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마음이 곧 부처라 하였습니다. 진리를 멀리서 찾을 필요 없습니다. 오늘 하루, 우리가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에 깊은 의미를 담고, 우리가 내쉬는 한숨 한숨마다 자비의 향기를 머금는다면, 그 자리가 곧 도량道場이요, 그 삶이 곧 수행修行이 됩니다. 사람은 본래 청정한 존재입니다. 번뇌도, 탐욕도, 미움도 덮여진 것이지, 태어난 마음은 맑고 고요합니다. 그러니 다른 데서 길을 찾지 마십시오. 당신의 마음 안에 이미 그 길이 있습니다. 오늘 하루도 자비로움으로 말하고, 지혜로 듣고, 감사함으로 걸으십시오. 그리하면 당신의 삶은 그 자체로 부처님의 법문이 됩니다.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법성본무생法性本無生이란, 법의 본성은 애초에 생겨남도, 사라짐도 없는 자리입니다. 태어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 것. 그것이 바로 참된 자성自性입니다. 그러나 중생의 눈에는 세상 모든 것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변화로 보이기에, 거기에서 온갖 집착과 번뇌가 일어납니다. 시현이유생示現而有生이란, 부처님은 이러한 중생의 눈높이에 맞추어, 생겨남이 있는 듯 시현해 보이십니다. 진리는 말 없이도 머무나, 중생의 깨달음을 돕기 위해 부처는 모습과 소리를 빌려 진리를 설하시고, 그 진리를 일깨우기 위해 육신을 드러내십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방편方便'입니다. 시중무능현 역무소현물 是中無能現 亦無所現物이라, 그렇다면 이 모든 시현 속에는 '나타내는 자'도, '나타나는 대상'도 없습니다. 이는 곧 ‘주체와 객체’, ‘너와 나’라는 이분법적 분별이 진실이 아님을 뜻합니다. 보는 이도 없고, 보이는 것도 없는 경계, 그것이 바로 무생법인無生法忍의 세계입니다. 세간의 눈에는 분명히 '있다'고 보이지만, 진리의 눈으로 보면 거기엔 실체가 없습니다. 불생불멸, 무소무위한 그 자리를 본다는 것, 그것이 바로 법성法性을 보는 눈, 지혜의 눈입니다. 오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우리는 흔히 묻습니다. "왜 나는 이렇게 태어났는가?" "왜 저 사람은 모든 것을 갖고 나는 아무것도 없는가?" 그러나 『논어』에도 말했듯이 死生有命, 富貴在天이라 하였습니다. 죽고 사는 것은 하늘이 내린 명(命)에 따르고, 부와 귀함은 천도天道에 달려 있다는 뜻입니다. 이는 운명을 체념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불교에서는 이것을 전생의 업業, 즉 인연과 인과因果의 결과로 이해합니다. 내가 지은 만큼 받고, 내가 뿌린 만큼 거두며, 내가 베푼 만큼 채워지는 것이 이 우주의 섭리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할 일은 단 하나입니다. 주어진 명을 원망하지 말고, 주어진 업을 탓하지 말며, 지금 이 순간에 최선을 다해 선업善業을 짓는 것입니다. 세속의 눈으로 보면, 죽음은 두렵고, 가난은 괴롭습니다. 그러나 명命을 바로 아는 사람은 죽음조차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며, 가난조차 수행의 밭으로 삼습니다. “복은 하늘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짓는 것이다.” 진정한 부귀는 마음의 평화에서 옵니다. 참된 성공은 남과의 비교가 아니라 내면의 성장에서 비롯됩니다. 오늘 하루, 나에게 주어진 삶의 명을 감사히 여기며, 어떤 순간에도 선업을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예로부터 불가에서는 “산하무애山河無碍”라 하였습니다. 크게는 삼천대천세계가, 작게는 한 사람의 마음이 본래는 막힘이 없는 진리의 흐름, 무애無碍의 세계에 있다고 말입니다. 산은 산이고, 강은 강이지만 그 흐름에는 막힘이 없습니다. 물은 산을 돌아 흐르고, 산은 물을 품어 길을 내줍니다. 그럼에도 오늘날 우리는 작은 오해에도 막히고, 작은 차이에도 멈추며, 서로를 넘지 못할 벽으로 여깁니다. 세상은 소통이 막히고, 마음은 꽉 막혀 있다 요즘 세상은 온갖 정보와 소식이 넘쳐나고, 연결된 듯 보이지만 정작 마음은 서로를 향해 굳게 닫혀 있습니다. 정치의 벽, 이념의 벽, 세대의 벽, 그리고 감정의 벽, 그리하여 말은 많고 이해는 적으며, 속도는 빠르되 방향은 흐릿합니다. 어느새 우리는 ‘산과 강처럼 흐르는 삶’이 아니라 ‘벽과 장벽처럼 고립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무애란, 단순히 막힘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산하무애”의 참뜻은 모든 차별과 경계를 뛰어넘는 자비와 지혜의 실천에 있습니다. 무애란, 산이 물을 가로막지 않듯 내가 너를 가로막지 않는 것, 물이 바위를 돌아 흐르듯 고통과 시련을 돌아 나아가는 길입니다. 타인의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옛날, 어느 깊은 산중에 가피암 이라는 작은 절이 있었습니다. 절 앞에는 소나무가 병풍처럼 둘러선 고요한 못이 있었지요. 맑은 날이면 그 물에 구름이 비치고, 바람이 불면 연잎이 잔잔히 흔들리는, 그야말로 세속의 번뇌를 잊게 해주는 청정도량이었다. 그 절에는 나이 지긋한 일정 스님이 살고 계셨다. 스님은 이따금 동네 아이들이나 방황하는 나그네들을 불러 차를 내어주시고, 마음을 어루만지는 법문을 들려주시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세상이 뒤흔들릴 듯한 큰 폭풍이 닥쳤다. 비는 억수같이 쏟아졌고, 바람은 산허리를 넘어 절의 기왓장을 들썩이게 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밥상도 엎어진 채로 대피했고, 어떤 이는 소중한 집을 잃었다. 절의 못가 역시 망가졌고, 아름답던 연꽃도 뿌리째 뽑혔다. 사람들의 얼굴엔 망연자실함이 가득했고, 어디서부터 손을 써야 할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때, 절에 피난 온 한 젊은이가 노스님께 여쭈었다. “스님, 저 연꽃도 뽑혀 나가고, 절도 망가지고, 사람들은 울고 있습니다. 도대체 왜 하늘은 이렇게 무심할까?” 일정스님은 조용히 못가로 나가셔서, 떨어진 연잎 하나를 주워들고 말씀하셨다. “저 연꽃은 진흙 속에서 피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부처님께서 사위성에 계실 때, 비구들에게 자비심慈悲心에 대해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여기 예리한 칼 한 자루가 있다고 하자. 그런데 지나가던 한 사람이 그 칼을 보고 ‘나는 이 칼을 활처럼 휘게 할 수 있다’고 하며 자신의 능력을 자랑하였다면, 그대들은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그러자 한 비구가 대답하였다. “세존이시여, 날카로운 칼을 구부린다거나 휘게 만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만약 억지로 그렇게 하려 한다면, 결국 자신이 그 칼에 상처를 입고 말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그 말을 들으시고 다시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그대들이 자비심을 익히고, 반복하여 수습하며, 몸과 마음에 스며들게 한다면, 설령 누군가가 칼을 엿가락처럼 구부리려 해도 해를 입지 않을 것이다. 그대는 자비심 속에 머물게 될 것이며, 더 이상 어떤 것도 두렵지 않을 것이다. 귀신이 나타난다 하여도, 마음이 흐트러지거나 동요하지 않으리라. 그때의 마음은 오직 너 자신만이 움직일 수 있는, 흔들림 없는 네 마음이 될 것이다.” 우리는 자비심의 부드럽고 따뜻한 정서를 알고 있다. 그 자비심은 개인을 넘어서 가정으로, 사회로, 국가와 세계로 확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부모 자식 간의 인연도 전생에 수없는 공양을 올린 결과다.” 이는 인과경因果經이 전하는 대표적인 가르침이다. 단순한 혈연 관계가 아닌, 전생의 업력과 선연善緣의 결실로 맺어진 것이 바로 가족이라는 뜻이다. 불교의 대표 경전 중 하나인 인과경은 우리가 이 생에서 겪는 기쁨과 고통, 만남과 이별이 모두 과거의 원인에서 비롯된 것임을 밝히고 있다. 그중에서도 '가족'은 전생의 깊은 인연이 가장 진하게 현현된 삶의 관계로 주목된다. 일정스님은 최근 법문을 통해 “가족은 업을 갚고 복을 짓는 최초의 도량”이라며, 불자들이 수행의 시작을 멀리서 찾지 말고, 가족 안에서부터 자비심과 지혜를 실천하라고 강조했다. 그는 “부모에게 공경을 다한 이는 자식으로부터 효를 받게 되며, 부부간에 믿음을 지킨 이는 다음 생에서도 좋은 인연을 맺게 된다”며, 인과경의 내용을 인용했다. 특히 부모와 자식, 부부와 형제자매 간에 생기는 갈등이나 애착, 불화 또한 과거생의 인연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를 바로 보고 선한 업으로 전환해야 다음 생에도 평화로운 인연으로 이어진다고 설명했다. “절에 가지 않아도, 가정이 도량이고 가족이 스승이며 도반이다.” 이 말은 수행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불자 여러분과 함께 법의 향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우리가 나눌 법의 주제는 “무시겁래無始劫來”, 곧 시작 없는 과거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이어져 온 윤회의 흐름입니다. 1. 무시겁래란 무엇인가? “무시無始”란 시작이 없다는 뜻이며, “겁劫”이란 불가에서 말하는 매우 긴 시간 단위를 의미합니다. “무시겁래”란 곧 우리가 언제부터 존재했는지조차 알 수 없을 정도로 먼 옛적부터 생사윤회를 되풀이하며 살아왔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 생이 처음이 아니며,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것이 불교의 근본적인 가르침입니다. 우리는 무시겁래로부터 수없는 몸을 받아, 부모를 바꾸고 이름을 달리하며 생사를 거듭해 왔습니다. 2. 윤회의 굴레 속에서 우리는 무시겁래 동안 업業을 짓고, 그 업에 따라 생사를 반복해 왔습니다. 때론 천상에, 때론 인간 세상에, 때론 축생계나 지옥계에 이르기까지 번뇌와 무명을 따라 흐르는 바람에 실려 흘러왔습니다. 무시겁래라 하여 시작이 없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의 번뇌도 깊고 뿌리도 깊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끝없는 윤회 속에서도 부처의 씨앗, 즉 불성佛性은 한 번도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3. 무시겁래의 자각은 수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오늘의 법문은 거룩하신 부처님 전에 귀의하옵고, 법의 향기 속에 함께하신 불자 여러분께 진심으로 인사 올립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배우고자 하는 말씀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이끄는 궁극의 경지, 곧 열반적정涅槃寂靜입니다. 열반涅槃이란 무엇인가? ‘열반’은 산스크리트어 Nirvāṇa의 번역어로, 본래의 뜻은 “불을 끄다”입니다. 이 불은 탐욕의 불, 성냄의 불, 어리석음의 불, 곧 삼독三毒의 불길을 말합니다. 우리 중생은 이 불길에 휘말려 괴로움 속에 살아갑니다. 열반이란 이러한 번뇌의 불을 끄고,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난 해탈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죽음 이후에 도달하는 장소가 아니라,집착이 사라진 마음의 경지이며, 고통과 두려움이 없는 진정한 자유입니다. 적정寂靜이란 무엇인가? ‘적寂’은 고요함을 뜻하고, ‘정靜’은 흔들림 없는 평화를 말합니다. 그러나 이 적정은 단지 소리 없는 고요함이 아닙니다. 그것은 마음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완전한 침묵, 어떤 외풍에도 흔들리지 않는 내면의 평온입니다. 세속의 사람들은 소란을 피하여 외적인 고요를 찾지만, 부처님께서는 바깥이 아니라 마음속의 정적을 구하라 하셨습니다. 그 마음의 침묵이 곧 ‘적정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우주의 진리는 큰 북과도 같습니다. 크게 치면 큰 소리가 나고, 작게 치면 작은 소리가 납니다. 우리의 말 한마디, 생각 하나, 행동 하나가 이 북을 두드리는 손길이 됩니다. 정성스럽고 간절히 치면 그 울림은 멀리멀리 퍼져나가, 사람들의 마음을 깨우고 세상의 어둠을 밝히는 법음이 됩니다. 그러나 산만하고 무심히 치면 그 소리는 작고 흐릿하여, 자신조차도 듣지 못한 채 허공에 흩어지고 맙니다. 우리 가족이 오늘 나눈 말들은 어떤 소리로 남았는지요? 격려와 감사의 소리였는지, 아니면 불평과 원망의 소리였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봅니다. 가족은 작은 우주입니다. 이 우주 안에서 울리는 소리는 가장 진하고 깊은 진실이 됩니다. 가장 사랑하는 사이이기에, 가장 조심하고 또 가장 정성을 다해야 합니다. 때로는 큰 북소리처럼 용기 있게 진실을 말해야 하고, 때로는 작은 북소리처럼 다정하고 조용한 말로 서로를 감싸야 합니다. 우주의 북은 거짓을 울리지 않습니다. 진심만이 울림을 남깁니다. 우리 가족의 마음이 진심으로 북을 울릴 수 있도록, 서로의 말에 귀 기울이고, 서로의 마음에 머물기를 바랍니다. 진리를 향해 걷는 길 위에서, 우리 가족이 함께 북을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세상을 살다 보면 우리는 수많은 인연을 만납니다. 어떤 이는 우리의 벗이 되어 따스한 손을 잡아주고, 어떤 이는 우리의 마음에 상처를 남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가르치셨습니다. "怨親平等 同體大悲" 원수와 벗을 가르지 말고, 모두를 평등히 여기며, 한 몸처럼 품는 자비를 지녀야 한다고. 원망하는 이도, 사랑하는 이도, 모두 한 세상의 중생이요, 모두가 고통과 기쁨을 함께 겪는 인연입니다. 우리가 미워하는 그 사람 또한 자신의 무명을 이기지 못해 아픔을 드러낸 것일 뿐, 본성은 모두 부처님과 같은 청정한 빛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미움에 끌리지 않고, 친애에 집착하지 않으며, 모든 인연을 평등하게 대하고, 한없는 자비로 서로를 어루만져야 합니다. 서로 다투는 마음을 거두고, 서로 상처내는 말을 삼가며, 적대와 집착을 초월하여 모든 존재를 있는 그대로 껴안는 것. 그리할 때, 우리 마음은 진정으로 자유로워지고, 이 세상은 고통이 사라진 정토淨土가 될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 모두 '怨親平等원친평등'의 마음을 지니고, '同體大悲동체대비'의 가슴으로 세상을 품읍시다. 그것이 곧, 자신을 구하는 길이요, 모든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오늘 우리는 “인간의 본질”이라는 주제로 마음의 길을 함께 걸어보고자 합니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이 질문은 수천 년 전부터 이어져 온 인류의 깊은 물음입니다. 살을 가진 육신인가, 감정을 느끼는 마음인가, 아니면 생각하는 지성인가? 불교에서는 말합니다. “일체중생 실유불성一切衆生 悉有佛性” 모든 중생은 다 불성을 지니고 있다. 즉, 인간의 본질은 결코 외모나 재물, 지식에 있지 않고, 바로 그 안에 숨겨진 ‘깨달음의 씨앗’, ‘자비와 지혜의 빛’에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때로 화를 내고, 질투하고, 욕망에 이끌려 방황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의 참된 모습은 아닙니다. 그 모든 험한 파도를 지나 고요한 마음의 바다 아래에는 언제나 맑고 밝은 불성이 숨 쉬고 있습니다. 본질은 감추어져 있지만, 사라지지 않습니다. 구름이 태양을 가릴 수는 있어도, 태양 그 자체를 없앨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단 하나. 본래의 나를 기억하는 것. 진실한 나, 자비로운 나, 지혜로운 나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수행을 합니다. 매일 잠시 눈을 감고 호흡을 바라보며, 거짓된 나를 내려놓고, 참된 나와 다시 마주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꽃을 집어 미소하니, 마음과 마음이 서로 통한다. 여러분, 한 번 눈을 감고 상상해 봅시다. 한 스님이 조용히 연꽃 한 송이를 들고 있습니다. 아무 말 없이, 그저 미소만 지었을 뿐입니다. 그 모습을 본 제자 가섭은, 말 없이 웃었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스승과 제자는 말없이 마음이 통했습니다. 이 이야기가 바로 ‘염화미소拈花微笑’입니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깊은 마음의 교감”이지요. 이처럼, 세상에는 말보다 더 깊이 전해지는 마음이 있습니다. 웃는 얼굴, 따뜻한 눈빛, 진심 어린 행동. 이것이 바로 ‘심심상인心心相印’, 마음과 마음이 서로 통하는 길입니다.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특히 많은 갈등과 고민 속에 있는 청소년 여러분에게도 이 마음의 길은 아주 소중한 열쇠가 됩니다. 친구와 다투었을 때, 부모님과의 오해가 생겼을 때, 굳이 말로 다 설명하려 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때로는 진심 어린 미소 하나, 작은 배려 한 번, 그것만으로도 마음은 전해질 수 있습니다. 스님들이 말하는 ‘참된 깨달음’은 거창한 철학이나 깊은 공부에서만 오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아주 작은 순간, 꽃을 보고 미소 짓는 그 마음속에도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불자 여러분, 그리고 도반 여러분, 반갑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는 "자기영광自己靈光"이라는 주제로 마음의 등불을 함께 밝혀보고자 합니다. 자기영광이란 무엇일까 글자를 풀이하자면, '자기自己'는 나 자신, '영광靈光'은 본래부터 지닌 맑고 거룩한 빛'을 말합니다. 즉, 자기영광이란 '스스로 안에 지닌 본래의 빛, 본래의 지혜, 본래의 불성佛性'을 의미합니다. 우리 마음속 깊은 곳에는 태어나기 전부터 존재한, 더럽혀지지 않은 광명이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이것을 '자성自性', 또는 '여래장如來藏', '본래면목本來面目'이라 부르기도 하지요. 그런데 우리는 세상의 시끄러운 소음과 끊임없는 욕망, 비교와 다툼 속에서 이 자기영광의 빛을 점점 잊고 살아갑니다. 마치 거울에 먼지가 앉으면 비추는 본래의 모습을 볼 수 없듯, 우리 마음의 거울도 탐진치貪瞋癡로 흐려져 본래의 자비와 지혜를 비추지 못하게 됩니다. 수행이란 밖으로 나가 무언가를 찾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본래부터 있는 영광, 광명, 불성을 다시 바라보고, 닦고, 깨우는 일입니다. 《능엄경》에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만법은 모두 자성으로부터 비롯된다." 즉, 깨달음도, 자비
법왕청신문 장규호 기자 | 오늘은 거룩하신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우리 수행자들에게 있어, 계戒는 수행의 기초이며, 청정한 삶의 근본입니다. 오늘은 ‘일체계행’이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함께 마음을 모아보고자 합니다. '일체계행一切戒行'이란,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모든 계율과 행실'입니다. 이는 단순히 몇 가지 계율을 지키는 데 그치지 않고, 삶의 모든 순간에 계戒의 정신을 온전히 실천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부처님께서는 계율을 외적으로 지키는 데 머물지 말고, 마음속 깊은 곳까지 계의 뜻을 새기고 실천하라고 하셨습니다. 어떤 이는 계율을 지키는 것을 '억압'이라 여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수행자에게 계는 억압이 아니라 해탈을 위한 보호망입니다. 예컨대, 우리가 자동차를 운전할 때 신호를 지키는 것은 자유를 빼앗기기 위한 것이 아니라, 보다 안전하고 평화롭게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한 지혜로운 선택입니다. 계는 마음의 혼탁함을 씻어내는 약이며, 어지러운 세상 속에서 나아갈 방향을 알려주는 나침반입니다. 그러므로 일체계행이란, 계를 삶의 모든 행동과 말, 생각에까지 확장하여 계율을 삶의 근본으로 삼는 전면적 실천입니다. 우리는 몸으로 짓는 업(신업 身業), 말로 짓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