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생각은 쉼 없이 일어나고, 우리는 그 생각 하나에 몸과 마음을 붙들린다. 기쁜 생각에 머물면 곧 불안이 따르고, 괴로운 생각에 머물면 그 괴로움이 나를 이끈다. 그래서 선에서는 말한다. 염념무주念念無住 한 생각, 한 생각에 머물지 말라. [담화총사 : 네이버 동영상 2500개 ] 여기서 말하는 ‘무주無住’는 생각을 없애라는 말이 아니다. 생각을 막으라는 뜻도 아니다. 다만 그 생각을 ‘나’로 삼지 말라는 가르침이다. 생각은 구름과 같고, 마음은 하늘과 같다. 구름이 지나가도 하늘은 다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구름 하나를 붙잡고 “이것이 나다”라고 할 때 그때부터 하늘은 흐려진다. 기억도 그렇고, 후회도 그렇고, 기대도 마찬가지다. 한 생각에 머무는 순간 그 생각은 집이 되고, 집이 되면 우리는 거기서 살기 시작한다. 염념무주는 집을 짓지 말라는 가르침이다. 생각이 일어나면 그냥 알아차리고, 알아차렸다면 놓아주라는 말이다. 기쁜 생각에도 머물지 말고, 괴로운 생각에도 머물지 말라. 좋은 생각이라 붙잡으면 그 또한 집착이 되고, 나쁜 생각이라 밀어내면 그 또한 속박이 된다. 선에서는 말한다. “지나가게 두어라.” 지나가면 생각은 생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우리는 종종 묻습니다. “불교를 믿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단순한 믿음만으로는 길이 완성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믿음은 문을 여는 열쇠일 뿐, 그 문을 지나 걷고, 끝내 도착해야 할 길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담화총사 : 네이버 동영상 2,500개 바로보기] 그 길을 네 글자로 정리한 말이 바로 신해행증信解行證입니다. 불교 수행의 전 과정을 담은 가장 간결하고도 정확한 가르침입니다. 信믿을 신, 믿음은 시작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옳다고 받아들이는 마음, “이 길을 따라가도 괜찮다”는 내면의 신뢰입니다. [담화총사 : 네이버 동영상 2,500개 바로보기] 그러나 이 믿음은 맹신이 아닙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신信은 확인되지 않은 것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의심 속에서도 한 걸음 내딛는 용기입니다. 解(풀해), 믿음은 반드시 이해로 나아가야 합니다. 왜 집착이 괴로움이 되는지, 왜 내려놓음이 자유가 되는지 스스로 납득하지 못한다면 믿음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이해는 머리로만 아는 지식이 아니라 삶의 경험 속에서 “아, 그렇구나” 하고 고개가 끄덕여지는 깨달음입니다. 行(행할 행), 이해했다면 이제 걸어야 합니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겨울은 끝났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봄이 들어선다고 말할 뿐입니다. 입춘立春, ‘봄이 선다’는 이 두 글자는 계절의 변화이기 전에 삶의 태도를 묻는 말입니다. [담화총사 : 네이버 동영상 2,500개 바로보기] 아직 바람은 차고, 땅은 굳어 있지만 봄은 이미 문턱에 서 있습니다. 입춘대길立春大吉, 봄이 시작되니 큰 길함이 열린다는 이 말은 단순한 축원이 아닙니다. 불교에서 봄은 무언의 가르침입니다. 씨앗은 아직 흙 속에 있으나 이미 자라기 시작했고, 눈에 보이지 않아도 변화는 멈추지 않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것은 인연 따라 일어나고, 인연 따라 사라진다.” 입춘은 말합니다. 지금 당장 달라지지 않아도 이미 변화의 인연은 성숙해지고 있다고. 대길은 밖에서 오지 않는다 사람들은 입춘대길을 붙이며 복이 오기를 기다립니다. 그러나 불교의 가르침은 다릅니다. 대길은 [담화총사 : 네이버 동영상 2,500개 바로보기] 운이 아니라 방향입니다. 겨울을 탓하지 않고, 어제를 붙잡지 않으며, 다시 시작할 마음을 세울 때 그 자리가 곧 대길입니다. 봄은 누군가에게만 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봄을 맞이하는 마음은 사람마다 다릅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요즘 사람들은 너무 많은 것을 쥐고 살아갑니다. 성과를 놓치지 않으려 쥐고, 관계를 잃을까 두려워 쥐고, 불안이 올까 봐 미래까지 미리 움켜쥡니다. 그러나 쥔 손은 가득해질수록 새로운 것을 받을 자리가 없어집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때 조용히 말씀하십니다. 방하착득放下着得 놓아야 얻을 수 있다고... 방하착득은 포기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도망치라는 가르침도 아닙니다. 불교에서 ‘놓는다’는 것은 무책임이 아니라 집착을 내려놓는 일입니다. 오늘의 사회는 놓지 못해 더 힘들어집니다. 이미 끝난 관계를 붙잡고, 지나간 실패를 품에 안고, 남의 기준을 자신의 운명처럼 끌어안습니다. 그 결과 마음은 무거워지고 삶은 점점 좁아집니다. 부처님은 분명히 하셨습니다. 괴로움의 뿌리는 결핍이 아니라 집착이라고. 성공에 집착하면 실패가 두렵고, 인정에 집착하면 비교에 지치며, 통제에 집착하면 타인의 자유가 위협이 됩니다. 그래서 방하착득은 말합니다. “잃을까 두려워 쥐는 손을 먼저 놓아라.” 이 사회에는 더 가지라는 말은 넘치지만 잘 놓으라는 가르침은 드뭅니다. 그러나 놓아야 쉼이 오고, 쉼이 와야 다음 길이 보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빈 그릇에만 물이 담긴다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요즘 세상은 너무 자주 바뀝니다. 말이 바뀌고, 기준이 바뀌고, 어제의 원칙이 오늘의 장애물이 됩니다.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면 뒤처진다 말하고, 흐름을 거스르면 고집이라 손가락질합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변화 속에서도 지켜야 할 한 가지를 남기셨습니다. 그 말이 바로 수연불변隨緣不變입니다. 수연불변이란 인연을 따르되, 본성은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불교는 현실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변하고, 조건과 인연은 늘 새롭게 엮입니다. 그래서 불교는 말합니다. “인연을 거슬러 싸우지 말라.” 이것이 수연隨緣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부처님은 분명히 경계하셨습니다. “인연에 휩쓸려 자신을 잃지 말라.” 이것이 불변不變입니다. 오늘의 사회를 보면 수연은 있으되 불변은 사라진 모습이 많습니다. 여론이 바뀌면 말이 바뀌고, 권력이 옮겨가면 신념도 옮겨가며, 이익 앞에서는 가치가 쉽게 접힙니다. 그것은 유연함이 아니라 중심을 잃은 흔들림입니다. 수연불변은 편리한 선택을 허락하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 어려운 길입니다. 상황은 바뀌어도 사람에 대한 존엄은 바꾸지 않고, 시대는 달라져도 양심과 책임은 내려놓지 않으며, 불리해져도 옳다고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많은 분들이 고백합니다. “불교 말씀이 좋은 건 알겠는데, 어렵고 낯설어요.” 그 낯섦의 정체를 한 단어로 말하면 바로 생경生硬입니다. 생경하다는 것은 틀렸다는 뜻이 아닙니다. 너무 딱딱하고, 너무 멀고, 지금의 삶과 연결되지 않는 느낌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본래 사람을 살리기 위한 말씀이었는데, 언제부터인가 사람 위에 올라선 말이 되어 듣는 이를 조용히 물러서게 만들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묻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정말 어려운 것일까, 아니면 우리가 너무 멀리 가져다 놓은 것일까. 생경한 가르침을, 살아 있는 말로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은 경전 속에서만 울리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시장 한복판에서, 아이를 안은 부모의 숨결 속에서, 실패하고 좌절한 사람의 한숨 속에서 함께 살아 움직이던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며 말은 점점 장식이 되었고, 뜻은 점점 설명이 필요해졌으며, 가르침은 점점 생경한 언어가 되었습니다. 불교가 어려워진 것이 아니라 삶과의 거리가 멀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채널은 가르침을 높이지 않으려 합니다. 대신 낮추겠습니다. 교리를 늘어놓기보다 하루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용어를 설명하기보다 사람
법왕청신문 장규호 기자 | 맑은 물은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한 번 흐려지면 그 원인을 숨기지 못합니다. 옛사람들은 물고기 한 마리가 물을 흐린다고 하여 이를 일어탁수一魚濁水라 불렀습니다. 오늘의 세상에도 이 말은 조용히, 그러나 분명히 울립니다. 일어탁수一魚濁水라는 말이있다. 한 사람의 그릇된 행동이 공동체 전체를 흐리게 만든다는 뜻입니다. 불교에서는 이를 업業의 전염이라 말합니다. 행동 하나, 말 한마디, 마음 한 생각이 결국 주변으로 번져 같은 물을 마시게 하기 때문입니다. 요즘 사회를 돌아보면 문제는 늘 “누가 잘못했는가”보다 “누가 책임지는가”에 있습니다. 자기 한 생각은 가볍다 여기고, 그 파장은 공동체에 맡겨버릴 때 물은 금세 탁해집니다. 부처님께서는 청정은 혼자 지키는 덕목이 아니라 함께 가꾸는 수행이라 하셨습니다. 수행자는 스스로를 닦되 늘 ‘이 마음이 다른 이에게 어떤 물결을 남길까’를 먼저 살핍니다. 일어탁수의 교훈은 비난이 아닙니다. 경계입니다. “내가 이 물을 흐리고 있지는 않은가.” “지금의 말과 행동이 공동체의 숨을 막고 있지는 않은가.” 맑은 물은 큰 정화에서 오지 않습니다. 작은 삼킴, 작은 멈춤, 작은 부끄러움에서 시작됩니다.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요즘 청년 불자들은 종종 이런 생각을 합니다. “나는 불자인가, 그냥 절에 가는 사람인가.” 바쁘고, 흔들리고, 마음은 늘 알림 소리에 쫓깁니다. 수행은 멀게 느껴지고, 죽음과 봉안 이야기는 더더욱 내 얘기가 아닌 것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불교는 언제나 묻습니다. “지금, 네 마음은 어디에 머물러 있느냐.” 불경에 나오는 연화동자는 깨달음을 외치지 않았습니다. 대단한 수행을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흔들리지 않는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볼 줄 알았을 뿐입니다. 연꽃 위에 앉은 아이처럼 진흙 속에서도 마음을 잃지 않는 것, 그게 수행이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이 땅에 일붕 초대법왕이 계셨습니다. 법왕께서는 산속에만 머무르지 않으셨습니다. 세상 한가운데로 들어와 더 고요해지는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세상이 시끄러울수록 마음은 더 조용해야 한다.” 이 말은 오늘을 사는 청년 불자에게 유난히 깊게 다가옵니다. 그리고 지금, 그 가르침을 이어 담화총사는 하나의 질문을 던집니다. “신행은 어디까지 이어질 수 있는가.” 그 답이 벽사초불정사 ‘천년의 뜰’입니다. 천년의 뜰은 ‘죽음을 준비하는 공간’이 아닙니다. 오히려 삶의 태도를 묻는 자리입니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불교에서 신행이란 절에 다니는 횟수가 아니라 삶의 태도를 부처님 법에 맡기는 일이다. 그래서 불자는 삶의 끝에서도 신행을 멈추지 않는다. 옛 경전에 연화동자의 이야기가 전해진다. 연꽃 위에 앉아 태어난 아이, 흔들리는 세상 속에서도 마음을 먼저 고요히 두었던 존재. 연화동자는 깨달음을 말하지 않았다. 다만 흔들리지 않는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았을 뿐이다. 그 고요한 관조가 곧 수행이었고, 그 삶 자체가 법문이었다. 세월이 흘러 이 땅에 일붕 초대법왕이 계셨다. 법왕께서는 권위로 가르치지 않으셨고, 말로만 법을 전하지 않으셨다. 혼란의 시대 속에서도 분별보다 관조를, 분노보다 자비를 택하셨다. 법왕께서 평생 강조하신 것은 화려한 수행이 아니라 정관靜觀, 곧 고요히 보고 깊이 관하는 수행이었다. “마음이 고요하면 생사 또한 두려울 것이 없다.” 이 말은 삶뿐 아니라 죽음 이후까지 꿰뚫는 가르침이었다. 그리고 그 법맥을 이어 오늘을 살아가는 수행자가 있다. 제자 담화총사다. 담화총사는 스승의 가르침을 말이 아닌 공간과 실천으로 이어가고자 했다. 그 결실이 바로 벽사초불정사 ‘천년의 뜰’이다. 천년의 뜰은 봉안을 위한 시설이 아니다. 이곳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사람들은 흔히 이름을 남기고 싶어 합니다. 직함을 얻고, 평판을 쌓고, 불리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늘 반대로 말씀하셨습니다. 이름은 바람을 타고 퍼지지만, 덕은 땅에 스며들어 남는다고. 심덕승명心德勝名이란, 마음의 덕이 이름보다 낫다는 이 말은 불교의 핵심을 가장 조용하게 드러내는 가르침입니다. 이름은 남이 불러주는 것이고, 덕은 스스로 쌓는 것입니다. 이름은 사람이 붙이지만,덕은 삶이 증명합니다. 오늘의 사회는 덕보다 명성을 앞세웁니다. 조용히 옳은 일을 하는 사람보다 크게 말하는 사람이 주목받고, 묵묵히 책임지는 이보다 잘 포장하는 이가 앞에 섭니다. 불교의 눈으로 보면 이는 거꾸로 선 세상입니다. 명은 크나 덕이 없으면 그 명은 짐이 되고, 덕은 깊으나 이름이 없으면 그 덕은 세상을 떠받칩니다.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이름을 남기라 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탐욕을 줄이고, 분노를 누그러뜨리고, 어리석음을 밝히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이 곧 덕을 쌓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심덕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사람의 말투에 드러나고,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 남으며, 위기 앞에서 선택으로 증명됩니다. 명은 박수 속에서 자라지만, 덕은 침묵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괄목상대刮目相對이란, 눈을 씻고 다시 본다는 뜻이다. 어제의 사람이 오늘의 사람과 다르고, 과거의 판단이 오늘의 진실을 가릴 수 있음을 경계하는 말이다. 부처님께서는 늘 “상相에 머물지 말라”고 하셨다. 사람을 한 번의 모습으로 규정하고, 과거의 말 한마디로 그 존재 전체를 재단하는 것이 바로 무명無明에서 비롯된 집착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사회는 어떤가. 우리는 너무 쉽게 사람을 낙인찍는다. 한 번의 실수는 평생의 꼬리표가 되고, 과거의 기록은 현재의 노력을 가려버린다. 성장은 있는데, 인정은 없다. 불교의 눈으로 보면 이것은 큰 어리석음이다. 모든 것은 변하고,(제행무상諸行無常), 사람 또한 끊임없이 새로워진다. 오늘의 정진을 보지 않고 어제의 그림자만 붙드는 사회는 결국 스스로의 가능성도 함께 막아버린다. 괄목상대는 단지 칭찬의 말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을 제대로 보라는 수행의 태도다. 상대가 얼마나 변했는지, 얼마나 노력했는지, 얼마나 아픔을 견디며 여기까지 왔는지를 다시 보라는 요청이다. 지도자에게는 특히 더 절실한 가르침이다. 사람을 쓰되 과거만 보지 말고, 백성을 대하되 선입견부터 내려놓으라는 뜻이다. 조직도, 국가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중도中道는 가운데를 택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원융圓融은 섞여 흐린다는 뜻이 아닙니다. 중도원융이란 어느 한쪽을 버리지 않으면서도, 어느 한쪽에 매이지 않는 삶의 태도입니다. 우리는 늘 선택의 갈림길에 섭니다. 옳고 그름, 옳음과 편안함, 원칙과 현실 사이에서 하나를 잡으면 하나를 잃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마음이 늘 흔들립니다. 유튜브 불교연합방송 바로가기 그러나 부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버리거나 붙들지 말고, 꿰뚫어 보라.” 중도는 타협이 아닙니다. 원융은 흐릿함이 아닙니다. 분별을 넘어서는 지혜입니다. 생활 속에서 중도원융은 이렇게 드러납니다. 화를 낼 이유가 있어도, 화에 끌려가지 않는 것. 참아야 할 순간에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왜 화가 일어났는지를 바라보는 것. 옳은 말을 해야 할 때에도 상처를 주지 않는 방법을 함께 찾는 것. 내가 맞다는 생각을 내려놓는 것이 아니라, 내 생각도 하나의 관점일 뿐임을 아는 것. 중도원융의 삶은 늘 조용합니다. 극단으로 치닫지 않기에 소란이 없고, 집착하지 않기에 상처가 깊지 않습니다. 물은 한쪽으로만 흐르면 범람하고, 불은 한쪽으로만 타오르면 모든 것을 태웁니다. 그러나 물과 불이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어느 날 한 젊은이가 스님을 찾아와 말했습니다. “스님, 저는 수행을 하려고 마음을 먹으면 자꾸만 번뇌가 올라옵니다. 욕심도 나고, 화도 나고, 비교하는 마음도 생깁니다. 이런 마음으로 수행을 해도 되겠습니까?” 유튜브 불교연합방송 바로가기 스님은 잠시 침묵하다가 마당의 신발을 가리키며 물으셨습니다. “저 신발은 왜 밖에 놓아두는 줄 아는가?” 젊은이는 대답했습니다. “흙이 묻어 있기 때문입니다.” 스님은 미소 지으며 말씀하셨습니다. “흙이 묻는 것이 두려워 신발을 신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한 걸음도 걷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조용히 덧붙이셨습니다. “마음도 그렇다네.” 오늘의 사회는 완벽하지 않으면 시작조차 하지 말라고 말한다. 조금 부족하면 자격이 없다고 하고, 흠이 보이면 침묵하라고 가르친다. 그래서 사람들은 말한다. “제가 아직 부족해서요.” “마음이 깨끗해지면 그때 하겠습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묻는다. “마음의 티끌이 두렵다 하여 청정한 수행을 포기하겠는가.” 마음에 티끌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욕심 없는 인간, 분노 없는 삶, 흔들리지 않는 하루가 과연 존재하는가, 수행은 티끌이 없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티
법왕청신문 장규호 기자 | 옛날에 늘 불평만 하며 사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무슨 일이든 잘 풀리지 않으면 그는 말했습니다. “다 내 팔자야.” “전생업이 너무 센가 봐.”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인가 보다.” 그는 업을 원망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의 마음은 한 번도 들여다보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그는 절을 찾아 스님께 물었습니다. “스님, 저는 왜 이렇게 되는 일이 없습니까? 아무리 애써도 인생이 나아지질 않습니다.” 스님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물으셨습니다. “지금 이 순간, 그대의 마음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는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유튜브 불교연합방송 바로가기 스님은 찻잔에 차를 따르며 말씀하셨습니다. “업은 과거에서 온 것이지만, 그 업을 굴리는 힘은 지금의 마음이다. 마음이 어두우면 같은 업도 짐이 되고, 마음이 밝으면 같은 업도 길이 된다.” 그날 이후 그는 작은 실천을 시작했습니다. 누군가에게 짜증이 올라올 때, 한 번 더 숨을 고르고 손해 보는 것 같아도 정직을 택했으며 하루에 한 번은 ‘그래도 감사한 것’을 떠올렸습니다.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세상은 그대로였지만, 사람들이 달라 보였고 사건의 무게가 가벼워졌습니다. 어
법왕청신문 장규호 기자 | 선한 원인에는 반드시 선한 결과가 따릅니다. 이 말은 먼 훗날의 보상을 약속하는 말이 아니라, 오늘의 선택이 이미 결과를 만들고 있다는 부처님의 현실적인 가르침입니다. 우리는 종종 묻습니다. “왜 착하게 살아도 바로 달라지지 않는가.” 그러나 씨앗을 심고 그날 열매를 기대하지 않듯, 선한 마음 또한 시간과 인연을 따라 익어갑니다. 지금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선한 원인은 거창하지 않습니다. 말 한마디를 부드럽게 고르는 것, 상대의 입장을 한 번 더 생각하는 것, 이익 앞에서 양심을 먼저 세우는 것. 이 작은 선택들이 바로 선인입니다. 선과善果는 우리가 예상한 모습으로만 오지 않습니다. 금전이나 성공이 아니라, 마음의 평안으로 오기도 하고 위기의 순간에 도움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때로는 내 삶이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이의 삶에서 열매 맺기도 합니다. 유튜브 불교연합방송 바로가기 부처님께서는 인과를 서두르지 말라 하셨습니다. 조급해질수록 마음은 흐려지고, 흐려진 마음은 다시 업을 어둡게 합니다. 선인선과를 믿는다는 것은, 결과를 재촉하지 않고 지금의 마음을 바르게 쓰는 수행입니다. 오늘 하루 이렇게 실천해 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