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빠른 세상 속에서 흔들리는 마음을 잠시 내려놓고, 지금의 자리에서 다시 숨을 고르기 위한 작은 법문이다. 고사가 전하는 말들을 빌려 오늘의 삶을 비추고, 각자의 걸음이 헛되지 않음을 확인하고자 한다. 바쁘게 살아온 당신에게 이 글이 잠시 머무는 그늘이 되기를 바란다. 요즘 세상에서 각고면려란 이를 악물고 버티는 고행만을 말하지 않는다. 남과 비교하지 않고, 하루를 포기하지 않으며, 자기 삶의 방향을 잃지 않는 꾸준함이다. 뼈를 깎는 고통이 아니라 마음을 다잡는 인내, 속도를 늦추더라도 걸음을 멈추지 않는 성실함이 오늘의 각고면려다. 부처의 길은 고생을 미화하지 않는다. 다만 고통 속에서도 지혜를 잃지 말라 가르친다. 힘들어도 원망으로 가지 않고, 느려도 정직하게 가는 것, 그것이 이 시대 수행자의 가장 현실적인 정진이다.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벽사초불정사에 들어서거든 벽사라 말하고 초불이라 부를지어다. 벽사 사됨은 물러가고 초불 부처님의 기도가 머무는 곳.“ = 동영상 = 사찰의 이름에 담긴 이 깊은 뜻은 벽사초불정사가 단순한 예배 공간이 아닌, 모든 사악함을 물리치고 부처님의 자비광명이 머무는 성스러운 도량임을 말해준다. 벽사辟邪, 즉 삿된 것을 물리친다는 의미와 초불初佛, 처음 부처님을 모신다는 뜻이 어우러진 이 이름 속에는 선조들의 간절한 염원이 새겨져 있다. 천년의 시간을 품은 이 사찰은 세월의 풍파 속에서도 꿋꿋이 제자리를 지키며, 수많은 신도들에게 위안과 깨달음의 길을 제시해왔다. 깊은 산중에 자리한 이곳은 속세의 번뇌를 내려놓고 맑은 마음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만나는 영험한 공간이다. 이번 다큐멘터리는 벽사초불정사의 과거와 현재를 조명하며, 그 속에 담긴 불교 문화의 깊이와 아름다움을 탐구한다. 고색창연한 전각의 처마 끝에서, 스님들의 일상적인 수행 속에서, 그리고 이곳을 찾는 이들의 간절한 기도 속에서 우리는 현대를 살아가는 지혜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유튜브 불교연합방송 바로가기
법왕청신문 장규호 기자 | 당신은 준비되어 있습니까? 명절이 다가올 때마다 반복되는 고민이 있습니다. 멀리 떨어진 선산까지 가야 하는 부담, 혼자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벌초, 점점 줄어드는 제사 참석 인원. 부모님 세대에게는 당연했던 일들이 이제 우리 세대에게는 버거운 짐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아이들에게 이 부담을 물려줘야 하나?" "내가 떠난 후, 누가 나를 기억해줄까?" 이것은 단순한 걱정이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 수많은 가정이 마주한 현실입니다. 봉안, 끝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청주에 자리한 벽사초불정사 '천년의 뜰' 봉안당은 이런 시대의 변화 속에서 새로운 답을 제시합니다. 이곳은 봉안당을 단순한 안치 시설이 아닌, 기도가 멈추지 않는 살아있는 공간으로 만들었습니다. 왜 사찰 봉안인가? 일반 납골당과 사찰 봉안당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지속되는 기도입니다. '천년의 뜰'에서는 매일 올려지는 예불과 천도재 밤나무로 정성스럽게 제작된 위패에 담긴 윤회 사상 기제사는 물론 정기적인 합동 천도 의식 사계절 내내 관리되는 청정한 수행 공간 위패는 단순한 나무판이 아닙니다. 밤나무는 가시로 열매를 보호하다가 때가 되면 스스로 열리고, 그 씨앗이 다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지난 15일, 청와대 영빈관에 걸린 황금빛 전통 문양 앞에서 두 사람이 악수를 나눴다. 이재명 대통령과 칼둔 칼리파 알 무바라크 UAE 아부다비 행정청장. 이 만남은 단순한 외교 의례가 아니었다. 2009년 바라카 원전 수주로 시작된 16년간의 여정, 그리고 앞으로 펼쳐질 '백년 동행'의 중간 지점에서 이루어진 재확인의 순간이었다. 사진 속 칼둔 청장의 미소는 특별했다. 그는 한국을 '제2의 고향'이라 부르는 UAE의 한국 전담 특사다. 2009년부터 지금까지 17년간 한-UAE 관계의 산증인이자 설계자로서, 그가 걸어온 길은 곧 두 나라 협력의 역사 그 자체였다. 사막의 기적, 바라카에서 시작된 신뢰 2009년 12월, 한국전력이 UAE 바라카 원전 사업을 수주했을 때, 세계는 놀랐다. 프랑스 같은 원전 강국들을 제치고 한국이 186억 달러 규모의 대형 프로젝트를 따낸 것은 충격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아부다비에서 서쪽으로 280km 떨어진 사막. 섭씨 50도를 넘나드는 혹독한 환경 속에서 한국형 원전 APR1400 4기를 건설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팀코리아'는 약속을 지켰다. 'On tim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벽사초불정사 뒷산, 그 길 위에는 걷기명상 산책로가 있고 그 숲 사이사이에는 좌선대가 놓여 있다. 보리수 아래만이 깨달음의 자리가 아니듯 이름 없는 나무 아래 또한 마음이 머무는 순간 그곳은 곧 금강좌가 된다. 현대인은 멀리 가야 쉼이 있다고 믿고, 특별해야 수행이라 여긴다. 그러나 부처님은 발 아래에서 길을 열고 숨 하나에 법을 두셨다. 앉으면 몸이 먼저 고요해지고 마음이 따라 내려앉는다. 그 자리는 이미 흔들리지 않는 금강좌다. 걸으면 생각이 흩어지고 욕심이 내려놓아진다. 한 걸음, 또 한 걸음마다 연꽃이 피어나니 그 길은 보보연화다. 이 산책로는 자연을 보여주기 위한 길이 아니다. 자기를 마주하게 하는 길이며 도망치지 않고 머무는 법을 배우는 길이다. 빠른 시대일수록 천천히 걷는 자가 앞서가고 소란한 세상일수록 가만히 앉은 이가 깊다. 따라서 앉으면 수행이고 걸으면 기도다. 여기서는 특별할 필요가 없다. 지금 이 몸, 이 숨, 이 자리. 그대로가 부처님의 자리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담화풍월이 오늘의 시대에 건네는 말이다.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삼고초려三顧草廬이란, 초라한 풀집을 세 번이나 찾아갔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 말의 무게는 ‘횟수’에 있지 않고 ‘마음의 자세’에 있다. 오늘의 시대는 빠르다. 연락 한 번으로 사람을 부르고, 결과가 없으면 곧바로 등을 돌린다. 기다림은 비효율이라 여겨지고, 정성은 번거로움으로 밀려난다. 그러나 삼고초려는 말한다. 사람은 한 번의 요청으로 움직이지 않으며, 인연은 조건으로 얻어지지 않는다고... 유비는 제갈량을 얻기 위해 세 번 길을 나섰지만, 실은 제갈량을 설득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그릇을 증명한 것이다. ‘당신을 모실 준비가 되어 있다’는 침묵의 고백이었다. 오늘 우리의 삼고초려는 무엇인가. 사람에게서 답을 재촉하며 마음은 준비되지 않은 채 결과만 요구하고 있지는 않은가. 불교에서는 이것을 정성精誠이라 한다. 정성은 상대를 움직이기 위한 기술이 아니라 먼저 나를 낮추는 수행이다. 세 번 찾는다는 것은 세 번 참아내고, 세 번 자신을 돌아본다는 뜻이다. 진정한 인재는 값으로 오지 않고, 진정한 인연은 속도로 맺어지지 않는다. 삼고초려는 옛말이 아니라 지금 이 시대가 가장 잃어버린 태도에 대한 조용한 경책이다. 풀집은 허름했으나 그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당랑거철螳螂拒轍’이라는 말이 있다, 사마귀가 수레바퀴를 막아선다는 이 짧은 고사 속에 오늘 사회의 그림자가 담겨 있다. 이말은 사마귀가 수레바퀴를 막아선다는 뜻이다. 작은 사마귀가 자기 힘을 알지 못한 채 거대한 수레를 멈추려 들다, 끝내 깔려버린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말이다. 부처님께서는 늘 지혜 없는 용기를 경계하셨다. 용기는 귀한 덕목이지만, 지혜가 따르지 않는 용기는 결국 스스로를 해치는 칼이 되기 때문이다. 수행 없는 용기는 분노가 되고, 성찰 없는 정의감은 폭력이 된다. 오늘의 사회를 돌아보면 당랑거철의 모습은 낯설지 않다. 분노가 판단을 대신하고, 감정이 사실을 앞지르며, 자신의 위치와 역량을 헤아리지 않은 채 목소리만 높이는 장면들이 일상이 되었다. 옳고 그름을 말하기에 앞서, 얼마나 깊이 보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묻는 일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 불교에서는 이러한 마음 상태를 아만我慢이라 한다. 자기를 바로 보지 못하는 마음, 세상을 자기 기준 하나로 재단하려는 집착이다. 아만이 커질수록 사람은 스스로를 강하다고 착각하지만, 실상은 가장 쉽게 부서지는 상태가 된다. 낮은 곳을 보지 못하는 마음은 결국 넘어짐으로 귀결된다.
법왕청신문 이준석 선임기자 | "벽사초불정사에 들어서거든 벽사라 말하고 초불이라 부를지어다. 벽사, 사됨은 물러가고 초불, 부처님의 기도가 머무는 곳.“ 사찰의 이름에 담긴 이 깊은 뜻은 벽사초불정사가 단순한 예배 공간이 아닌, 모든 사악함을 물리치고 부처님의 자비광명이 머무는 성스러운 도량임을 말해준다. 벽사辟邪, 즉 삿된 것을 물리친다는 의미와 초불初佛, 처음 부처님을 모신다는 뜻이 어우러진 이 이름 속에는 선조들의 간절한 염원이 새겨져 있다. 천년의 시간을 품은 이 사찰은 세월의 풍파 속에서도 꿋꿋이 제자리를 지키며, 수많은 신도들에게 위안과 깨달음의 길을 제시해왔다. 깊은 산중에 자리한 이곳은 속세의 번뇌를 내려놓고 맑은 마음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만나는 영험한 공간이다. 이번 다큐멘터리는 벽사초불정사의 과거와 현재를 조명하며, 그 속에 담긴 불교 문화의 깊이와 아름다움을 탐구한다. 고색창연한 전각의 처마 끝에서, 스님들의 일상적인 수행 속에서, 그리고 이곳을 찾는 이들의 간절한 기도 속에서 우리는 현대를 살아가는 지혜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사악함이 물러가고 부처님의 빛이 머무는 이 신성한 공간의 이야기 속으로 독자 여러분을 초대한다. 명절 전날
법왕청신문 김학영 기자 | 충청북도 청주시 미원면에 자리한 담화문화재단 벽사초불정사가 '천년의 뜰' 봉안당 및 영구위패 분양을 시작한다. 청주국제공항과 오송KTX역을 품은 교통 1번지 청주의 중심부에서 접근성이 뛰어난 입지를 자랑하며, 전국 어디서든 편리하게 참배할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을 갖췄다. 단순한 안치가 아닌, 기도가 이어지는 영원의 도량 벽사초불정사 봉안당은 떠난 이를 모시는 공간 그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 사악한 기운을 물리치고 복된 인연을 불러들이는 천년향화의 서원이 끊이지 않는 이곳은, 날마다 향불이 밝혀지고 스님의 염불과 기도가 쉬지 않는 살아있는 법당이다. "사람은 떠나도 인연은 남습니다"라는 서원처럼, 이곳은 묘지가 아닌 법당의 품이며, 사당이 아닌 불전의 자리다. 남은 이들의 마음까지 함께 위로받는 공간으로, 기제사의 부담을 덜고 천도와 회향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현대적 봉안 문화를 제시한다. 청주, 대한민국 교통의 심장부 벽사초불정사가 위치한 청주는 명실상부 대한민국 교통의 중심지다. 청주국제공항은 전국 각지와 해외를 연결하며, 오송KTX역은 서울-부산을 잇는 경부선과 호남선이 교차하는 교통 허브로서 수도권은 물론 전국 어디서든 1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괄목상대刮目相對이란, 눈을 씻고 다시 본다는 뜻이다. 어제의 사람이 오늘의 사람과 다르고, 과거의 판단이 오늘의 진실을 가릴 수 있음을 경계하는 말이다. 부처님께서는 늘 “상相에 머물지 말라”고 하셨다. 사람을 한 번의 모습으로 규정하고, 과거의 말 한마디로 그 존재 전체를 재단하는 것이 바로 무명無明에서 비롯된 집착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사회는 어떤가. 우리는 너무 쉽게 사람을 낙인찍는다. 한 번의 실수는 평생의 꼬리표가 되고, 과거의 기록은 현재의 노력을 가려버린다. 성장은 있는데, 인정은 없다. 불교의 눈으로 보면 이것은 큰 어리석음이다. 모든 것은 변하고,(제행무상諸行無常), 사람 또한 끊임없이 새로워진다. 오늘의 정진을 보지 않고 어제의 그림자만 붙드는 사회는 결국 스스로의 가능성도 함께 막아버린다. 괄목상대는 단지 칭찬의 말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을 제대로 보라는 수행의 태도다. 상대가 얼마나 변했는지, 얼마나 노력했는지, 얼마나 아픔을 견디며 여기까지 왔는지를 다시 보라는 요청이다. 지도자에게는 특히 더 절실한 가르침이다. 사람을 쓰되 과거만 보지 말고, 백성을 대하되 선입견부터 내려놓으라는 뜻이다. 조직도, 국가
법왕청신문 장규호 기자 | 29년의 시간은 단순한 연륜이 아니다. 외교 현장의 기록과 신뢰가 축적된 자산이다. 외교저널은 그 시간 동안 외교를 ‘권력의 언어’가 아닌 사람과 문화의 언어로 기록해왔다. 협정의 문장보다 현장의 표정, 선언의 수사보다 태도의 무게를 남겨온 기록이다. 이제 그 자산을 다음 세대에게 교육·훈련·실전 경험으로 돌려주는 일, 그것이 2026 K-외교문화사절단의 의미다. 외교저널은 그 시간 동안 외교를 ‘권력의 언어’가 아닌 사람과 문화의 언어로 기록해왔다. 이제 그 축적된 자산을 다음 세대에게 교육·훈련·실전 경험으로 되돌려주는 결정적 전환이 시작된다. 2026년 3월 착공, 같은 해 9월 완공을 목표로 하는 K-문화외교센터 국제회의장 건립이다. 이번 국제회의장은 담화문화재단이 주관하여 건립을 추진하고, 센터 운영은 29년 역사를 지닌 외교저널의 모체인 담화미디어그룹이 맡는다. 기록의 전문성과 미디어 운영 역량, 그리고 문화외교의 철학이 한 공간에서 결합되는 구조다. 이는 단순한 시설 건립이 아니라, 외교 인재 양성의 책임 주체가 명확한 시스템 구축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K-문화외교센터는 선언이 아니라 구조다. 약 1,500평 부지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양웅상쟁兩雄相爭”,이란 두 마리의 용이 서로 맞붙는다는 뜻이다. 실력이 비슷한 강자들끼리의 치열한 대결을 이르는 말이다. 오늘의 정치판을 바라보면 이 말보다 정확한 표현이 없다. 서로를 향해 “내가 옳다”, “네가 틀렸다”고 외친다. 정책보다 말이 앞서고, 비전보다 공격이 먼저 나온다. 양쪽 모두 스스로를 정의라 부르지만 정작 국민의 삶은 뒷전으로 밀려난다. 불교의 눈으로 보면 이것은 단순한 경쟁이 아니라 아我를 중심에 둔 싸움, 즉 아집의 충돌이다. 부처님께서는 “아집이 깊어질수록 고통은 커진다”고 하셨다. 정치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승리만을 향한 정치는 결국 모두를 괴롭히는 업을 낳는다. 양웅상쟁의 특징은 분명하다. 싸움은 화려하지만 남는 것은 상처뿐이다. 정치판에서 두 용이 싸우는 동안 시장은 흔들리고, 서민의 삶은 불안해지며, 청년은 미래를 잃고, 어르신은 노후를 걱정한다. 그러나 싸움의 중심에 선 이들은 그 고통을 직접 겪지 않는다. 말과 권력의 세계에서 승패만 계산할 뿐이다. 불교는 묻는다. “이 싸움은 중생을 이롭게 하는가.”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하는 싸움은 이미 수행의 길에서 벗어난 것이다. 유튜브 불교연합방송 바로
법왕청신문 이준석 대기자 | ESG 경영이 기업의 필수 과제로 자리 잡았지만, 여전히 많은 사회공헌 활동은 현금 기부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지적이 이어지고 있다. 이런 가운데 충청북도에서 논의 중인 ‘민관 ESG 장묘 혁신 모델’은 ESG를 실물 자산과 사회 시스템으로 전환한 사례로 주목받고 있다. 이 모델의 핵심 구조는 명확하다. 기업이 봉안당 분양가의 약 20%만 부담해 봉안권을 매입하고, 공익법인이 나머지 80%를 매칭해 사회에 환원한다. 지자체는 대상자 추천과 행정 연계만 담당하며, 직접적인 예산 투입은 없다. 장묘·복지·환경이라는 고비용 사회 문제를 민관 협력 구조로 해결하겠다는 접근이다. 이 사업을 주관하는 담화문화재단은 이를 ‘기업 사회환원 봉안증서’ 제도로 구체화했다. 기업은 봉안권을 직접 사용하지 않고 전량 사회 환원용으로 기부하며, 해당 봉안은 무연고자·저소득층·사회공헌자 등 장묘 취약계층을 대상으로 활용된다. 현금 기부와 달리, 봉안 인프라라는 실물 자산으로 남는다는 점에서 ESG의 실효성을 높였다는 평가다. 재무적 관점에서도 타당성은 분명하다. (예), 봉안 1기당 정상 비용을 400만 원으로 환산할 경우, 기업은 약 80만 원의 비용으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계포일낙季布一諾”, 한 번 한 약속은 반드시 지킨다는 뜻이다. 한나라의 장수 계포는 말 한마디에 생명을 걸었고, 사람들은 그의 약속을 천금보다 무겁게 여겼다. 약속이 곧 인격이던 시대였다. 그러나 오늘의 사회는 어떠한가. 정치의 약속은 선거가 끝나면 희미해지고, 조직의 공언은 상황 논리에 밀리며, 일상의 다짐조차 “그때 가 봐서”라는 말로 가볍게 흘러간다. 약속은 남발되고, 책임은 실종되었다.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말은 마음의 그림자요, 행위는 말의 증거이다.” 말이 가벼워지면 마음이 흐려지고, 마음이 흐려지면 업業은 어그러진다. 불교에서 경계하는 망어업妄語業, 즉 거짓말의 업은 남을 속이는 죄 이전에 자기 자신을 무너뜨리는 업이다. 약속을 어긴다는 것은 단순한 실수가 아니다. 그 말을 믿고 방향을 정한 사람의 인연을 끊는 일이며, 공동체의 신뢰를 무너뜨리는 행위다. 사회가 병들기 시작하는 지점은 언제나 말과 행동이 어긋나는 순간부터였다. 물론 사람은 완벽할 수 없다. 지키지 못할 상황도 생긴다. 그러나 계포일낙의 본뜻은 ‘절대 실수하지 말라’는 명령이 아니다. 지키려는 마음을 버리지 말라는 가르침이다. 지킬 수 없게 되었을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어부지리漁父之利” 란, 두 사람이 다투는 사이, 아무 노력도 하지 않은 제삼자가 이익을 얻는다는 말이다. 이 말은 단순한 고사성어가 아니라 오늘의 사회 구조를 정확히 꿰뚫는 거울이다. 현대사회는 끊임없이 사람들을 갈라놓는다. 세대와 세대, 지역과 지역, 이념과 이념, 직장 안에서는 부서와 부서, 온라인에서는 진영과 진영이 맞서 싸운다. 서로를 향한 말은 점점 거칠어지고, 상대의 말은 들으려 하지 않는다. 옳고 그름보다 이기고 지는 것이 먼저가 된다. 그러나 그 치열한 싸움의 끝에서 정작 웃고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유튜브 불교연합방송 바로가기 다투는 당사자들이 아니다. 댓글로 싸우는 시민도 아니고, 현장에서 고생하는 노동자도 아니다. 갈등을 설계한 자, 분열을 이용한 자, 침묵 속에서 이익을 챙긴 자가 어부가 된다. 불교의 눈으로 보면 어부지리는 단순한 기회주의가 아니라 번뇌가 낳은 업의 결과다. 분노가 커질수록 판단은 흐려지고, 집착이 강해질수록 시야는 좁아진다. 그 틈을 타 누군가는 말없이 그물을 던진다. 부처님께서는 “분노는 분노로써 그칠 수 없고, 지혜로써만 멈출 수 있다”고 하셨다. 어부지리가 반복되는 이유는 사람들이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