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지족안분知足安分, 지족知足은 포기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안분安分은 꿈을 접으라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가 말하는 지족안분이란, 지금의 나를 인정하면서, 욕심에 끌려가지 않는 삶의 태도입니다. 우리는 흔히 말합니다. “조금만 더 있으면 만족하겠다.” 그러나 그 ‘조금’은 늘 다음으로 미뤄집니다. 욕심은 채워질수록 기준을 바꾸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족함을 아는 자는 비록 누추한 곳에 있어도 편안하고, 족함을 모르는 자는 천상에 있어도 괴롭다.” 지족은 멈춤이 아니라 깨달음입니다. 이미 가진 것을 세어보는 지혜입니다. 유튜브 불교연합방송 바로가기 안분은 체념이 아니라 균형입니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몫을 알고, 그 몫 안에서 책임을 다하는 자세입니다. 생활 속 지족안분은 거창하지 않습니다. 남과 비교하지 않는 것. 비교가 시작되는 순간, 만족은 사라집니다. 지금의 형편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 형편은 인연일 뿐, 나의 값어치가 아닙니다. 할 수 없는 일을 억지로 쥐려 하지 않는 것. 그 손을 비워야, 해야 할 일이 분명해집니다. 지족안분의 삶은 적게 가지는 삶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내려놓는 삶입니다. 그래
법왕청신문 이준석 기자 | 바쁜 일상 속에서 우리는 자주 한쪽으로 치우친 선택을 합니다. 서두르다 놓치고, 옳다고 믿으며 상처를 남기고, 맞서다 보니 서로 멀어집니다. 이럴 때 부처님의 가르침은 삶의 속도를 늦추기보다 방향을 바로 잡으라고 일러줍니다. 오늘의 법문은극단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치우침 없는 지혜와 조화로운 마음의 길을 전하는 중도원융中道圓融의 이야기입니다. 중도원융은 치우치지 않는 중도의 길이 모든 것을 원만하게 어우른다는 뜻이다. 이 말은 타협하라는 말도, 중간만 취하라는 말도 아니다.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중도는 양극을 초월한 깨어 있는 선택의 길이다. 유튜브, 불교연합방송 바로가기 현대사회는 늘 극단으로 흐르기 쉽다. 빨라야 옳고, 강해야 살아남으며, 이기지 못하면 지는 것처럼 느껴진다. 의견은 둘로 갈리고, 사람은 편을 나누며, 조금만 다르면 적이 된다. 이럴수록 중도원융은 낡은 말이 아니라 지금 가장 필요한 지혜가 된다. 중도는 우유부단함이 아니다. 옳고 그름을 흐리는 회색지대도 아니다. 중도란 상황을 끝까지 바라보고, 집착을 내려놓은 뒤 선택하는 길이다. 그래서 중도는 느려 보이지만, 가장 정확하다. 강함과 부드러움, 전통과 변화,
법왕청신문 장규호 기자 | 신해행증의 수행 체계, 만공 스님의 “믿고, 알며 철저히 수행하며 스스로 도달하라”는 법어는 불교 수행의 완전한 체계를 간결하게 제시한다. 이는 신해행증(信解行證), 즉 믿음(信), 이해(解), 실천(行), 증득(證)의 네 단계를 말한다. 불교 수행은 맹목적 신앙도 아니고 단순한 지적 이해도 아니며, 이 네 가지가 균형있게 발전할 때 완성된다. 현대사회는 지식과 정보의 시대이지만, 진정한 지혜와 깨달음은 부족하다. 많은 사람들이 불교에 대해 알지만, 실제로 수행하고 체험하는 사람은 적다. 또한 맹목적 신앙이나 형식적 의례에 머물러 본질을 놓치는 경우도 있다. 만공 스님의 가르침은 이러한 편향을 경계하고, 완전하고 균형잡힌 수행의 길을 제시한다. 신해행증의 단계와 실천 신(信), 즉 믿음은 불교 수행의 출발점이다. 그러나 이것은 맹목적 믿음이 아니라, 부처님의 가르침이 진리임을 신뢰하는 것이다. 『화엄경』에서는 “믿음은 도의 근원이요 공덕의 어머니”라고하여, 신심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무엇을 믿는가? 첫째, 삼보(三寶), 즉 부처님과 가르침과 승가를 믿는다. 둘째, 인과(因果)의 법칙을 믿는다. 선한 행위는 선한 결과를, 악한 행위는
법왕청신문 이준석 대기자 | 서로 나누고 베푸는 오늘입니다. 이 말 한마디에 이미 수행의 핵심이 담겨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무엇을 얻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아주 분명하고도 자비롭게 일러주셨습니다. 명예를 얻고자 한다면 계율을 지키고, 재물을 얻고자 한다면 보시를 행하고, 덕망이 높아지고자 한다면 진실한 삶을 살고, 좋은 벗을 얻고자 한다면 먼저 은혜를 베풀어라. 유튜브 불교연합방송 바로가기 이 말씀은 세상의 계산법을 가르치기 위함이 아닙니다. 삶의 질서를 바로 세우는 법을 알려주는 가르침입니다. 먼저, 명예와 계율입니다. 명예는 스스로 포장해서 얻는 것이 아닙니다. 말보다 행동이 앞서고, 유혹 앞에서도 선을 지키는 사람에게 자연스레 따르는 것이 명예입니다. 계율은 억압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보호하는 울타리입니다. 욕망이 흔들 때마다 기준을 세워주는 힘이 계율이며, 그 힘이 쌓여 사람의 신뢰가 됩니다. 재물과 보시는 더욱 역설적입니다. 사람들은 재물을 얻기 위해 움켜쥐지만, 부처님은 내어놓을수록 흐른다고 하셨습니다. 보시는 단지 돈을 나누는 일이 아닙니다. 시간과 마음, 말 한마디의 친절까지도 보시입니다. 보시는 재물을 늘리기 위한 기술이 아니라, 결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사상누沙上樓閣이란 모래 위에 세운 누각, 즉 기초가 없는 허망한 것, 순식간에 무너질 것을 붙잡는 인생의 어리석음을 일깨우는 말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에도 이와 같은 경책이 있습니다. “모래 위에 짓지 말고, 반야의 반석 위에 지어라.” 지혜 없는 공덕은 쌓아도 흩어지고, 마음의 기초 없이 행하는 수행은 빛이 나도 오래가지 않습니다. 기초 없는 욕망은 사상누각이다. 사람은 모두 행복을 원합니다. 그러나 욕망을 기초로 세운 행복은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무너집니다. 명예도, 재물도, 관계도 지혜와 자비가 받쳐주지 않으면 누각처럼 높아 보이지만 모래처럼 허망한 것입니다. 칭찬에 흔들리고, 비난에 무너지고, 작은 이익 앞에서 마음을 잃는 삶. 이 모두가 사상누각의 삶입니다. 부처님은 “올바른 보는 눈, 정견正見이 모든 수행의 기초”라 하셨습니다. 마음의 기초가 바로 서면 그 위의 삶도 견고하게 세워집니다. 정견이란 곧, 업의 이치를 아는 눈 인과의 흐름을 보는 눈 무상한 세상을 꿰뚫는 지혜 이 세 가지입니다. 정견의 반석 위에 쌓은 삶은 바람이 불어도, 비가 내려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부처님께 잘 보이고자 하는 마음, 남에게 보이기 위한 공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천년향화지지千年香花之地에 자리한 벽사초불정사僻邪招佛精舍는 불교적 상징성과 현대적 공간 해석이 결합된 독특한 도량이다. 노란색에서 황금색에 이르는 계열의 외관은 단순한 색채 선택이 아니라, 부처님의 세계를 드러내는 미학적 장치이자 도량 전체의 신성성을 강화하는 상징성의 코드이다. 불교에서 황금빛은 깨달음, 지혜, 영광, 부처님의 광명을 상징한다. 사찰의 금빛 외관은 단순 화려함을 넘어, 중생의 무명을 밝히는 부처님의 광명光明 그 자체를 형상화한다. 특히 벽사초불정사에서 사용된 색은 ‘노란색黃’을 바탕으로 한 자연 계열이어서, 인위적 금칠의 과시성과는 다른 온화한 신성·전통적 불교미감을 내포한다. 이는 “화려하되 탐욕적이지 않고, 장엄하되 부담스럽지 않은” 균형을 만들어낸다. 건물의 외형은 층단형 구조로 위로 올라갈수록 가벼워지는 형태를 취한다. 이는 지혜로 올라가는 수행의 계단, 또는 삼계三界의 상승 구조를 연상케 한다. 바닥에서 정상까지 이어지는 선들은 수평과 수직이 교차하며, 정교한 규칙성을 유지한다. 그 규칙성은 불교의 법칙성法性, 우주의 질서, 연기법의 구조적 조화를 상징한다. 또한 이러한 입체 구조는 사찰의 장엄함을 강조하면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일정 스님은 최근 법문에서 고대의 성어 자승자박自繩自縛을 통해, 우리 사회가 겪는 혼탁함의 근원을 통찰하며 스스로를 돌아보는 깊은 성찰의 메시지를 전했다. 스님은 “세상 사람들 모두는 한 올의 밧줄을 손에 쥐고 살아간다”고 말문을 열었다. 그 밧줄은 집을 짓고 이웃을 돕는 선한 쓰임도 있지만, 때로는 자기 스스로 자신을 묶는 속박이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스님은 자승자박의 뜻을 “남이 묶은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이 만든 매듭·내 욕심이 만든 속박”이라 설명하며 사회를 혼탁하게 만드는 원인을 개인의 탐욕·분노·무관심에서 찾았다. 가짜가 진짜처럼 행세하고, 정의가 뒤로 밀리며, 말은 넘쳐나지만 실천은 사라진 현실, 그러나 이러한 혼탁함은 특정 집단의 문제가 아닌, 우리 모두가 쥐고 있는 작은 매듭들의 집합이라는 지적이다. 스님은 혼탁함을 만들어내는 네 가지 매듭을 다음과 같이 짚었다. 욕심의 매듭: 더 가지려는 욕망이 결국 스스로를 옥죄는 줄이 된다. 분노의 매듭: 남을 태우기 전에 먼저 자신의 마음을 태운다. 거짓의 매듭: 진실을 누르고 선 이익은 잠시 빛나지만 결국 허상으로 돌아온다. 무관심의 매듭: 조용하지만 깊은 독으로, 사회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세존께서 기원정사에 계실 때, 세상의 더러움에 대해 이렇게 설하셨다. 옛날 어느 나라에 지주왕地主王이 있었는데, 왕에게는 자비慈悲라는 태자가 있었고, 왕의 대신 전존專尊에게는 염만焰曼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지주왕은 궁궐 안에서 향락을 즐기며 정사를 모두 전존에게 맡겼다. 전존은 모든 일을 아들 염만과 의논하여 처리했는데,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왕은 크게 슬퍼했다. 태자 자비가 왕에게 아뢰었다. “전존을 잃은 것은 슬프오나, 아들 염만은 더욱 지혜롭고 현명합니다. 그를 불러 나라 일을 맡기심이 옳겠습니다.” 왕은 그 말을 따랐고, 염만은 국정을 훌륭히 다스려 명성이 높아져 ‘대전존大專尊’이라 불렸다. 그러나 세상은 덧없다. 왕이 늙어 병이 들어 세상을 떠나자 태자 자비가 왕위에 올랐다. 새 왕 또한 정사를 대전존에게 맡기고 스스로는 내전에서 오욕을 즐겼다. 그는 대신들과 약속한 국토 분배조차 잊었다. 대신들이 약속을 상기시키자, 왕은 나라를 일곱 등분하여 여섯 대신에게 나누어 주는 일을 대전존에게 맡겼다. 대전존은 공정하게 국토를 나누어 주었고, 그 덕에 일곱 왕과 백성 모두가 그를 신처럼 존경하였다. 일곱 거사居士와 7백의 바라문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천년고찰 쌍계사가 새로운 주지를 맞이하며 지역 불교문화의 새로운 도약을 알렸다. 논산시(시장 백성현)는 19일 쌍계사에서 신임 주지 대륜(박찬우) 스님의 취임식이 봉행됐다고 밝혔다. 이날 취임식에는 지역 불자와 시민 등 200여 명이 함께해 쌍계사의 새로운 출발을 축하했다. 대륜 스님은 “나눔과 자비의 정신으로 시민과 함께하는 열린 사찰이 되겠다”고 밝히며, 이를 상징하는 ‘자비 나눔 쌀 전달식’을 통해 지역사회에 따뜻한 마음을 전달했다. 백성현 논산시장은 축사를 통해 “쌍계사는 오랜 세월 지역의 믿음과 전통을 이어온 논산의 소중한 문화유산”이라며 “대륜 스님께서 시민과 함께 새로운 산사 문화를 열어주시길 기대한다”고 전했다. 참석한 시민과 불자들은 스님의 취임을 축하하며, 쌍계사가 지역과 함께 성장하는 문화공간으로 자리 잡기를 기원했다. 같은 날 쌍계사 경내에서는 국가유산청 전통산사 활용사업의 일환으로, 문화행사 ‘쌍계 마바시(쌍계사에서 마음을 바꾸는 시간)’가 열렸다. 행사에는 요들 가수 이은경, 뮤지컬·팝페라 그룹 스텔라, 팬플루트 연주그룹 팬타곤이 출연해 깊어가는 가을 정취 속에서 감동과 여운이 깃든 무대를 선보였다. 또한
법왕청신문 장규호 기자 | 옛날 어떤 마을에 큰 부자가 있었으나, 그의 마음은 재물과 함께 굳게 닫혀 있어 인색하기 그지없었다. 이를 안 부처님께서는 제도하기 위해 지혜가 으뜸인 제자 사리불을 보냈다. 사리불은 보시의 공덕과 복덕을 설했으나 부자는 마음을 열지 않았다. 이어 신통력이 뛰어난 목련이 갔지만, 그의 신통 또한 부자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고 오히려 의심만 불러일으켰다. 마침내 부처님께서 친히 부자를 불러 설법하셨다. 부처님의 광명 앞에서 절을 올린 부자에게 부처님은 물으셨다. “그대는 다섯 가지 큰 베풂, 오대시五大施를 아는가?” 부자는 알지 못한다고 대답했으나, 부처님의 설명은 그의 마음을 흔들었다. 그것은 재물을 내놓는 보시가 아니라, 살생하지 않음不殺生, 도둑질하지 않음不偸盜, 삿된 음행을 하지 않음不邪淫, 거짓말하지 않음不妄語, 술에 취하지 않음不飮酒이라는 기본 계율이었다. “이 오계를 지키는 것이야말로 다섯 가지 큰 보시이며, 그 이상의 보시는 따로 없다.” 부자는 크게 기뻐하며 공양을 올리려 했으나, 나쁜 옷감이 없어 어쩔 수 없이 가장 좋은 옷감을 바쳤다. 그런데 그 옷감은 끊임없이 이어져 나왔다. 이는 진심 어린 보시가 복덕을 불러오
법왕청신문 장규호 기자 | 연목구어緣木求魚는 “나무에 올라가 물고기를 구한다”는 뜻으로, 방법이 잘못되면 아무리 노력해도 성과가 없다는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이것을 삿된 길(사도邪道)에 비유합니다. 깨달음을 구하면서 탐욕과 집착에 매달리는 것은, 마치 나무 위에서 물고기를 찾는 것과 같습니다. 어느 날 제자가 부처님께 물었습니다. “저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 밤낮으로 기도하고 공양을 올렸습니다. 그런데도 마음이 평안하지 않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대는 연목구어緣木求魚하고 있구나. 깨달음은 탐욕을 채우는 기도로 오는 것이 아니라, 욕망을 버리고 자비와 지혜를 닦을 때 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도 연목구어의 모습이 많습니다. 교육의 병폐로 인격과 지혜를 닦는 본래의 목적은 잊고, 성적과 입시만을 좇는 교육은 나무에서 물고기를 찾는 것과 같습니다. 배움의 본질은 사라지고, 경쟁과 불안만 남습니다. 경제의 병폐는 더 큰 행복을 위해 돈을 모은다 하면서, 끝없는 탐욕과 불법적인 수단에 집착한다면, 그것은 결코 참된 풍요를 주지 못합니다. 물질이 행복의 근원이 아니라는 진리를 외면하는 길은 모두 연목구어입니다. 정치와 사회의 병폐 또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사위국 성안에 여든 살이 된 한 바라문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재산은 많았으나, 남을 배려할 줄 모르는 괴팍하고 인색한 사람이었습니다. 손톱만큼도 남을 위하는 마음이 없던 그는 늘 욕심과 집착 속에서 살아갔습니다. 어느 날 그는 문득, 궁전과 같은 호화로운 집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본채는 물론이고 객실, 별채, 가족이 살 건물까지 세세하게 설계하며 직접 일꾼들을 지휘하는 모습은 그에게 큰 자부심이었습니다. 노인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뽐냈습니다. “여기서 나는 여름엔 시원하고, 겨울엔 따뜻하게 살 것이다. 사람들은 나를 노랭이라 비웃지만, 이 집에서 사는 나를 보고 부러워할 것이다.” 그러나 그날은 다름 아닌, 그의 수명이 다하는 날이었습니다. 노인은 알지 못했으나, 부처님께서는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부처님은 아난을 데리고 노인을 찾아가 말씀하셨습니다. “노인장, 연로하신데 이렇게 큰집을 지으시다니 피곤하지 않으십니까? 이 집을 다 지으면 무엇에 쓰시렵니까?” 그러나 노인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는 둥 마는 둥, 손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나는 지금 바쁩니다. 얘기는 다음에 듣겠습니다.” 이에 부처님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게송 한 구절을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오늘의 사자성어는 양호유환養虎遺患입니다. 글자 그대로는 “호랑이를 길러 후환을 남긴다”는 뜻입니다. 당장은 유익해 보이지만, 결국은 화를 불러올 어리석음을 경계하는 말입니다. 우리의 삶에서도 이와 같은 일이 자주 일어납니다. 잠시 기분이 좋다고 탐욕을 따르고, 순간 화가 난다고 성냄을 키우며, 알아차리지 못한 채 무지를 방치합니다. 그것은 곧 내 마음속 호랑이를 기르는 일입니다. 호랑이는 어릴 때는 귀엽지만, 점점 자라면 나를 해칠 수 있습니다. 번뇌도 처음에는 사소해 보이나, 시간이 지나면 큰 업으로 자라서 나와 남을 괴롭히게 됩니다.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작은 악이라도 가벼이 여기지 말라. 물방울이 모여 큰 강을 이루듯, 작은 악도 쌓이면 큰 고통이 된다.” 우리가 방심하여 작은 잘못을 반복하면, 그것이 습관이 되고 결국 업이 됩니다. 바로 이것이 양호유환의 어리석음입니다. 세상 일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경쟁자를 무심코 돕거나, 위험한 기술을 방관하면, 그것이 훗날 나에게 큰 근심이 되어 돌아옵니다. 사회와 국가, 나아가 인류에게도 양호유환은 경계해야 할 지혜의 교훈입니다. 불자는 번뇌라는 호랑이를 기르는 대신, 그것을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바람은 그치기를 원하나, 나무는 잠잠하지 않고 흔들리고, 자식은 효도하려 하나, 부모는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효孝의 실천은 반드시 지금 해야 한다는 경책의 말씀입니다. 삶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부모님의 은혜는 바다보다 깊고, 하늘보다 높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은혜를 당연히 여기며, “언젠가 효도해야지” 하며 미루곤 합니다. 하지만 세월은 바람처럼 흘러가고, 부모님의 자리는 어느새 공허한 빈자리가 되고 맙니다. 이것이 바로 풍목지비의 슬픔입니다. 지금, 효를 실천해야 한다. 효란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부모님께 안부를 묻는 한마디, 따뜻한 손길, 작은 공경심이 바로 효입니다. 오늘 실천하지 않으면 내일은 기약할 수 없습니다. 불교에서는 “一切有爲法일체유위법, 如夢幻泡影여몽환포영”이라 하여 모든 인연이 꿈과 같고, 물거품과 같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부모님과의 인연도 지금 이 순간에만 누릴 수 있습니다. 효는 곧 불효를 끊는 길, 부처님은 부모은중경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부모의 은혜는 등에 업고 천리를 다니고, 피를 뽑아 마시게 하여도 다 갚지 못한다.” 그러니 효란 은혜를 완전히 갚는 것이 아니라, 갚으려는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사랑하는 불자 여러분, 오늘은 불교의 깊은 사상 가운데 하나인 삼신일신三身一身의 의미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三身一身삼신일신 불교에서는 부처님의 몸을 세 가지로 설명합니다. 법신法身 : 진리 그 자체, 공空의 본체. 보신報身 : 깨달음의 지혜와 공덕으로 장엄한 모습. 응신應身 :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중생의 눈앞에 드러나는 부처님. 이 세 가지를 삼신三身이라 부릅니다. 그러나 이는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결국 하나의 진리, 하나의 부처님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삼신은 곧 일신, 삼신일신입니다. 千世恒今日천세항금일 “천 세대가 흘러도 오늘과 다름이 없다.” 시간은 흘러도 진리는 변하지 않습니다. 중생의 모습과 환경은 바뀌고, 나라와 세상도 변하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은 늘 오늘처럼 생생합니다. 천 년 전에도 법은 지금처럼 살아 있었고, 천 년 후에도 여전히 오늘과 같이 전해질 것입니다. 이 진리의 시간을 사는 이는, 과거나 미래에 얽매이지 않고 지금 이 자리에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三身爲一身삼신위일신 다시 말해, 법신·보신·응신이 따로따로가 아니라 하나로 모아져 중생 앞에 드러난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진리를 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