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왕청신문 장규호 기자 |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배운 사람이 많고, 똑똑한 사람도 많습니다. 그러나 배움이 깊다고 해서 반드시 그 마음까지 바른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많이 배운 사람이 자신의 지식을 이용해 진실을 왜곡하고, 권력이나 세상의 눈치를 보며 말을 바꾸는 모습을 우리는 종종 보게 됩니다. 이를 두고 옛사람들은 곡학아세曲學阿世라 했습니다.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배움을 굽혀 세상에 아첨한다”는 뜻입니다. 학문은 본래 진리를 밝히기 위한 등불이어야 합니다. 어둠을 밝히라고 있는 것이지, 누군가의 욕망을 비추는 손전등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사회를 돌아보면 어떻습니까? 진실을 말해야 할 사람이 침묵합니다. 정의를 외치던 사람이 어느 순간 권력 곁에 서 있습니다. 전문가라는 이름으로 사실을 감추고, 지식인이라는 이름으로 대중의 환심을 사는 말을 골라 합니다. 말은 번지르르하지만 그 속에는 진심이 없습니다. 양심보다 자리, 진실보다 이익, 정의보다 인기. 이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마주한 곡학아세의 얼굴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정직한 마음이 수행의 시작”이라 하셨습니다. 불교에서는 정어正語를 매우 중요하게 여깁니다. 바른 말이란 단순히
법왕청신문 이준석 기자 | 사람은 누구나 길 위에 서 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우리는 이미 떠나는 존재이며, 어디론가 향하고 있는 존재다. 고향을 떠나 도시로, 도시를 떠나 또 다른 삶으로, 사람은 끊임없이 옮겨 다닌다. 그래서 어떤 이는 말한다. “나는 늘 떠돌아다니는 인생이다.” 그러나 과연 떠돌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아직 머물 곳을 몰라 헤매고 있는 것일까. 머무는 곳이 곧 고향이다. 우리는 흔히 고향을 과거로 생각한다. 태어나고 자란 곳, 어릴 적 기억이 남아 있는 장소를 고향이라 부른다. 그러나 삶은 뒤로 돌아가지 않는다. 고향은 기억 속에 남을 뿐, 지금의 삶을 살아주지는 않는다. 불가에서는 말한다. “지금 머무는 그 자리가 곧 도량이다.” 지금 서 있는 자리, 지금 숨 쉬는 이 순간, 지금 마주한 인연 속에서 우리는 이미 ‘머물고’ 있다. 그렇다면 고향은 먼 곳이 아니라 지금 이 자리, 이 마음 속에 있다. 떠돌음은 몸이 아니라 마음이다. 사람이 떠도는 이유는 몸이 움직여서가 아니다. 마음이 머물지 못하기 때문이다. 한 곳에 있어도 불안하고, 무엇을 가져도 만족하지 못하고, 어디에 있어도 ‘여기가 아니다’라고 느낄 때, 그때 우리는 비로소 떠돌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세상은 늘 수많은 소리로 가득 차 있습니다. 사람의 말, 감정의 흔들림, 욕망의 속삭임이 서로 뒤엉켜 무엇이 참이고 무엇이 거짓인지조차 분간하기 어려운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종종 거짓을 진실이라 믿고, 진실을 외면한 채 스스로의 착각 속에서 길을 잃습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진실을 진실로 알고, 진실이 아닌 것을 진실이 아님으로 아는 사람, 그는 마침내 올바른 진실을 깨닫게 된다.” 이 가르침은 단순한 지식이 아닙니다. 삶을 바꾸는 지혜이며, 마음을 밝히는 등불입니다. 어느 날, 한 어린 동자가 스승에게 물었습니다. “스승님, 진실은 어디에 있습니까?” 스승은 미소 지으며 대답했습니다. “진실은 멀리 있지 않다. 다만 네가 보고 싶지 않은 곳에 있을 뿐이다.” 사람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습니다. 자신에게 유리한 것은 진실이라 여기고, 불편한 것은 거짓이라 밀어냅니다. 이것이 바로 무명無明입니다. 진실을 가리는 가장 큰 장애는 세상이 아니라 바로 자기 마음입니다. 법화경은 말합니다. 모든 중생은 본래 부처의 성품을 지니고 있으며, 그 성품은 진실을 향해 있습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사람의 마음은 늘 두 가지에 붙들려 있습니다. 하나는 망상妄想이고, 또 하나는 혼침昏沈입니다. 망상은 생각이 흩어지는 것이고, 혼침은 마음이 가라앉아 잠으로 빠지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는 수행자의 가장 큰 장애입니다. 그중에서도 혼침, 즉 잠에 빠지는 것은 마음을 어둡게 하고, 지혜의 등불을 꺼뜨리는 가장 빠른 길입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이 어둠을 깨는 가장 쉬운 방편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바로 고성염불高聲念佛입니다. 조용히 속으로만 염불하면 마음은 쉽게 흐려지고, 몸은 점점 무거워져 잠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소리를 높여 또렷하게, 힘 있게 염불하면 그 소리는 곧 자신의 정신을 깨우는 종소리가 됩니다. 큰 소리로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는 순간, 귀로 그 소리를 다시 듣게 됩니다. 이때 일어나는 것은 단순한 발성이 아닙니다. 입은 부처를 부르고 귀는 그 소리를 듣고 마음은 그 소리에 집중합니다 이 세 가지가 하나로 모이면 흩어졌던 정신이 한순간에 모이고 잠은 설 자리를 잃게 됩니다. 잠이 온다는 것은 몸이 피곤해서가 아니라 마음이 흐려졌기 때문입니다. 고성염불은 그 흐림을 깨뜨립니다. 마치 어두운 방에 불을 밝히면 어둠이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사람은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변하는 세상 속에 놓여 있다. 계절이 바뀌고 사람이 바뀌고 환경이 바뀐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사람의 마음은 변화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나는 원래 이렇게 살아왔다” “예전에는 이렇게 했는데” 과거의 방식에 머물러 현재를 보지 못하는 것이다. 각주구검刻舟求劍이란 말이있다. 배 위에서 칼을 떨어뜨린 뒤 그 자리에 표시를 해두고 나중에 그 자리를 찾아 칼을 찾으려 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배는 이미 흘러가고 있다. 칼이 떨어진 곳은 이미 지나가 버렸는데 사람은 표시만 믿고 같은 자리를 찾으려 한다. 이것이 바로 어리석음이다. 우리의 삶도 이와 다르지 않다. 상황은 변했는데 생각은 그대로이고 세상은 움직이는데 마음은 멈춰 있다. 그래서 우리는 길을 잃는다. 불교에서는 말한다. “모든 것은 무상無常하다.”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변하지 않으려 한다. 과거의 기억을 붙잡고 옛 방식만 고집하며 지금 이 순간을 놓쳐버린다. 그래서 괴로움이 생긴다. 변하는 세상에 고정된 마음으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과거를 붙잡지 않는다. 흘러가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변화 속에서 자신을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이 세상은 겉으로는 밝아 보이지만 실상은 어둠 속에 덮여 있다. 사람들은 빛 속에 사는 것 같지만 욕심과 분노, 집착과 어리석음 속에서 스스로를 가두며 살아간다. 그래서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이 세상은 무명無明의 어둠 속에 잠겨 있다고. 그렇다면 그 어둠 속에서 누가 저 지혜의 빛을 볼 수 있단 말인가. 모두가 같은 하늘 아래 살지만 모두가 같은 세상을 보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이는 눈을 뜨고도 보지 못하고 어떤 이는 아무리 설명해도 깨닫지 못한다. 왜일까. 그 이유는 단 하나다. 마음이 닫혀 있기 때문이다. 지혜의 빛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 안에 존재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빛을 보지 못한다. 욕심이 눈을 가리고 집착이 마음을 막으며 어리석음이 자신을 가두기 때문이다. 그래서 법화경은 말한다. 이 세상에서 진정으로 깨어나는 사람은 많지 않다고. 마치 새장 속에 갇힌 새들이 하늘을 바라보면서도 날아갈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문은 열려 있지만 스스로 나가지 못하고 익숙한 좁은 공간에 머무르는 것이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몇 마리의 새는 결국 날아오른다. 두려움을 넘어 자신을 벗어나 하늘로 향한다. 그 새들은 안다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사람은 누구나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살아간다. 부와 명예, 권력, 그리고 남보다 앞서고 싶은 마음과 우리는 그것을 ‘성공’이라 부르며 그것을 위해 많은 시간을 바친다. 하지만 어느 날 문득 깨닫게 된다. 지금까지 붙잡고 있던 것들이 과연 무엇이었는지를. “남가일몽南柯一夢” 남쪽 나뭇가지 아래에서 꾼 한낱 꿈과 같다는 뜻이다. 한때의 부귀영화도 권력도 결국은 꿈처럼 사라진다는 말이다. 불교에서는 이를 무상無常이라 한다. 모든 것은 변하고 머물지 않는다. 우리가 집착하는 것들 또한 시간이 지나면 모두 흘러가고 사라진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것을 영원한 것처럼 붙잡고 놓지 못해 괴로워한다. 성공을 이루어도 불안하고 잃을까 두려워하며 결국 마음의 평안을 얻지 못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모든 것은 잠시 머무를 뿐이다.” 남가일몽의 가르침은 단순히 허무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지금 이 순간을 더 소중히 여기라는 뜻이다. 지나간 것은 이미 꿈이 되었고 다가올 것 또한 아직 오지 않았다. 우리가 진짜로 살 수 있는 시간은 오직 지금뿐이다. 그래서 수행자는 결과보다 마음을 바라보고 소유보다 내려놓음을 택한다. 가지려 할수록 괴로워
법왕청신문 장규호 기자 | 흰 새 한 마리가 있습니다. 어둠이 아직 완전히 걷히지 않은 새벽, 그 새는 머뭇거리지 않고 태양을 향해 날아오릅니다. 땅의 습기와 안개, 바람의 흔들림을 뒤로하고 오직 빛을 향해 날아갑니다. 이 모습은 곧 수행자의 길이며, 깨어난 자의 모습입니다. 법구경의 말씀에 이르기를, “마라와 그의 군대를 처부순 이는 이 세상을 멀리 벗어난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마라는 단지 외부의 존재가 아닙니다. 탐욕, 분노, 어리석음, 집착, 두려움이 모든 것이 곧 우리 마음속의 마라입니다. 우리는 흔히 외부의 장애를 두려워하지만, 정작 우리를 묶어두는 것은 내부의 번뇌입니다. 수행이란 멀리 있는 어떤 세계를 찾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내 안에 있는 어둠을 걷어내는 일입니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습니다. 단지 빛이 없을 뿐입니다. 우리가 마음을 밝히고, 한 생각을 바르게 세우는 순간, 마라는 설 자리를 잃습니다. 흰 새가 태양을 향해 날아가듯, 수행자는 깨달음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날아오르는 용기’입니다. 많은 이들이 알고는 있지만, 날아오르지 못합니다. 익숙한 삶, 익숙한 고통 속에 머물며 변화를 두려워합니다. 하지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사람은 누구나 배우며 살아간다. 그러나 우리는 흔히 좋은 것만 배우려고 한다. 훌륭한 사람의 말, 성공한 사람의 삶, 아름다운 이야기만을 배움의 대상으로 삼는다. 하지만 불교의 지혜는 그보다 한 걸음 더 깊다.“他山之石”타산지석, 즉, 다른 산의 돌이라도 내 산의 옥을 가는 데 쓰일 수 있다는 뜻이다. 이는 단순한 격언이 아니다. 우리 삶을 바꾸는 수행의 태도를 말해주는 가르침이다. 우리는 보통 남의 잘못을 보면 비판한다. “저 사람은 왜 저럴까” “나는 저렇게 하지 말아야지” 이렇게 생각하며 남을 판단하는 데 그친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다르다. 남의 허물을 보며 자신을 돌아본다. 남의 어리석음을 보며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남의 실수를 보며 자신의 길을 바로잡는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말한다. 모든 것은 나를 위한 공부라고. 좋은 사람도 스승이지만 나쁜 사람 또한 스승이다. 칭찬은 나를 기쁘게 하지만 비난은 나를 성장하게 한다. 타산지석의 진정한 의미는 남을 통해 나를 깨닫는 데 있다. 세상에는 완벽한 사람이 없다. 그러므로 완벽한 배움도 없다. 우리는 매일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수많은 일을 겪는다. 그 모든 것이 내 마음을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사람의 마음에는 기쁨과 슬픔, 사랑과 미움이 함께 자리합니다. 그 가운데에서도 사람을 가장 오래 괴롭히는 감정이 있다면 아마 미움일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받거나 억울한 일을 겪으면 마음속에는 자연스럽게 원망과 미움이 생겨납니다. 그 감정은 처음에는 작은 그림자처럼 시작되지만, 마음속에서 계속 붙잡고 있으면 점점 커져 결국 삶 전체를 어둡게 만들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흔히 이렇게 생각합니다. “저 사람이 나를 괴롭혔다.” “저 사람이 나를 힘들게 만들었다.” 그래서 미움의 화살을 상대에게 향하게 합니다. 그러나 법화경이 전하는 가르침은 그보다 훨씬 깊습니다. 미움은 상대를 향한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자신을 괴롭히는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순간 우리의 마음은 이미 평화를 잃어버립니다. 상대는 이미 그 일을 잊고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미움을 품고 있는 사람은 그 일을 계속 떠올리며 스스로 마음을 괴롭힙니다. 마치 무거운 돌을 들고 있으면서 상대에게 던지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돌을 들고 있는 동안 가장 먼저 힘들어지는 사람은 바로 돌을 들고 있는 자신입니다. 불교에서는 이 마음을 집착의 고리라고 말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우리는 사람을 본다고 말한다. 그러나 정작 우리는 사람을 보고 있는가, 아니면 그 사람이 가진 것을 보고 있는가. 재물, 지위, 명예는 사람을 평가하는 가장 손쉬운 기준이 된다. 눈에 보이는 것은 분명하고 빠르게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준은 언제나 본질을 흐리게 만든다. 불교 경전인 『대장엄론경』에는 이와 관련된 깊은 통찰을 전하는 이야기가 있다. 옛날 한 마을에 장사를 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의 집안은 선대에는 큰 부자였으나 세월이 흐르며 몰락하여, 그는 가난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가난해지자 주변 사람들의 태도는 달라졌다. 친척과 친구들은 더 이상 그를 찾지 않았고, 오히려 냉담한 시선으로 그를 대했다. 사람들은 그를 보지 않았다. 그의 형편을 보고 있었다. 결국 그는 고향을 떠나 타지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오랜 노력 끝에 그는 큰 부를 이루었고, 몇 년 뒤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의 귀향 소식이 전해지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그를 외면하던 친척과 친구들이 앞다투어 나와 그를 맞이하려 한 것이다. 그는 이 상황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그리고 일부러 누더기 옷을 입고 행렬의 맨 뒤에 섰다. 사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사람의 마음속에는 때때로 뜨거운 불이 일어납니다. 그 불의 이름이 바로 분노입니다.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 마음이 상하고, 억울한 일을 겪으면 가슴 속에서 화가 치밀어 오릅니다. 그 순간 우리는 흔히 이렇게 생각합니다. “저 사람 때문에 내가 화가 난다.” 그러나 법화경의 깊은 가르침은 우리에게 전혀 다른 진실을 보여 줍니다. 분노는 상대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이 일으키는 불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옛 수행자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분노는 불을 들고 남을 태우려는 것과 같다.” 겉으로 보기에는 상대에게 던질 불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불을 들고 있는 동안 가장 먼저 타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의 마음입니다. 화를 내는 순간 우리의 마음은 평온을 잃습니다. 생각은 흐려지고, 말은 거칠어지며, 행동은 급해집니다. 분노 속에서는 지혜가 사라지고 어리석음이 자라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수행자에게 무엇보다 먼저 마음을 다스리는 수행을 강조하셨습니다.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면 아무리 많은 지식을 쌓아도 그것은 참된 지혜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분노는 처음에는 작은 불씨처럼 시작됩니다. 누군가의 말, 누군가의 행동, 혹은 작은 오해
법왕청신문 장규호 기자 | 우리는 흔히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말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한다. 좋은 말을 하면 관계가 좋아지고, 말을 잘하면 사람의 마음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진정한 이해와 소통은 말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그 근원은 언제나 마음에 있다. 불교에서는 이를 ‘이심전심以心傳心’이라 한다. 마음으로 마음을 전한다는 뜻이다. 이는 단순한 표현이 아니라, 인간 관계와 수행의 본질을 꿰뚫는 깊은 가르침이다. 어느 날 한 제자가 부처님께 물었다. “세존이시여,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부처님께서는 잠시 미소를 지으시며 말씀하셨다. “마음이다.” 제자는 다시 물었다. “말을 잘해야 관계가 좋아지는 것 아닙니까?” 부처님께서는 고개를 저으시며 답하셨다. “말은 마음의 그림자일 뿐이다.” 이 짧은 말씀 속에는 깊은 진리가 담겨 있다. 사람은 말보다 먼저 마음을 느낀다. 진심이 담긴 말은 짧아도 깊이 전해지며, 거짓된 말은 아무리 길어도 상대의 마음에 닿지 못한다. 우리는 일상 속에서 이를 쉽게 경험한다. 어떤 사람은 말이 많지 않아도 곁에 있으면 편안함을 준다. 그 이유는 그의 마음이 이미 전달되었기 때문이다. 반대로 말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아전인수我田引水의 마음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아전인수란 말 그대로 “내 논에 물을 끌어들인다”는 뜻입니다. 물길을 자기 논으로만 돌려 이익을 얻으려는 마음, 곧 모든 일을 자기에게 유리하게만 해석하고 행동하는 태도를 말합니다. 겉으로 보면 작은 욕심처럼 보이지만, 사실 이 마음은 사람 사이의 관계를 흐리게 하고 세상을 좁게 만드는 원인이 됩니다. 왜냐하면 아전인수의 마음에는 나만 생각하는 좁은 시야가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이익을 생각합니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 생각이 지나치면 세상은 서로를 돕는 공동의 터전이 아니라, 서로의 몫을 빼앗는 경쟁의 자리로 변하고 맙니다. 물길을 자기 논으로만 돌리면 다른 논은 마르게 됩니다. 결국 그 마른 논은 다시 세상의 균형을 깨뜨려 자신에게도 어려움으로 돌아옵니다. 불교에서는 이런 마음을 아상我相, 곧 ‘나라는 생각’에서 비롯된 집착이라 말합니다. 나의 이익, 나의 체면, 나의 주장만을 앞세우면 마음은 점점 좁아지고 세상을 보는 눈도 흐려집니다. 그렇게 되면 옳고 그름을 판단할 때조차도 진실이 아니라 자기 이익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부처님의 가르침 가운데 세상을 가장 깊이 움직이는 말이 있습니다. “미움은 미움으로 정복되지 않는다. 미움은 오직 사랑으로써만 정복된다. 이것이 영원한 진리이다.” 이 말씀은 단순한 도덕적 교훈이 아니라 인간 마음의 법칙을 밝히는 가르침입니다. 세상의 모든 갈등과 다툼을 돌아보면 이 말씀이 얼마나 깊은 진리인지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에는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미움의 길이고, 다른 하나는 자비의 길입니다. 누군가 나에게 상처를 주었을 때 사람은 쉽게 미움을 품습니다. 미움이 마음에 들어오면 그 미움은 점점 커집니다. 처음에는 작은 감정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분노가 되고, 원망이 되고, 결국 관계를 끊어버리는 독이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흔히 말합니다. “나를 미워하면 나도 미워하겠다.” “나에게 상처를 주면 나도 갚겠다.” 그러나 이 길은 끝이 없습니다. 미움은 미움을 낳고, 분노는 또 다른 분노를 부르기 때문입니다. 불을 불로 끄려고 하면 불은 더 크게 타오릅니다. 미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미움을 끊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자비慈悲입니다. 자비란 상대를 무조건 감싸는 마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