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대한불교 조계종 수미산 불국사는 백중을 맞아 27일 광주시 능평동 지역 내 어려운 이웃을 위해 쌀 500㎏(50포)을 기탁했다. 이번 기탁은 지역사회에 나눔의 뜻을 전하고 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이웃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기 위해 마련됐다. 기탁된 쌀은 능평동 지역 내 취약계층 가구에 전달될 예정이다. 수미산 불국사 관계자는 “불자들의 정성을 지역 주민들과 함께 나눌 수 있어 뜻깊게 생각한다”며 “준비한 쌀이 어려운 이웃들의 생활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윤명희·남지현 능평동 지역사회보장협의체 공동위원장은 “지역사회를 위해 꾸준히 따뜻한 나눔을 이어주시는 수미산 불국사에 감사드린다”며 “기탁해 주신 쌀은 도움이 필요한 가구에 정성껏 전달하겠다”고 말했다. 한편, 수미산 불국사는 지난 부처님 오신 날에도 쌀과 라면, 식료품 및 성금을 기탁하는 등 지역 내 취약계층을 위한 나눔 활동을 지속해서 이어오고 있다.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안성시가 취약계층의 건강하고 안정적인 생활을 지원하기 위해 불교계 공익단체 및 지역 사찰과 함께 뜻깊은 나눔 자리를 마련했다. 안성시는 지난 26일 (사)나누며하나되기, 대한불교천태종 삼봉사와 함께 3천만 원 상당의 건강·방역·생활물품 기탁식을 진행했다고 밝혔다. 이날 기탁식에는 안성시 관계자를 비롯해 (사)나누며하나되기 및 삼봉사 신도회 관계자 등이 참석했다. (사)나누며하나되기는 대한불교천태종이 설립한 공익법인으로, 소외계층 물품 지원과 남북 교류, 환경·문화 사업 등 다양한 사회공헌 활동을 펼치고 있다. 이번 기탁은 지역 사찰인 삼봉사와의 협력을 바탕으로 안성지역 이웃들에게 온정을 전하고자 추진됐다. 기탁 물품은 건강기능식품, 모기기피제, 라텍스 장갑, 칫솔, 의류, 어르신용 모자, 생활잡화, 접이식 밥상 등 3천만 원 상당으로 구성됐다. 이는 안성시 관내 사회복지기관과 시설을 통해 도움이 필요한 이웃들에게 전달될 예정이다. 안성시 관계자는 “지역사회를 위해 따뜻한 나눔을 실천해 준 (사)나누며하나되기와 삼봉사에 깊이 감사드린다”며 “기탁받은 물품은 필요한 시민들에게 소중히 전달하겠다”고 말했다.
법왕청신문 장규호 기자 | “기도는 소원을 비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누군가의 손이 되어주는 데서 완성된다.” 천수경千手經을 읽다 보면 ‘천수천안千手千眼’이라는 말과 만나게 된다. 천 개의 손과 천 개의 눈을 가진 관세음보살의 자비를 상징한다. 그러나 정말 손이 천 개이고 눈이 천 개라는 뜻만은 아니다. 천 개의 눈은 세상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는 마음이고, 천 개의 손은 그 아픔을 보고 기꺼이 내미는 자비의 실천이다. 오늘 우리 사회에 천수경의 가르침이 필요한 까닭도 여기에 있다. 보았으면 손을 내밀어야 한다 우리는 과거 어느 시대보다 많은 것을 본다. 휴대전화 하나만 열어도 전쟁과 재난, 가난과 고독, 갈등과 분노가 눈앞에 펼쳐진다. 그러나 많이 본다고 해서 세상이 반드시 따뜻해지는 것은 아니다. 보면서도 외면하고, 알면서도 침묵하며, 타인의 고통을 구경거리처럼 소비한다면 천 개의 눈이 있어도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천수경은 우리에게 묻는다. “그대는 보았는가. 그렇다면 손을 내밀었는가.” 배고픈 사람에게 밥 한 끼를 나누는 손, 넘어지는 사람을 일으켜 세우는 손, 외로운 사람의 손을 잡아주는 손, 잘못한 사람에게 다시 살아갈 기회를 주는 손,
법왕청신문 장규호 기자 | 오늘은 『묘법연화경』 제21품 「여래신력품」의 깊은 뜻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모든 부처님께서 도량에 앉으시어 얻으신 비요祕要의 법을 능히 이 경을 지니는 자는 오래지 않아 또한 마땅히 얻으리라.” 이 말씀은 법화경을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며, 해설하고, 실천하는 사람은 머지않아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가장 깊고 미묘한 법을 얻게 된다는 가르침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비요의 법’은 특별한 사람에게만 몰래 전하는 신비한 비밀이 아닙니다. 모든 중생에게 불성이 있으며, 누구나 깨달음을 이루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일불승-佛乘의 진리입니다. 1. 여래의 신력은 중생을 깨우치는 힘이다. 「여래신력품」에서 부처님께서는 넓고 긴 혀를 내시고, 온몸의 모든 털구멍에서 한량없는 빛을 놓으십니다. 모든 부처님께서 함께 기침하시고 손가락을 튕기시자 그 소리가 시방세계에 두루 울리고 대지가 크게 진동합니다. 이러한 장면은 단순히 초자연적인 기적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의 광대한 신력으로 법화경의 진리가 시간과 공간을 넘어 모든 세계에 전해지고 있음을 상징합니다. 부처님께서 내미신 넓고 긴 혀는 진실한 말씀을 뜻합니다. 부처님께서는 한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처음 만났을 때는 하루를 보지 못해도 그리웠던 사람이, 시간이 흐르면 이름조차 떠올리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거자일소去者日疏입니다. '떠난 사람은 날이 갈수록 멀어진다'는 뜻이지만, 이는 단순히 죽은 사람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멀어진 친구, 소홀해진 가족, 잊고 지낸 스승, 끊어진 이웃과의 관계에도 해당합니다. 세월은 상처를 치유하기도 하지만, 정을 희미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래서 인연은 저절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꾸준히 가꾸어야 하는 마음의 꽃입니다. 불교에서는 "모든 만남은 인연이고, 모든 헤어짐 또한 인연"이라고 합니다. 만남에 집착하지도 말고, 헤어짐을 원망하지도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살아 있는 인연이라면 먼저 손을 내미는 자비와 배려는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한 통의 안부 전화, 짧은 문자 한 줄, 따뜻한 미소 하나가 멀어질 인연을 다시 가까운 인연으로 바꾸는 씨앗이 될 수 있습니다. 거자일소를 슬퍼하기보다, 지금 곁에 있는 사람을 더욱 소중히 여기십시오. 떠난 사람을 붙잡을 수는 없어도, 곁에 있는 사람은 사랑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법문 한마디 "인연은 세월이 지키는 것이 아
법왕청신문 장규호 기자 |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배운 사람이 많고, 똑똑한 사람도 많습니다. 그러나 배움이 깊다고 해서 반드시 그 마음까지 바른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많이 배운 사람이 자신의 지식을 이용해 진실을 왜곡하고, 권력이나 세상의 눈치를 보며 말을 바꾸는 모습을 우리는 종종 보게 됩니다. 이를 두고 옛사람들은 곡학아세曲學阿世라 했습니다.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배움을 굽혀 세상에 아첨한다”는 뜻입니다. 학문은 본래 진리를 밝히기 위한 등불이어야 합니다. 어둠을 밝히라고 있는 것이지, 누군가의 욕망을 비추는 손전등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사회를 돌아보면 어떻습니까? 진실을 말해야 할 사람이 침묵합니다. 정의를 외치던 사람이 어느 순간 권력 곁에 서 있습니다. 전문가라는 이름으로 사실을 감추고, 지식인이라는 이름으로 대중의 환심을 사는 말을 골라 합니다. 말은 번지르르하지만 그 속에는 진심이 없습니다. 양심보다 자리, 진실보다 이익, 정의보다 인기. 이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마주한 곡학아세의 얼굴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정직한 마음이 수행의 시작”이라 하셨습니다. 불교에서는 정어正語를 매우 중요하게 여깁니다. 바른 말이란 단순히
법왕청신문 이준석 기자 | 사람은 누구나 길 위에 서 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우리는 이미 떠나는 존재이며, 어디론가 향하고 있는 존재다. 고향을 떠나 도시로, 도시를 떠나 또 다른 삶으로, 사람은 끊임없이 옮겨 다닌다. 그래서 어떤 이는 말한다. “나는 늘 떠돌아다니는 인생이다.” 그러나 과연 떠돌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아직 머물 곳을 몰라 헤매고 있는 것일까. 머무는 곳이 곧 고향이다. 우리는 흔히 고향을 과거로 생각한다. 태어나고 자란 곳, 어릴 적 기억이 남아 있는 장소를 고향이라 부른다. 그러나 삶은 뒤로 돌아가지 않는다. 고향은 기억 속에 남을 뿐, 지금의 삶을 살아주지는 않는다. 불가에서는 말한다. “지금 머무는 그 자리가 곧 도량이다.” 지금 서 있는 자리, 지금 숨 쉬는 이 순간, 지금 마주한 인연 속에서 우리는 이미 ‘머물고’ 있다. 그렇다면 고향은 먼 곳이 아니라 지금 이 자리, 이 마음 속에 있다. 떠돌음은 몸이 아니라 마음이다. 사람이 떠도는 이유는 몸이 움직여서가 아니다. 마음이 머물지 못하기 때문이다. 한 곳에 있어도 불안하고, 무엇을 가져도 만족하지 못하고, 어디에 있어도 ‘여기가 아니다’라고 느낄 때, 그때 우리는 비로소 떠돌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세상은 늘 수많은 소리로 가득 차 있습니다. 사람의 말, 감정의 흔들림, 욕망의 속삭임이 서로 뒤엉켜 무엇이 참이고 무엇이 거짓인지조차 분간하기 어려운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종종 거짓을 진실이라 믿고, 진실을 외면한 채 스스로의 착각 속에서 길을 잃습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진실을 진실로 알고, 진실이 아닌 것을 진실이 아님으로 아는 사람, 그는 마침내 올바른 진실을 깨닫게 된다.” 이 가르침은 단순한 지식이 아닙니다. 삶을 바꾸는 지혜이며, 마음을 밝히는 등불입니다. 어느 날, 한 어린 동자가 스승에게 물었습니다. “스승님, 진실은 어디에 있습니까?” 스승은 미소 지으며 대답했습니다. “진실은 멀리 있지 않다. 다만 네가 보고 싶지 않은 곳에 있을 뿐이다.” 사람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습니다. 자신에게 유리한 것은 진실이라 여기고, 불편한 것은 거짓이라 밀어냅니다. 이것이 바로 무명無明입니다. 진실을 가리는 가장 큰 장애는 세상이 아니라 바로 자기 마음입니다. 법화경은 말합니다. 모든 중생은 본래 부처의 성품을 지니고 있으며, 그 성품은 진실을 향해 있습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사람의 마음은 늘 두 가지에 붙들려 있습니다. 하나는 망상妄想이고, 또 하나는 혼침昏沈입니다. 망상은 생각이 흩어지는 것이고, 혼침은 마음이 가라앉아 잠으로 빠지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는 수행자의 가장 큰 장애입니다. 그중에서도 혼침, 즉 잠에 빠지는 것은 마음을 어둡게 하고, 지혜의 등불을 꺼뜨리는 가장 빠른 길입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이 어둠을 깨는 가장 쉬운 방편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바로 고성염불高聲念佛입니다. 조용히 속으로만 염불하면 마음은 쉽게 흐려지고, 몸은 점점 무거워져 잠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소리를 높여 또렷하게, 힘 있게 염불하면 그 소리는 곧 자신의 정신을 깨우는 종소리가 됩니다. 큰 소리로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는 순간, 귀로 그 소리를 다시 듣게 됩니다. 이때 일어나는 것은 단순한 발성이 아닙니다. 입은 부처를 부르고 귀는 그 소리를 듣고 마음은 그 소리에 집중합니다 이 세 가지가 하나로 모이면 흩어졌던 정신이 한순간에 모이고 잠은 설 자리를 잃게 됩니다. 잠이 온다는 것은 몸이 피곤해서가 아니라 마음이 흐려졌기 때문입니다. 고성염불은 그 흐림을 깨뜨립니다. 마치 어두운 방에 불을 밝히면 어둠이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사람은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변하는 세상 속에 놓여 있다. 계절이 바뀌고 사람이 바뀌고 환경이 바뀐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사람의 마음은 변화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나는 원래 이렇게 살아왔다” “예전에는 이렇게 했는데” 과거의 방식에 머물러 현재를 보지 못하는 것이다. 각주구검刻舟求劍이란 말이있다. 배 위에서 칼을 떨어뜨린 뒤 그 자리에 표시를 해두고 나중에 그 자리를 찾아 칼을 찾으려 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배는 이미 흘러가고 있다. 칼이 떨어진 곳은 이미 지나가 버렸는데 사람은 표시만 믿고 같은 자리를 찾으려 한다. 이것이 바로 어리석음이다. 우리의 삶도 이와 다르지 않다. 상황은 변했는데 생각은 그대로이고 세상은 움직이는데 마음은 멈춰 있다. 그래서 우리는 길을 잃는다. 불교에서는 말한다. “모든 것은 무상無常하다.”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변하지 않으려 한다. 과거의 기억을 붙잡고 옛 방식만 고집하며 지금 이 순간을 놓쳐버린다. 그래서 괴로움이 생긴다. 변하는 세상에 고정된 마음으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과거를 붙잡지 않는다. 흘러가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변화 속에서 자신을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이 세상은 겉으로는 밝아 보이지만 실상은 어둠 속에 덮여 있다. 사람들은 빛 속에 사는 것 같지만 욕심과 분노, 집착과 어리석음 속에서 스스로를 가두며 살아간다. 그래서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이 세상은 무명無明의 어둠 속에 잠겨 있다고. 그렇다면 그 어둠 속에서 누가 저 지혜의 빛을 볼 수 있단 말인가. 모두가 같은 하늘 아래 살지만 모두가 같은 세상을 보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이는 눈을 뜨고도 보지 못하고 어떤 이는 아무리 설명해도 깨닫지 못한다. 왜일까. 그 이유는 단 하나다. 마음이 닫혀 있기 때문이다. 지혜의 빛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 안에 존재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빛을 보지 못한다. 욕심이 눈을 가리고 집착이 마음을 막으며 어리석음이 자신을 가두기 때문이다. 그래서 법화경은 말한다. 이 세상에서 진정으로 깨어나는 사람은 많지 않다고. 마치 새장 속에 갇힌 새들이 하늘을 바라보면서도 날아갈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문은 열려 있지만 스스로 나가지 못하고 익숙한 좁은 공간에 머무르는 것이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몇 마리의 새는 결국 날아오른다. 두려움을 넘어 자신을 벗어나 하늘로 향한다. 그 새들은 안다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사람은 누구나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살아간다. 부와 명예, 권력, 그리고 남보다 앞서고 싶은 마음과 우리는 그것을 ‘성공’이라 부르며 그것을 위해 많은 시간을 바친다. 하지만 어느 날 문득 깨닫게 된다. 지금까지 붙잡고 있던 것들이 과연 무엇이었는지를. “남가일몽南柯一夢” 남쪽 나뭇가지 아래에서 꾼 한낱 꿈과 같다는 뜻이다. 한때의 부귀영화도 권력도 결국은 꿈처럼 사라진다는 말이다. 불교에서는 이를 무상無常이라 한다. 모든 것은 변하고 머물지 않는다. 우리가 집착하는 것들 또한 시간이 지나면 모두 흘러가고 사라진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것을 영원한 것처럼 붙잡고 놓지 못해 괴로워한다. 성공을 이루어도 불안하고 잃을까 두려워하며 결국 마음의 평안을 얻지 못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모든 것은 잠시 머무를 뿐이다.” 남가일몽의 가르침은 단순히 허무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지금 이 순간을 더 소중히 여기라는 뜻이다. 지나간 것은 이미 꿈이 되었고 다가올 것 또한 아직 오지 않았다. 우리가 진짜로 살 수 있는 시간은 오직 지금뿐이다. 그래서 수행자는 결과보다 마음을 바라보고 소유보다 내려놓음을 택한다. 가지려 할수록 괴로워
법왕청신문 장규호 기자 | 흰 새 한 마리가 있습니다. 어둠이 아직 완전히 걷히지 않은 새벽, 그 새는 머뭇거리지 않고 태양을 향해 날아오릅니다. 땅의 습기와 안개, 바람의 흔들림을 뒤로하고 오직 빛을 향해 날아갑니다. 이 모습은 곧 수행자의 길이며, 깨어난 자의 모습입니다. 법구경의 말씀에 이르기를, “마라와 그의 군대를 처부순 이는 이 세상을 멀리 벗어난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마라는 단지 외부의 존재가 아닙니다. 탐욕, 분노, 어리석음, 집착, 두려움이 모든 것이 곧 우리 마음속의 마라입니다. 우리는 흔히 외부의 장애를 두려워하지만, 정작 우리를 묶어두는 것은 내부의 번뇌입니다. 수행이란 멀리 있는 어떤 세계를 찾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내 안에 있는 어둠을 걷어내는 일입니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습니다. 단지 빛이 없을 뿐입니다. 우리가 마음을 밝히고, 한 생각을 바르게 세우는 순간, 마라는 설 자리를 잃습니다. 흰 새가 태양을 향해 날아가듯, 수행자는 깨달음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날아오르는 용기’입니다. 많은 이들이 알고는 있지만, 날아오르지 못합니다. 익숙한 삶, 익숙한 고통 속에 머물며 변화를 두려워합니다. 하지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사람은 누구나 배우며 살아간다. 그러나 우리는 흔히 좋은 것만 배우려고 한다. 훌륭한 사람의 말, 성공한 사람의 삶, 아름다운 이야기만을 배움의 대상으로 삼는다. 하지만 불교의 지혜는 그보다 한 걸음 더 깊다.“他山之石”타산지석, 즉, 다른 산의 돌이라도 내 산의 옥을 가는 데 쓰일 수 있다는 뜻이다. 이는 단순한 격언이 아니다. 우리 삶을 바꾸는 수행의 태도를 말해주는 가르침이다. 우리는 보통 남의 잘못을 보면 비판한다. “저 사람은 왜 저럴까” “나는 저렇게 하지 말아야지” 이렇게 생각하며 남을 판단하는 데 그친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다르다. 남의 허물을 보며 자신을 돌아본다. 남의 어리석음을 보며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남의 실수를 보며 자신의 길을 바로잡는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말한다. 모든 것은 나를 위한 공부라고. 좋은 사람도 스승이지만 나쁜 사람 또한 스승이다. 칭찬은 나를 기쁘게 하지만 비난은 나를 성장하게 한다. 타산지석의 진정한 의미는 남을 통해 나를 깨닫는 데 있다. 세상에는 완벽한 사람이 없다. 그러므로 완벽한 배움도 없다. 우리는 매일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수많은 일을 겪는다. 그 모든 것이 내 마음을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사람의 마음에는 기쁨과 슬픔, 사랑과 미움이 함께 자리합니다. 그 가운데에서도 사람을 가장 오래 괴롭히는 감정이 있다면 아마 미움일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받거나 억울한 일을 겪으면 마음속에는 자연스럽게 원망과 미움이 생겨납니다. 그 감정은 처음에는 작은 그림자처럼 시작되지만, 마음속에서 계속 붙잡고 있으면 점점 커져 결국 삶 전체를 어둡게 만들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흔히 이렇게 생각합니다. “저 사람이 나를 괴롭혔다.” “저 사람이 나를 힘들게 만들었다.” 그래서 미움의 화살을 상대에게 향하게 합니다. 그러나 법화경이 전하는 가르침은 그보다 훨씬 깊습니다. 미움은 상대를 향한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자신을 괴롭히는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순간 우리의 마음은 이미 평화를 잃어버립니다. 상대는 이미 그 일을 잊고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미움을 품고 있는 사람은 그 일을 계속 떠올리며 스스로 마음을 괴롭힙니다. 마치 무거운 돌을 들고 있으면서 상대에게 던지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돌을 들고 있는 동안 가장 먼저 힘들어지는 사람은 바로 돌을 들고 있는 자신입니다. 불교에서는 이 마음을 집착의 고리라고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