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충북 청주시 미원면에 자리한 천년향화지지千年香火之地 벽사초불정사辟邪招佛精舍가 오는 6월 중순 대대적인 리모델링 공사에 들어간다. 이번 리모델링은 단순한 외관 개선을 넘어 사찰이 지닌 수행도량의 정체성과 불교적 상징성을 한층 강화하기 위한 프로젝트로 추진된다. 특히 황금빛 벽체와 적갈색 버건디(Burgundy) 계열의 지붕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디자인 콘셉트가 적용돼, 기존 사찰의 이미지를 품격과 장엄함이 공존하는 공간으로 재탄생시킬 예정이다. 새롭게 선보일 벽사초불정사의 디자인은 ‘열정적이고 격조 높은 사찰(Passionate & Dignified Temple)’을 주제로 한다. 지붕은 버건디 또는 짙은 적갈색 계열을 사용해 무게감과 깊이를 표현하고, 건물 외벽은 황금빛과 노란색 계열로 마감해 부처님의 광명光明과 깨달음의 세계를 상징하도록 설계됐다. 황금빛 벽체는 불교에서 지혜와 자비, 영광과 성취를 의미하며, 버건디 지붕은 전통 사찰의 중후함과 현대적 세련미를 동시에 담아낸다. 두 색채의 조화는 화려함 속에서도 품위를 잃지 않는 도량의 정신을 표현한다. 벽사초불정사 관계자는 “천년 향화가 이어지는 수행도량의 상징성을 살리면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현대사회는 급격한 핵가족화와 고령화로 인해 전통적인 제사와 추모문화에도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과거에는 대가족이 함께 조상을 모시고 기제사를 이어갔지만, 오늘날에는 자녀들이 타지에 거주하거나 후손이 없는 경우도 적지 않아 제사와 추모 문제를 걱정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이러한 시대적 변화 속에서 담화문화재단이 운영하는 청주 벽사초불정사 「천년의 뜰」이 새로운 불교 추모문화의 모델로 주목받고 있다. 천년향화지지千年香火之地로 알려진 청주 벽사초불정사 내에 조성된 「천년의 뜰」은 단순한 봉안시설이 아니라 생전 기도부터 기제사, 천도재, 추모법회, 위패봉안까지 한곳에서 이루어지는 불자전용 토탈 프리미엄 추모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특히 가족들이 가장 걱정하는 기제사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점이 큰 장점으로 꼽힌다. 후손이 멀리 살거나 제사를 이어갈 여건이 부족한 경우에도 사찰에서 정기적으로 기도와 추모의식을 봉행하여 조상에 대한 예를 지속적으로 이어갈 수 있도록 돕는다. 또한 「천년의 뜰」은 영구위패 봉안 서비스를 제공하며, 위패봉안은 무료로 운영되고 50년 동안 안정적으로 안치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이는 단순한 공간 제공을
법왕청신문 장규호 기자 |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배운 사람이 많고, 똑똑한 사람도 많습니다. 그러나 배움이 깊다고 해서 반드시 그 마음까지 바른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많이 배운 사람이 자신의 지식을 이용해 진실을 왜곡하고, 권력이나 세상의 눈치를 보며 말을 바꾸는 모습을 우리는 종종 보게 됩니다. 이를 두고 옛사람들은 곡학아세曲學阿世라 했습니다.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배움을 굽혀 세상에 아첨한다”는 뜻입니다. 학문은 본래 진리를 밝히기 위한 등불이어야 합니다. 어둠을 밝히라고 있는 것이지, 누군가의 욕망을 비추는 손전등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사회를 돌아보면 어떻습니까? 진실을 말해야 할 사람이 침묵합니다. 정의를 외치던 사람이 어느 순간 권력 곁에 서 있습니다. 전문가라는 이름으로 사실을 감추고, 지식인이라는 이름으로 대중의 환심을 사는 말을 골라 합니다. 말은 번지르르하지만 그 속에는 진심이 없습니다. 양심보다 자리, 진실보다 이익, 정의보다 인기. 이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마주한 곡학아세의 얼굴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정직한 마음이 수행의 시작”이라 하셨습니다. 불교에서는 정어正語를 매우 중요하게 여깁니다. 바른 말이란 단순히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행금산行金山’을 풀어보면, 금金의 기운이 멈추지 않고 흐르며 살아 움직이는 산이다. 따라서 이 산은 기운이 고여 있는 정지의 산이 아니라, 움직이며 순환하는 재물과 복의 산이다. 곧, 머무르는 복이 아니라 흐르며 이어지는 복의 형상이다. 풍수적으로 보아 이곳은 장풍득수藏風得水의 요건을 갖춘 자리다. 바람은 막아주고 기운은 모아주며 물은 머물게 한다. 이러한 터는 사람의 마음을 편안히 가라앉히고, 인연과 재복을 오래도록 머물게 한다. 풍수에서 금金의 기운이 강한 산은 단순히 재물이 모이는 곳이 아니다. 결실을 맺게 하는 힘, 인생의 결과를 완성시키는 힘. 수행의 마침표를 찍게 하는 자리다. 그래서 행금산은 어떤 시작의 산이 아니라, 완성과 귀결의 산이라 할 수 있다. 이 산의 기운은 특히 사찰과 수행 공간과 깊은 인연을 맺는다. 금金은 정리와 깨달음의 기운이며, 행行은 수행과 실천을 뜻하기 때문이다. 결국 행금산은 수행이 결실로 바뀌는 자리다. 담화총사 법문 한 줄 “행금산은 복을 쌓는 산이 아니라, 쌓인 복이 열매로 드러나는 산이다.” 행금산의 기운은 벽사초불정사와 같은 도량과 만날 때 비로소 그 참된 의미를 드러낸다. 이곳은 복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충북 청주 미원면의 고요한 산자락에 자리한 벽사초불정사辟邪招佛精舎는 이름 그대로 “사악함을 물리치고 부처를 맞이하는 도량”이다. 이곳은 단순한 사찰을 넘어, 천년의 향화가 이어질 성지, 곧 ‘천년향화지지千年香火之地’로서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가고 있다. “들어설 때는 벽사, 머무르면 초불” 벽사초불정사의 가장 깊은 메시지는 단순하다. “이곳에 들어설 때는 ‘벽사’라 말하고,이곳에 머무를 때는 ‘초불’이라 부를지어다.” 이는 단순한 문장이 아니라 수행의 길이다. 문을 들어설 때는 세속의 번뇌와 업장을 끊고辟邪 머무는 순간에는 부처를 맞이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라招佛 즉, 이곳은 공간이 아니라 마음을 바꾸는 ‘전환의 도량’이다. 천년의 뜰, 불자전용 봉안당 벽사초불정사에는 특별한 공간이 있다. 바로 “불자전용 천년의 뜰 봉안당”이다. 이 봉안당은 단순한 안치 공간이 아니다. 부처님의 가르침 아래에서 영원한 안식과 공덕이 함께하는 성스러운 자리다. 천년 향화가 이어지는 기도 공간 가족의 인연을 이어주는 영속의 자리 수행과 추모가 하나 되는 도량 삶과 죽음이 분리되지 않고, 하나의 연기로 이어지는 불교적 세계관이 그대로 구현된 공간이다. 우담바
법왕청신문 이준석 기자 | 사람은 누구나 길 위에 서 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우리는 이미 떠나는 존재이며, 어디론가 향하고 있는 존재다. 고향을 떠나 도시로, 도시를 떠나 또 다른 삶으로, 사람은 끊임없이 옮겨 다닌다. 그래서 어떤 이는 말한다. “나는 늘 떠돌아다니는 인생이다.” 그러나 과연 떠돌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아직 머물 곳을 몰라 헤매고 있는 것일까. 머무는 곳이 곧 고향이다. 우리는 흔히 고향을 과거로 생각한다. 태어나고 자란 곳, 어릴 적 기억이 남아 있는 장소를 고향이라 부른다. 그러나 삶은 뒤로 돌아가지 않는다. 고향은 기억 속에 남을 뿐, 지금의 삶을 살아주지는 않는다. 불가에서는 말한다. “지금 머무는 그 자리가 곧 도량이다.” 지금 서 있는 자리, 지금 숨 쉬는 이 순간, 지금 마주한 인연 속에서 우리는 이미 ‘머물고’ 있다. 그렇다면 고향은 먼 곳이 아니라 지금 이 자리, 이 마음 속에 있다. 떠돌음은 몸이 아니라 마음이다. 사람이 떠도는 이유는 몸이 움직여서가 아니다. 마음이 머물지 못하기 때문이다. 한 곳에 있어도 불안하고, 무엇을 가져도 만족하지 못하고, 어디에 있어도 ‘여기가 아니다’라고 느낄 때, 그때 우리는 비로소 떠돌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세상은 늘 수많은 소리로 가득 차 있습니다. 사람의 말, 감정의 흔들림, 욕망의 속삭임이 서로 뒤엉켜 무엇이 참이고 무엇이 거짓인지조차 분간하기 어려운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종종 거짓을 진실이라 믿고, 진실을 외면한 채 스스로의 착각 속에서 길을 잃습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진실을 진실로 알고, 진실이 아닌 것을 진실이 아님으로 아는 사람, 그는 마침내 올바른 진실을 깨닫게 된다.” 이 가르침은 단순한 지식이 아닙니다. 삶을 바꾸는 지혜이며, 마음을 밝히는 등불입니다. 어느 날, 한 어린 동자가 스승에게 물었습니다. “스승님, 진실은 어디에 있습니까?” 스승은 미소 지으며 대답했습니다. “진실은 멀리 있지 않다. 다만 네가 보고 싶지 않은 곳에 있을 뿐이다.” 사람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습니다. 자신에게 유리한 것은 진실이라 여기고, 불편한 것은 거짓이라 밀어냅니다. 이것이 바로 무명無明입니다. 진실을 가리는 가장 큰 장애는 세상이 아니라 바로 자기 마음입니다. 법화경은 말합니다. 모든 중생은 본래 부처의 성품을 지니고 있으며, 그 성품은 진실을 향해 있습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사람의 마음은 늘 두 가지에 붙들려 있습니다. 하나는 망상妄想이고, 또 하나는 혼침昏沈입니다. 망상은 생각이 흩어지는 것이고, 혼침은 마음이 가라앉아 잠으로 빠지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는 수행자의 가장 큰 장애입니다. 그중에서도 혼침, 즉 잠에 빠지는 것은 마음을 어둡게 하고, 지혜의 등불을 꺼뜨리는 가장 빠른 길입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이 어둠을 깨는 가장 쉬운 방편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바로 고성염불高聲念佛입니다. 조용히 속으로만 염불하면 마음은 쉽게 흐려지고, 몸은 점점 무거워져 잠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소리를 높여 또렷하게, 힘 있게 염불하면 그 소리는 곧 자신의 정신을 깨우는 종소리가 됩니다. 큰 소리로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는 순간, 귀로 그 소리를 다시 듣게 됩니다. 이때 일어나는 것은 단순한 발성이 아닙니다. 입은 부처를 부르고 귀는 그 소리를 듣고 마음은 그 소리에 집중합니다 이 세 가지가 하나로 모이면 흩어졌던 정신이 한순간에 모이고 잠은 설 자리를 잃게 됩니다. 잠이 온다는 것은 몸이 피곤해서가 아니라 마음이 흐려졌기 때문입니다. 고성염불은 그 흐림을 깨뜨립니다. 마치 어두운 방에 불을 밝히면 어둠이
법왕청신문 장규호 기자 | 청주 미원의 산자락, 바람이 머물고 구름이 쉬어가는 그 자리에서 하나의 조용한 혁명이 시작되고 있다. 그 이름은 벽사초불정사. 이곳은 더 이상 단순한 사찰이 아니다. 기도만 드리는 공간도, 과거의 전통만을 간직한 장소도 아니다. 지금 이곳은 자연과 인간, 그리고 미래세대를 하나로 잇는 살아있는 수행의 도량으로 다시 태어나고 있다. 웅장한 전각과 정갈한 마당을 배경으로 펼쳐진 풍경은 단순한 행사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었다. 정돈된 자리에 가지런히 놓인 수백 개의 의자들. 그 의자들은 단순한 좌석이 아니었다. 아직 오지 않은 사람들, 다가올 시간, 그리고 미래세대를 기다리는 ‘비어 있는 약속의 자리’였다. 그리고 그 뒤편으로는 15,000그루의 나무가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생명의 숨결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날 이 자리에는 약 800여 명의 시민과 내·외빈이 함께했다. 그러나 이 숫자는 단순한 참여 인원이 아니다. 그들은 모두 미래를 심는 증인들이었다. 자연을 살리는 것이 곧 수행이다. 벽사초불정사가 선택한 길은 분명하다. 기도만 하는 도량이 아니라 행동으로 자비를 실천하는 도량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자비는 말로 완성되지 않는다. 그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사람은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변하는 세상 속에 놓여 있다. 계절이 바뀌고 사람이 바뀌고 환경이 바뀐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사람의 마음은 변화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나는 원래 이렇게 살아왔다” “예전에는 이렇게 했는데” 과거의 방식에 머물러 현재를 보지 못하는 것이다. 각주구검刻舟求劍이란 말이있다. 배 위에서 칼을 떨어뜨린 뒤 그 자리에 표시를 해두고 나중에 그 자리를 찾아 칼을 찾으려 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배는 이미 흘러가고 있다. 칼이 떨어진 곳은 이미 지나가 버렸는데 사람은 표시만 믿고 같은 자리를 찾으려 한다. 이것이 바로 어리석음이다. 우리의 삶도 이와 다르지 않다. 상황은 변했는데 생각은 그대로이고 세상은 움직이는데 마음은 멈춰 있다. 그래서 우리는 길을 잃는다. 불교에서는 말한다. “모든 것은 무상無常하다.”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변하지 않으려 한다. 과거의 기억을 붙잡고 옛 방식만 고집하며 지금 이 순간을 놓쳐버린다. 그래서 괴로움이 생긴다. 변하는 세상에 고정된 마음으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과거를 붙잡지 않는다. 흘러가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변화 속에서 자신을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이 세상은 겉으로는 밝아 보이지만 실상은 어둠 속에 덮여 있다. 사람들은 빛 속에 사는 것 같지만 욕심과 분노, 집착과 어리석음 속에서 스스로를 가두며 살아간다. 그래서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이 세상은 무명無明의 어둠 속에 잠겨 있다고. 그렇다면 그 어둠 속에서 누가 저 지혜의 빛을 볼 수 있단 말인가. 모두가 같은 하늘 아래 살지만 모두가 같은 세상을 보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이는 눈을 뜨고도 보지 못하고 어떤 이는 아무리 설명해도 깨닫지 못한다. 왜일까. 그 이유는 단 하나다. 마음이 닫혀 있기 때문이다. 지혜의 빛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 안에 존재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빛을 보지 못한다. 욕심이 눈을 가리고 집착이 마음을 막으며 어리석음이 자신을 가두기 때문이다. 그래서 법화경은 말한다. 이 세상에서 진정으로 깨어나는 사람은 많지 않다고. 마치 새장 속에 갇힌 새들이 하늘을 바라보면서도 날아갈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문은 열려 있지만 스스로 나가지 못하고 익숙한 좁은 공간에 머무르는 것이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몇 마리의 새는 결국 날아오른다. 두려움을 넘어 자신을 벗어나 하늘로 향한다. 그 새들은 안다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사람은 누구나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살아간다. 부와 명예, 권력, 그리고 남보다 앞서고 싶은 마음과 우리는 그것을 ‘성공’이라 부르며 그것을 위해 많은 시간을 바친다. 하지만 어느 날 문득 깨닫게 된다. 지금까지 붙잡고 있던 것들이 과연 무엇이었는지를. “남가일몽南柯一夢” 남쪽 나뭇가지 아래에서 꾼 한낱 꿈과 같다는 뜻이다. 한때의 부귀영화도 권력도 결국은 꿈처럼 사라진다는 말이다. 불교에서는 이를 무상無常이라 한다. 모든 것은 변하고 머물지 않는다. 우리가 집착하는 것들 또한 시간이 지나면 모두 흘러가고 사라진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것을 영원한 것처럼 붙잡고 놓지 못해 괴로워한다. 성공을 이루어도 불안하고 잃을까 두려워하며 결국 마음의 평안을 얻지 못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모든 것은 잠시 머무를 뿐이다.” 남가일몽의 가르침은 단순히 허무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지금 이 순간을 더 소중히 여기라는 뜻이다. 지나간 것은 이미 꿈이 되었고 다가올 것 또한 아직 오지 않았다. 우리가 진짜로 살 수 있는 시간은 오직 지금뿐이다. 그래서 수행자는 결과보다 마음을 바라보고 소유보다 내려놓음을 택한다. 가지려 할수록 괴로워
법왕청신문 장규호 기자 | 흰 새 한 마리가 있습니다. 어둠이 아직 완전히 걷히지 않은 새벽, 그 새는 머뭇거리지 않고 태양을 향해 날아오릅니다. 땅의 습기와 안개, 바람의 흔들림을 뒤로하고 오직 빛을 향해 날아갑니다. 이 모습은 곧 수행자의 길이며, 깨어난 자의 모습입니다. 법구경의 말씀에 이르기를, “마라와 그의 군대를 처부순 이는 이 세상을 멀리 벗어난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마라는 단지 외부의 존재가 아닙니다. 탐욕, 분노, 어리석음, 집착, 두려움이 모든 것이 곧 우리 마음속의 마라입니다. 우리는 흔히 외부의 장애를 두려워하지만, 정작 우리를 묶어두는 것은 내부의 번뇌입니다. 수행이란 멀리 있는 어떤 세계를 찾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내 안에 있는 어둠을 걷어내는 일입니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습니다. 단지 빛이 없을 뿐입니다. 우리가 마음을 밝히고, 한 생각을 바르게 세우는 순간, 마라는 설 자리를 잃습니다. 흰 새가 태양을 향해 날아가듯, 수행자는 깨달음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날아오르는 용기’입니다. 많은 이들이 알고는 있지만, 날아오르지 못합니다. 익숙한 삶, 익숙한 고통 속에 머물며 변화를 두려워합니다. 하지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사람은 누구나 배우며 살아간다. 그러나 우리는 흔히 좋은 것만 배우려고 한다. 훌륭한 사람의 말, 성공한 사람의 삶, 아름다운 이야기만을 배움의 대상으로 삼는다. 하지만 불교의 지혜는 그보다 한 걸음 더 깊다.“他山之石”타산지석, 즉, 다른 산의 돌이라도 내 산의 옥을 가는 데 쓰일 수 있다는 뜻이다. 이는 단순한 격언이 아니다. 우리 삶을 바꾸는 수행의 태도를 말해주는 가르침이다. 우리는 보통 남의 잘못을 보면 비판한다. “저 사람은 왜 저럴까” “나는 저렇게 하지 말아야지” 이렇게 생각하며 남을 판단하는 데 그친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다르다. 남의 허물을 보며 자신을 돌아본다. 남의 어리석음을 보며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남의 실수를 보며 자신의 길을 바로잡는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말한다. 모든 것은 나를 위한 공부라고. 좋은 사람도 스승이지만 나쁜 사람 또한 스승이다. 칭찬은 나를 기쁘게 하지만 비난은 나를 성장하게 한다. 타산지석의 진정한 의미는 남을 통해 나를 깨닫는 데 있다. 세상에는 완벽한 사람이 없다. 그러므로 완벽한 배움도 없다. 우리는 매일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수많은 일을 겪는다. 그 모든 것이 내 마음을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사람의 마음에는 기쁨과 슬픔, 사랑과 미움이 함께 자리합니다. 그 가운데에서도 사람을 가장 오래 괴롭히는 감정이 있다면 아마 미움일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받거나 억울한 일을 겪으면 마음속에는 자연스럽게 원망과 미움이 생겨납니다. 그 감정은 처음에는 작은 그림자처럼 시작되지만, 마음속에서 계속 붙잡고 있으면 점점 커져 결국 삶 전체를 어둡게 만들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흔히 이렇게 생각합니다. “저 사람이 나를 괴롭혔다.” “저 사람이 나를 힘들게 만들었다.” 그래서 미움의 화살을 상대에게 향하게 합니다. 그러나 법화경이 전하는 가르침은 그보다 훨씬 깊습니다. 미움은 상대를 향한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자신을 괴롭히는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순간 우리의 마음은 이미 평화를 잃어버립니다. 상대는 이미 그 일을 잊고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미움을 품고 있는 사람은 그 일을 계속 떠올리며 스스로 마음을 괴롭힙니다. 마치 무거운 돌을 들고 있으면서 상대에게 던지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돌을 들고 있는 동안 가장 먼저 힘들어지는 사람은 바로 돌을 들고 있는 자신입니다. 불교에서는 이 마음을 집착의 고리라고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