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왕청신문 장규호 기자 | 당신은 준비되어 있습니까? 명절이 다가올 때마다 반복되는 고민이 있습니다. 멀리 떨어진 선산까지 가야 하는 부담, 혼자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벌초, 점점 줄어드는 제사 참석 인원. 부모님 세대에게는 당연했던 일들이 이제 우리 세대에게는 버거운 짐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아이들에게 이 부담을 물려줘야 하나?" "내가 떠난 후, 누가 나를 기억해줄까?" 이것은 단순한 걱정이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 수많은 가정이 마주한 현실입니다. 봉안, 끝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청주에 자리한 벽사초불정사 '천년의 뜰' 봉안당은 이런 시대의 변화 속에서 새로운 답을 제시합니다. 이곳은 봉안당을 단순한 안치 시설이 아닌, 기도가 멈추지 않는 살아있는 공간으로 만들었습니다. 왜 사찰 봉안인가? 일반 납골당과 사찰 봉안당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지속되는 기도입니다. '천년의 뜰'에서는 매일 올려지는 예불과 천도재 밤나무로 정성스럽게 제작된 위패에 담긴 윤회 사상 기제사는 물론 정기적인 합동 천도 의식 사계절 내내 관리되는 청정한 수행 공간 위패는 단순한 나무판이 아닙니다. 밤나무는 가시로 열매를 보호하다가 때가 되면 스스로 열리고, 그 씨앗이 다
법왕청신문 장규호 기자 | 29년의 시간은 단순한 연륜이 아니다. 외교 현장의 기록과 신뢰가 축적된 자산이다. 외교저널은 그 시간 동안 외교를 ‘권력의 언어’가 아닌 사람과 문화의 언어로 기록해왔다. 협정의 문장보다 현장의 표정, 선언의 수사보다 태도의 무게를 남겨온 기록이다. 이제 그 자산을 다음 세대에게 교육·훈련·실전 경험으로 돌려주는 일, 그것이 2026 K-외교문화사절단의 의미다. 외교저널은 그 시간 동안 외교를 ‘권력의 언어’가 아닌 사람과 문화의 언어로 기록해왔다. 이제 그 축적된 자산을 다음 세대에게 교육·훈련·실전 경험으로 되돌려주는 결정적 전환이 시작된다. 2026년 3월 착공, 같은 해 9월 완공을 목표로 하는 K-문화외교센터 국제회의장 건립이다. 이번 국제회의장은 담화문화재단이 주관하여 건립을 추진하고, 센터 운영은 29년 역사를 지닌 외교저널의 모체인 담화미디어그룹이 맡는다. 기록의 전문성과 미디어 운영 역량, 그리고 문화외교의 철학이 한 공간에서 결합되는 구조다. 이는 단순한 시설 건립이 아니라, 외교 인재 양성의 책임 주체가 명확한 시스템 구축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K-문화외교센터는 선언이 아니라 구조다. 약 1,500평 부지
법왕청신문 장규호 기자 | 명절이 다가오면 많은 가정에서 같은 대화가 반복된다. “벌초는 언제 갈까.” “이번에는 누가 제사 준비를 할까.” 이 말들이 오가는 순간, 말하지 못한 부담과 걱정도 함께 쌓인다. 유튜브 불교연합방송 바로가기 과거에는 당연했던 묘지 관리와 벌초, 기제사가 오늘의 사회에서는 점점 어려운 일이 되어가고 있다. 자녀들은 도시로 흩어졌고, 맞벌이는 일상이 되었으며, 부모 세대 역시 연로해져 산소 관리가 쉽지 않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요즘 자녀 세대는 새로운 고민을 한다. “우리가 과연 끝까지 잘 모실 수 있을까.” “정성을 다하지 못하면 불효가 되지는 않을까.” 그래서 최근에는 묘지 대신 봉안당으로, 사당 대신 법당으로 조상님을 모시는 가정이 늘어나고 있다. 봉안당에 유골을 모시고, 같은 공간에 조상님의 위패를 함께 봉안하면 벌초와 산소 관리의 부담이 사라질 뿐 아니라 사찰에서 스님들의 기도와 염불, 향화가 끊이지 않게 이어진다. 특히 기제사 문제는 현대 가정에 가장 큰 부담이다. 음식 준비, 시간 조율, 형식에 대한 갈등으로 제사가 오히려 가족 간의 스트레스가 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사찰 봉안당에서는 기제사와 천도재를 불교 의식에 맞
법왕청신문 장규호 기자 | 사람은 떠나도 인연은 남습니다. 그러기에 떠난 이를 모시는 자리는 단순한 안치의 공간이 아니라, 기도가 이어지고 마음이 머무는 영원의 도량이어야 합니다. 담화문화재단 벽사초불정사 봉안당, 영구 위패분양 안내 / 유튜브 불교연합방송 바로가기 벽사초불정사 봉안당은 사악한 기운을 물리치고 복된 인연을 불러들이는 천년향화의 서원이 끊이지 않는 자리입니다. 향불은 날마다 밝혀지고, 스님의 염불과 기도는 쉬지 않으며, 남은 이의 마음까지 함께 위로받는 공간입니다. 이곳은 묘지가 아닌 법당의 품이며, 사당이 아닌 불전의 자리입니다. 기제사의 부담을 덜고, 천도와 회향이 자연스레 이어지는 지금 시대에 맞는 봉안의 길입니다. 벽사초불정사 봉안당·위패 분양은 마지막을 준비하는 일이 아니라, 인연을 올바르게 이어가는 선택입니다.
법왕청신문 장규호 기자 | 옛날에 늘 불평만 하며 사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무슨 일이든 잘 풀리지 않으면 그는 말했습니다. “다 내 팔자야.” “전생업이 너무 센가 봐.”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인가 보다.” 그는 업을 원망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의 마음은 한 번도 들여다보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그는 절을 찾아 스님께 물었습니다. “스님, 저는 왜 이렇게 되는 일이 없습니까? 아무리 애써도 인생이 나아지질 않습니다.” 스님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물으셨습니다. “지금 이 순간, 그대의 마음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는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유튜브 불교연합방송 바로가기 스님은 찻잔에 차를 따르며 말씀하셨습니다. “업은 과거에서 온 것이지만, 그 업을 굴리는 힘은 지금의 마음이다. 마음이 어두우면 같은 업도 짐이 되고, 마음이 밝으면 같은 업도 길이 된다.” 그날 이후 그는 작은 실천을 시작했습니다. 누군가에게 짜증이 올라올 때, 한 번 더 숨을 고르고 손해 보는 것 같아도 정직을 택했으며 하루에 한 번은 ‘그래도 감사한 것’을 떠올렸습니다.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세상은 그대로였지만, 사람들이 달라 보였고 사건의 무게가 가벼워졌습니다. 어
법왕청신문 장규호 기자 | 선한 원인에는 반드시 선한 결과가 따릅니다. 이 말은 먼 훗날의 보상을 약속하는 말이 아니라, 오늘의 선택이 이미 결과를 만들고 있다는 부처님의 현실적인 가르침입니다. 우리는 종종 묻습니다. “왜 착하게 살아도 바로 달라지지 않는가.” 그러나 씨앗을 심고 그날 열매를 기대하지 않듯, 선한 마음 또한 시간과 인연을 따라 익어갑니다. 지금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선한 원인은 거창하지 않습니다. 말 한마디를 부드럽게 고르는 것, 상대의 입장을 한 번 더 생각하는 것, 이익 앞에서 양심을 먼저 세우는 것. 이 작은 선택들이 바로 선인입니다. 선과善果는 우리가 예상한 모습으로만 오지 않습니다. 금전이나 성공이 아니라, 마음의 평안으로 오기도 하고 위기의 순간에 도움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때로는 내 삶이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이의 삶에서 열매 맺기도 합니다. 유튜브 불교연합방송 바로가기 부처님께서는 인과를 서두르지 말라 하셨습니다. 조급해질수록 마음은 흐려지고, 흐려진 마음은 다시 업을 어둡게 합니다. 선인선과를 믿는다는 것은, 결과를 재촉하지 않고 지금의 마음을 바르게 쓰는 수행입니다. 오늘 하루 이렇게 실천해 보
법왕청신문 장규호 기자 | 현대인의 불안과 불교적 해법, 정음 스님의 “불안에서 벗어나 행복으로 가는길”에 대한 질문은 현대인이 직면한 가장 절실한 문제를 다룬다. 세계보건기구(WHO)는 불안장애를 21세기의 가장 흔한 정신건강 문제 중 하나로 지목한다. 경제적 불확실성, 사회적 경쟁, 관계의 불안정, 미래에 대한 두려움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현대인을 불안 속에 살게 한다. 물질적 풍요에도 불구하고 행복감은 증가하지 않고, 오히려 우울증과 불안장애가 증가하는 것은 현대 문명의 역설이다. 유튜브 불교연합방송 바로가기 불안의 본질과 행복으로 가는 길 부처님께서는 고통을 세 가지로 분류하셨다. 고고(苦苦)는 직접적인 육체적·정신적 고통이고, 괴고(壞苦)는 즐거움이 사라질 때 느끼는 고통이며, 행고(行苦)는 모든 것이 변화하고 무상함으로 인한 근본적 불안정성이다. 현대인의 불안은 주로 괴고와 행고에 해당한다. 현재의 좋은 상황이 언제까지 지속될지 모른다는 불안, 미래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는 불확실성이 지속적인 불안을 만든다. 불교에서 불안의 근본 원인은 무명(無明)과 집착(執着)이다. 무명은 사물의 참모습을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이고, 집착은 변하는 것에 매
법왕청신문 장규호 기자 | 죽음에 대한 불교적 이해, 혜정 스님의 “죽음을 미리 준비하면 죽는게 두 렵지 않다”는 법어는 불교의 생사관(生死觀)을 명 확하게 드러낸다. 죽음은 인간이 피할 수 없는 궁 극적 현실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를 외면 하거나 두려워한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죽음을 직시하고 이해하며 준비하는 것을 강조한다. 죽음을 준비한다는 것은 단순히 유언장을 작성 하거나 장례 절차를 계획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의 본질을 이해하고 지혜롭게 삶을 살아가는 것 을 의미한다. 현대사회는 죽음을 터부시하고 병원과 장례식 장에 격리시킴으로써, 사람들이 죽음과 직면할 기회를 박탈한다. 그 결과 죽음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커지고, 삶의 유한성을 망각한 채 무의미한 일들에 몰두하게 된다. 죽음을 준비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더 충실하고 의미 있는 삶을 살게 하 는 지혜이다. 죽음의 이해와 준비 불교에서 죽음은 끝이 아니라 변화의 한 과정으로 이해된다. 윤회사상에 따르면, 죽음은 한 생의 끝이지만 동시에 다음 생의 시작이다. 『티베트 사자의 서』는 죽음의 과정과 중유(中 有, 바르도) 상태에서의 경험을 상세히 기술하며, 죽음의 순간에도 깨어있는 의식으로 해탈할 수
법왕청신문 장규호 기자 | 부처의 눈이란 무엇인가.? 일정 스님의 “부처의 눈으로 삼라만상을 관조하라”는 법어는 불교 수행의 궁극적 목표를 제시한다. 부처의 눈, 즉 불안(佛眼)은 일체 법의 실상을 여실하게 보는 완전한 지혜의 눈이다. 유튜브 불교연합방송 바로가기 이는 범부의 편견과 분별을 넘어선 청정하고 평등한 관점이며, 모든 현상의 인과와 연기, 그리고 공성을 동시에 꿰뚫어보는 능력이다. 삼라만상(森羅萬象)은 우주의 모든 존재와 현상을 총칭하는 말로, 이를 부처의 눈으로 관조한다 현대사회는 분별과 차별, 경쟁과 대립의 시각이 지배적이다. 이러한 편협한 관점에서 벗어나 부 처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은, 개인의 해탈뿐 아 니라 사회적 화합과 평화를 위한 근본적 해법이 될 수 있다. 부처의 시각과 관조의 수행 불교에서는 다섯 가지 눈, 즉 오안(五眼)을 말한다. 육안(肉眼)은 물질적 대상을 보는 일반적 눈이고, 천안(天眼)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보는 신통력의 눈이며, 혜안(慧眼)은 공성을 깨달은 성문과 연각의 눈이고, 법안(法眼)은 보살이 일체법문을 통달한 눈이며, 불안(佛眼)은 앞의 네 가지를 모두 포함하면서도 완전무결한 부처의 눈이다. 『화엄경』에서는
법왕청신문 장규호 기자 | 신해행증의 수행 체계, 만공 스님의 “믿고, 알며 철저히 수행하며 스스로 도달하라”는 법어는 불교 수행의 완전한 체계를 간결하게 제시한다. 이는 신해행증(信解行證), 즉 믿음(信), 이해(解), 실천(行), 증득(證)의 네 단계를 말한다. 불교 수행은 맹목적 신앙도 아니고 단순한 지적 이해도 아니며, 이 네 가지가 균형있게 발전할 때 완성된다. 현대사회는 지식과 정보의 시대이지만, 진정한 지혜와 깨달음은 부족하다. 많은 사람들이 불교에 대해 알지만, 실제로 수행하고 체험하는 사람은 적다. 또한 맹목적 신앙이나 형식적 의례에 머물러 본질을 놓치는 경우도 있다. 만공 스님의 가르침은 이러한 편향을 경계하고, 완전하고 균형잡힌 수행의 길을 제시한다. 신해행증의 단계와 실천 신(信), 즉 믿음은 불교 수행의 출발점이다. 그러나 이것은 맹목적 믿음이 아니라, 부처님의 가르침이 진리임을 신뢰하는 것이다. 『화엄경』에서는 “믿음은 도의 근원이요 공덕의 어머니”라고하여, 신심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무엇을 믿는가? 첫째, 삼보(三寶), 즉 부처님과 가르침과 승가를 믿는다. 둘째, 인과(因果)의 법칙을 믿는다. 선한 행위는 선한 결과를, 악한 행위는
법왕청신문 장규호 기자 | 부사의 법기 성철 대종사, 지도무난(至道無難)이라. 선에는 본래 스승이 없고(本來無一物) 선은 있어도 스승은 없다(菩堤善本無樹)”고 말한 성철 대종사는 “누가 선(禪)이 없다고 했나. 스승이 없다는 말로 선의 본질을 꿰뚫었다” 성철 대종사는 깨닫는 데는 언제나 천고난만(千苦難萬)의 자기 뚫음(一以貫之)이 필요하다.”면서 “하나도 자기요, 둘도 자기요, 셋째도 자기가 깨달아야 한다”고 말했다. 역대 선사들은 종문의 요체가 성철대종사에게 있다고 증명하면서 “물이 있어 산은 빛나고, 산이 있어 물은 힘이 있 는 것과 같이 삼천대천 세계는 성철대종사가 있 어 모든 불자가 인연시절이요, 모두 인연소생”이 라고 말했다. <편집자 주> 본래면목과 대자유의 의미 “모두에게 구족한 본래면목을 찾아 대자유인 이 되라”는 한국 선불교의 핵심을 응축한 가르 침이다. 본래면목(本來面目)이란 태어나기 이전 의 참된 자기 모습, 즉 일체의 분별과 망상이 일 어나기 이전의 청정한 본성을 의미한다. 이는 누 구에게나 본래부터 갖추어져 있으나, 무명과 번 뇌에 가려져 드러나지 않을 뿐이다. 대자유인(大 自由人)은 이러한 본래면목을 철견한 사람으로, 일체
법왕청신문 장규호 기자 | 암중모색暗中摸索 어둠 속에서 손으로 더듬어 길을 찾는다는 이 말은 세속에서는 미숙함이나 시행착오를 뜻하는 말로 쓰이곤 한다. 그러나 불법의 눈으로 보면, 암중모색은 중생이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가장 정직한 수행의 모습이다. 우리는 종종 삶이 분명해야 한다고 믿는다. 길이 보이고, 답이 있어야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불확실하면 두려워하고, 확신이 없으면 멈춰 선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인간의 삶 자체가 본래 어둠 속을 걷는 여정임을 이미 알고 계셨다. 태어날 때부터 우리는 인생의 해답을 들고 오지 않는다. 누구도 완성된 지도를 받은 적이 없다. 수행 또한 마찬가지다. 처음부터 마음이 밝아지는 이는 없다. 처음부터 번뇌가 사라지는 수행도 없다. 수행의 시작은 언제나 어둠이다. 화가 왜 나는지 모르고, 집착이 어디서 오는지 알지 못한 채 괴로워한다. 이때 많은 이들이 말한다. “아직 준비가 안 됐다”, “더 확실해지면 하겠다.” 그러나 불법은 말한다. 확실해진 뒤에 걷는 것이 아니라, 걷는 가운데 밝아진다고... 암중모색이란 무작정 헤매는 것이 아니다. 보이지 않지만 멈추지 않는 태도다. 손을 뻗어 벽을 느끼고, 바닥을 짚으며
법왕청신문 장규호 기자 | 불교에서 말하는 慈悲喜捨자비희사는 수행자의 이상이자,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한 네 가지 큰 마음이다. 자慈는 행복을 주고자 하는 마음, 비悲는 고통을 덜어주고자 하는 마음, 희喜는 타인의 기쁨을 함께 기뻐하는 마음, 사捨는 치우침 없이 평정하게 놓아두는 마음이다. 이 네 가지는 덕목의 나열이 아니라, 고통의 세계를 건너는 하나의 지도다. 오늘의 사회는 빠르고 예민하다. 말은 거칠어지고, 판단은 즉각적이며, 타인의 실패는 쉽게 소비된다. 이때 가장 먼저 사라지는 것이 자비다. 자비는 약함이 아니라, 고통을 알아보는 감각이다. 상대의 말 뒤에 숨은 두려움을 보고, 행동 뒤에 가려진 상처를 읽는 힘이다. 자비가 사라진 사회는 규칙은 남아도 사람은 남지 않는다. 비悲는 연민을 넘어 책임의 감정이다. 불쌍히 여기는 데서 멈추지 않고, 고통의 원인을 함께 보려는 마음이다. 오늘날 많은 고통이 개인의 실패로 환원된다. 그러나 비의 눈으로 보면 구조와 조건이 보인다. 누군가의 낙오는 게으름의 결과가 아니라, 함께 설계한 시스템의 그림자일 수 있다. 비는 비난을 멈추게 하고, 질문을 시작하게 한다. 희喜는 가장 오해받는 마음이다. 타인의 성공
법왕청신문 장규호 기자 | 봉안은 개인의 선택이다. 그러나 그 선택이 머무는 자리는 개인일 수 있어도, 그 선택이 남기는 공덕은 결코 개인에 머물지 않는다. 우리는 오랫동안 봉안을 이별의 마침표 처럼 여겨왔다. 부모를 모시고 나면 그것으로 역할이 끝났다고 생각했다.그러나 불교의 시선에서 봉안은 끝이 아니다. 봉안은 공덕이 흐르기 시작하는 지점이다. 벽사초불정사가 봉안을 장학으로 회향하겠다는 서원을 세운 이유도 여기에 있다. 부모를 정성껏 모신 그 마음이다시 사회로 흘러가 다음 세대의 배움이 되도록 하기 위함이다. 불교에서 공덕은 쌓아두는 재산이 아니다. 흘려보내야 비로소 살아 있는 힘이 된다. 부모를 잘 모신 공덕이 자식의 삶을 밝히듯, 한 가정의 선택은 다른 가정의 희망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그래서 벽사초불정사에서의 봉안은 단지 개인의 안식이 아니라 사회적 회향을 전제로 한다. 봉안은 고요한 끝맺음이 아니라 조용한 나눔의 시작이다. 이 구조는 효를 개인의 미덕으로만 남겨두지 않는다. 효를 사회적 가치로 확장시킨다. 부모를 향한 마음이 아이들의 배움으로 이어질 때, 그 효는 시간을 넘어 살아 움직인다. 봉안이 장학이 되는 사찰. 이것은 새로운 제도가 아니라
법왕청신문 장규호 기자 | 많은 이들이 봉안을 ‘마무리’ 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불교에서 봉안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사람이 떠난 뒤 가장 중요한 것은 얼마나 자주 찾느냐가 아니다. 기도가 얼마나 이어지느냐다. 사찰 봉안의 가장 큰 차이는 여기에 있다. 누군가 오지 않아도 기도는 멈추지 않는다. 새벽예불, 사시불공, 독경 속에서 고인의 이름은 매일 불린다. 이 기도는 고인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 공덕은 남은 가족에게 돌아온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복덕의 회향이라 한다. 봉안이 복덕이 되는 이유다. 벽사초불정사의 봉안은 조용히 놓아두는 봉안이 아니다. 기도받는 봉안이다. 그래서 이곳의 봉안은 시간이 지날수록 가벼워진다. 슬픔은 잦아들고, 마음은 정돈된다. 봉안은 기억을 붙잡는 일이 아니라, 마음을 놓아주는 수행이다. 끝이 아니라, 기도로 이어지는 시작. 그것이 봉안의 본래 의미다. 오늘의 법문 기도가 이어질 때, 인연은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