뿐입니다. 무의식적 삶은 관에 끌려가는 삶입니다. 침에 눈을 뜨고 동으로 휴대폰을 보고, 관처럼 불평하고, 사적으로 화를 내고, 각 없이 하루를 흘려보냅니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한달이 지나고 십년이 지나갑니다. 숨은 쉬었으나 정작 살아 있지는 않았습니다. 깨어 있는 삶은 다릅니다. 아침에 눈을 뜰 때 오늘도 한 번 살아보자” 하고 마음을 챙기는 사람, 말을 하기 전에 말이 상대를 살릴지 다치게 할지 한 번 살피는 사람, 화가 올라올 때 “아, 지금 화가 올라오는구나” 스스로 알아차리는 사람. 이 사람이 비로소 살아 있는 사람입니다. 깨어 있음은 거창한 수행이 아닙니다. 설거지를 하며 물의 온도를 느끼는 것, 걷다가 발바닥이 땅을 디디는 감각을 아는 것, 차 한 잔을 마시며 향을 온전히 맡는 것. 지금 이 순간에 완전히 있는 것. 그것이 깨어 있음입니다. 사람은 생각 없이 살면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평지돌출平地突出은 평평한 땅에서 갑자기 솟아오른다는 뜻이다. 산이 있어야 봉우리가 생기는 것이 아니라, 아무 특징 없어 보이던 평지에서도 산은 솟아난다. 불교에서 이 말은 유난히 깊다. 사람들은 흔히 말한다. “저 사람은 특별해서 저 자리에 올랐다.” “수행자는 깊은 산중에서만 나온다.” “깨달음은 남다른 환경에서만 생긴다.” 그러나 부처님은 정반대의 길을 보여주셨다. 부처님은 왕궁에서 태어나셨으나, 깨달음은 왕궁이 아니라 일상의 고통을 직시하는 마음에서 시작되었다. 출가 이후에도 부처님은 산속에만 머물지 않으셨다. 시장으로, 마을로, 병든 자와 가난한 자의 곁으로 내려오셨다. 그곳은 늘 평지였다. 그러나 그 평지에서 법은 솟구쳤다. 불교에서 말하는 평지돌출이란 특별한 혈통, 배경, 재능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마음을 바로 쓰는 힘이 삶을 들어 올린다는 뜻이다. 수행은 도피가 아니라 돌출이다. 수행은 세상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세상 한복판에서 스스로를 세우는 일이다. 남보다 앞서기 위해 솟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속이지 않기 위해 솟는 것이다. 누구나 같은 땅을 밟고 산다. 그러나 어떤 이는 그 땅에 주저앉고, 어떤 이는 그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백면서생이라 한다. 흰 얼굴에 글만 익힌 사람. 경전은 줄줄 외우되, 삶의 흙먼지는 묻히지 않은 이다. 불교에서도 오래전부터 이런 공부를 경계해 왔다.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말로 아는 법은 법이 아니요, 몸으로 살아낸 법만이 법이다.” [담화총사 : 네이버 동영상 2,500개 바로보기] 경을 천 번 읽고도 분노 하나 다스리지 못한다면 그 지식은 아직 종이 위에 있다. 선문에서 이를 구두선口頭禪이라 부른다. 입으로만 하는 선, 몸은 움직이지 않는 깨달음이다. 백면서생의 공부는 머리에서 멈춘다. 생각은 많으나 고통을 건너본 적이 없고, 판단은 빠르나 책임을 져본 적이 없다. 그래서 말은 옳으되, 사람은 움직이지 않는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언제나 행行으로 완성된다. 신해행증信解行證이라 했다. 믿고, 이해하고, 반드시 걸어가 보아야 증득이 된다. 산문을 나서 본 적 없는 수행은 아직 수행이 아니다. 중생의 소리를 듣지 않은 깨달음은 아직 자비가 아니다. 현장 없는 지혜는 바람 없는 깃발과 같다. 그래서 선사들은 말한다. “백 권의 책보다 한 번의 넘어짐이 낫다.” 무릎에 흙을 묻히고, 손에 상처를 얻을 때 비로소 법은 혈육이 된다. 백면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생각은 쉼 없이 일어나고, 우리는 그 생각 하나에 몸과 마음을 붙들린다. 기쁜 생각에 머물면 곧 불안이 따르고, 괴로운 생각에 머물면 그 괴로움이 나를 이끈다. 그래서 선에서는 말한다. 염념무주念念無住 한 생각, 한 생각에 머물지 말라. [담화총사 : 네이버 동영상 2500개 ] 여기서 말하는 ‘무주無住’는 생각을 없애라는 말이 아니다. 생각을 막으라는 뜻도 아니다. 다만 그 생각을 ‘나’로 삼지 말라는 가르침이다. 생각은 구름과 같고, 마음은 하늘과 같다. 구름이 지나가도 하늘은 다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구름 하나를 붙잡고 “이것이 나다”라고 할 때 그때부터 하늘은 흐려진다. 기억도 그렇고, 후회도 그렇고, 기대도 마찬가지다. 한 생각에 머무는 순간 그 생각은 집이 되고, 집이 되면 우리는 거기서 살기 시작한다. 염념무주는 집을 짓지 말라는 가르침이다. 생각이 일어나면 그냥 알아차리고, 알아차렸다면 놓아주라는 말이다. 기쁜 생각에도 머물지 말고, 괴로운 생각에도 머물지 말라. 좋은 생각이라 붙잡으면 그 또한 집착이 되고, 나쁜 생각이라 밀어내면 그 또한 속박이 된다. 선에서는 말한다. “지나가게 두어라.” 지나가면 생각은 생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우리는 종종 묻습니다. “불교를 믿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단순한 믿음만으로는 길이 완성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믿음은 문을 여는 열쇠일 뿐, 그 문을 지나 걷고, 끝내 도착해야 할 길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담화총사 : 네이버 동영상 2,500개 바로보기] 그 길을 네 글자로 정리한 말이 바로 신해행증信解行證입니다. 불교 수행의 전 과정을 담은 가장 간결하고도 정확한 가르침입니다. 信믿을 신, 믿음은 시작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옳다고 받아들이는 마음, “이 길을 따라가도 괜찮다”는 내면의 신뢰입니다. [담화총사 : 네이버 동영상 2,500개 바로보기] 그러나 이 믿음은 맹신이 아닙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신信은 확인되지 않은 것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의심 속에서도 한 걸음 내딛는 용기입니다. 解(풀해), 믿음은 반드시 이해로 나아가야 합니다. 왜 집착이 괴로움이 되는지, 왜 내려놓음이 자유가 되는지 스스로 납득하지 못한다면 믿음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이해는 머리로만 아는 지식이 아니라 삶의 경험 속에서 “아, 그렇구나” 하고 고개가 끄덕여지는 깨달음입니다. 行(행할 행), 이해했다면 이제 걸어야 합니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겨울은 끝났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봄이 들어선다고 말할 뿐입니다. 입춘立春, ‘봄이 선다’는 이 두 글자는 계절의 변화이기 전에 삶의 태도를 묻는 말입니다. [담화총사 : 네이버 동영상 2,500개 바로보기] 아직 바람은 차고, 땅은 굳어 있지만 봄은 이미 문턱에 서 있습니다. 입춘대길立春大吉, 봄이 시작되니 큰 길함이 열린다는 이 말은 단순한 축원이 아닙니다. 불교에서 봄은 무언의 가르침입니다. 씨앗은 아직 흙 속에 있으나 이미 자라기 시작했고, 눈에 보이지 않아도 변화는 멈추지 않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것은 인연 따라 일어나고, 인연 따라 사라진다.” 입춘은 말합니다. 지금 당장 달라지지 않아도 이미 변화의 인연은 성숙해지고 있다고. 대길은 밖에서 오지 않는다 사람들은 입춘대길을 붙이며 복이 오기를 기다립니다. 그러나 불교의 가르침은 다릅니다. 대길은 [담화총사 : 네이버 동영상 2,500개 바로보기] 운이 아니라 방향입니다. 겨울을 탓하지 않고, 어제를 붙잡지 않으며, 다시 시작할 마음을 세울 때 그 자리가 곧 대길입니다. 봄은 누군가에게만 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봄을 맞이하는 마음은 사람마다 다릅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요즘 사람들은 너무 많은 것을 쥐고 살아갑니다. 성과를 놓치지 않으려 쥐고, 관계를 잃을까 두려워 쥐고, 불안이 올까 봐 미래까지 미리 움켜쥡니다. 그러나 쥔 손은 가득해질수록 새로운 것을 받을 자리가 없어집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때 조용히 말씀하십니다. 방하착득放下着得 놓아야 얻을 수 있다고... 방하착득은 포기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도망치라는 가르침도 아닙니다. 불교에서 ‘놓는다’는 것은 무책임이 아니라 집착을 내려놓는 일입니다. 오늘의 사회는 놓지 못해 더 힘들어집니다. 이미 끝난 관계를 붙잡고, 지나간 실패를 품에 안고, 남의 기준을 자신의 운명처럼 끌어안습니다. 그 결과 마음은 무거워지고 삶은 점점 좁아집니다. 부처님은 분명히 하셨습니다. 괴로움의 뿌리는 결핍이 아니라 집착이라고. 성공에 집착하면 실패가 두렵고, 인정에 집착하면 비교에 지치며, 통제에 집착하면 타인의 자유가 위협이 됩니다. 그래서 방하착득은 말합니다. “잃을까 두려워 쥐는 손을 먼저 놓아라.” 이 사회에는 더 가지라는 말은 넘치지만 잘 놓으라는 가르침은 드뭅니다. 그러나 놓아야 쉼이 오고, 쉼이 와야 다음 길이 보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빈 그릇에만 물이 담긴다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요즘 세상은 너무 자주 바뀝니다. 말이 바뀌고, 기준이 바뀌고, 어제의 원칙이 오늘의 장애물이 됩니다.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면 뒤처진다 말하고, 흐름을 거스르면 고집이라 손가락질합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변화 속에서도 지켜야 할 한 가지를 남기셨습니다. 그 말이 바로 수연불변隨緣不變입니다. 수연불변이란 인연을 따르되, 본성은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불교는 현실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변하고, 조건과 인연은 늘 새롭게 엮입니다. 그래서 불교는 말합니다. “인연을 거슬러 싸우지 말라.” 이것이 수연隨緣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부처님은 분명히 경계하셨습니다. “인연에 휩쓸려 자신을 잃지 말라.” 이것이 불변不變입니다. 오늘의 사회를 보면 수연은 있으되 불변은 사라진 모습이 많습니다. 여론이 바뀌면 말이 바뀌고, 권력이 옮겨가면 신념도 옮겨가며, 이익 앞에서는 가치가 쉽게 접힙니다. 그것은 유연함이 아니라 중심을 잃은 흔들림입니다. 수연불변은 편리한 선택을 허락하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 어려운 길입니다. 상황은 바뀌어도 사람에 대한 존엄은 바꾸지 않고, 시대는 달라져도 양심과 책임은 내려놓지 않으며, 불리해져도 옳다고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많은 분들이 고백합니다. “불교 말씀이 좋은 건 알겠는데, 어렵고 낯설어요.” 그 낯섦의 정체를 한 단어로 말하면 바로 생경生硬입니다. 생경하다는 것은 틀렸다는 뜻이 아닙니다. 너무 딱딱하고, 너무 멀고, 지금의 삶과 연결되지 않는 느낌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본래 사람을 살리기 위한 말씀이었는데, 언제부터인가 사람 위에 올라선 말이 되어 듣는 이를 조용히 물러서게 만들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묻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정말 어려운 것일까, 아니면 우리가 너무 멀리 가져다 놓은 것일까. 생경한 가르침을, 살아 있는 말로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은 경전 속에서만 울리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시장 한복판에서, 아이를 안은 부모의 숨결 속에서, 실패하고 좌절한 사람의 한숨 속에서 함께 살아 움직이던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며 말은 점점 장식이 되었고, 뜻은 점점 설명이 필요해졌으며, 가르침은 점점 생경한 언어가 되었습니다. 불교가 어려워진 것이 아니라 삶과의 거리가 멀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채널은 가르침을 높이지 않으려 합니다. 대신 낮추겠습니다. 교리를 늘어놓기보다 하루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용어를 설명하기보다 사람
법왕청신문 장규호 기자 | 맑은 물은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한 번 흐려지면 그 원인을 숨기지 못합니다. 옛사람들은 물고기 한 마리가 물을 흐린다고 하여 이를 일어탁수一魚濁水라 불렀습니다. 오늘의 세상에도 이 말은 조용히, 그러나 분명히 울립니다. 일어탁수一魚濁水라는 말이있다. 한 사람의 그릇된 행동이 공동체 전체를 흐리게 만든다는 뜻입니다. 불교에서는 이를 업業의 전염이라 말합니다. 행동 하나, 말 한마디, 마음 한 생각이 결국 주변으로 번져 같은 물을 마시게 하기 때문입니다. 요즘 사회를 돌아보면 문제는 늘 “누가 잘못했는가”보다 “누가 책임지는가”에 있습니다. 자기 한 생각은 가볍다 여기고, 그 파장은 공동체에 맡겨버릴 때 물은 금세 탁해집니다. 부처님께서는 청정은 혼자 지키는 덕목이 아니라 함께 가꾸는 수행이라 하셨습니다. 수행자는 스스로를 닦되 늘 ‘이 마음이 다른 이에게 어떤 물결을 남길까’를 먼저 살핍니다. 일어탁수의 교훈은 비난이 아닙니다. 경계입니다. “내가 이 물을 흐리고 있지는 않은가.” “지금의 말과 행동이 공동체의 숨을 막고 있지는 않은가.” 맑은 물은 큰 정화에서 오지 않습니다. 작은 삼킴, 작은 멈춤, 작은 부끄러움에서 시작됩니다.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사람들은 흔히 이름을 남기고 싶어 합니다. 직함을 얻고, 평판을 쌓고, 불리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늘 반대로 말씀하셨습니다. 이름은 바람을 타고 퍼지지만, 덕은 땅에 스며들어 남는다고. 심덕승명心德勝名이란, 마음의 덕이 이름보다 낫다는 이 말은 불교의 핵심을 가장 조용하게 드러내는 가르침입니다. 이름은 남이 불러주는 것이고, 덕은 스스로 쌓는 것입니다. 이름은 사람이 붙이지만,덕은 삶이 증명합니다. 오늘의 사회는 덕보다 명성을 앞세웁니다. 조용히 옳은 일을 하는 사람보다 크게 말하는 사람이 주목받고, 묵묵히 책임지는 이보다 잘 포장하는 이가 앞에 섭니다. 불교의 눈으로 보면 이는 거꾸로 선 세상입니다. 명은 크나 덕이 없으면 그 명은 짐이 되고, 덕은 깊으나 이름이 없으면 그 덕은 세상을 떠받칩니다.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이름을 남기라 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탐욕을 줄이고, 분노를 누그러뜨리고, 어리석음을 밝히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이 곧 덕을 쌓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심덕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사람의 말투에 드러나고,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 남으며, 위기 앞에서 선택으로 증명됩니다. 명은 박수 속에서 자라지만, 덕은 침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