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왕청신문 이존영 기자 | 고승 지눌스님은 도를 닦는 데 있어 근본이 되는 큰 문제에 대해 일상생활에 있어 놓치기 쉬운 일 하나하나를 자상하게 지적하여 수행인의 마음가짐을 정립시킨 분이다.
그 첫 번째가 “일 없이 다름 사람의 방에 들어가지 말고 병처(屛處)에 나아가 굳이 남의 일을 알려고 하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곧 일없이 남의 방을 기웃거리거나 남으 비밀을 알려고 하는 것 자체가 대수롭지 않은 일 같지만, 그것이 습관화되면 도를 닦고자 하는 마음을 흩어버리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입니다.
무연사(無緣寺)!
지눌스님이 이 단락의 첫구절에서 힘을 주어 말씀하신 ‘무연사’라는 글자 속에는 수행인의 기본자세가 담겨 있습니다.
곧, 반연(攀緣) 하지 말라. 어디에 붙잡히거나 끄달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올바른 인연법(因緣法) 속에서 살아가라는 말씀입니다.
불교의 법은 인연법이고, 인연은 인연업과(因緣業果)의 줄인 말입니다. 인연업과를 농사에다 비유하여 봅시다.
인(因)은 종자요, 연(緣)은 땅·기후 등의 자연환경이며, 업(業)은 농업입니다. 좋은 씨(因)를 기름지고 기후가 좋은 땅에 심고(緣), 훌륭한 재배법에 의해 정성껏 키우면(業), 그 결과(果)는 자연히 넉넉하고 풍성해집니다. 다시 출가수행인을 예로 들어 봅시다.
부처를 이루겠다는 결심은 바로 출가 수행인의 인입니다. 이 인의 종자를 잘 싹 틔우기 이해서는 훌륭한 스님과 좋은 도반, 적절한 수행처 등의 환경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처를 이룰 수 없습니다. 부처를 이룰 수 있는 업을 닦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귾임없이 정진하고 스스로의 마음을 다스려야 하는 것입니다. 필경 한 수행인이 성불하겠다는 굳건한 결심(因)으로 좋은 환경을 만나 부처님이 될 수 있는 행을 끊임없이 닦아간다면 그에게 돌아오는 결과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부처 ‘불(佛)’자 그것일 뿐입니다.
우리가 매일같이 말하는 수행이 무엇입니까? 바로 부처를 이룰 수 있는 좋은 인연을 맺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처를 이루는 데에는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 인연, 오히려 수도에 방해가 되는 인연을 맺고 거기에 끄달리며 살아간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다른 사람의 방에 일 없이 들어가는 것. 이것은 나의 수도에도 도움이 되지 않고 그 방 주인의 정진에도 방해만 줄 뿐입니다. 하물며 이러한 것에 습관이 붙으면 자기도 모르게 남의 방을 찾거나 기웃거리게 되니 경계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눌스님은 “병처(屛處)에 나아가 남의 일을 알려고 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병처는 병풍이 쳐진 곳입니다.
옛날 중국이나 우리나라의 사찰에서는 큰 방에다 병풍을 쳐서 각 승려의처소를 구분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승려 개개인이 거처할 수 있는 방을 따로 만들 수 있는 경제적인 여력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병풍으로 구역을 나누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병처는 방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러나 병풍으로 가렸기 때문에 시선은 차단될 뿐, 소리는 잘 들리게 마련입니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병풍 저 쪽편의 일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고 심지어는 엿보는 경우까지 생기게 됩니다.
하지만 출가수행인이 어떠한 존재입니까? 눈앞에 펼쳐지는 시비거리를 보아도 본 바가 없어야 하고 들어도 마음에 도지 않는 사람이거늘, 어찌 병풏 너머의 일에 신경을 쓰겠습니까? 하물며 남의 비밀을 알려고 귀를 쫑긋 세우거나 문틈새를 기웃거려야 되겠습니까?
그릇된 인연, 별난 호기심에 빠져 있으면 공부가 제대로 될 수 없습니다. 출가의 정신에 맞추어 끊을 것은 마땅히 끊어야 합니다. 수도를 위해 호기심을 멀리하는 바보가 됩시다. 성불이라는 큰 일을 생각하는 이라면 최소한 호기심에 대해서는 바보가 될 수 있어야 합니다.
“바보가 되거라. 사람 노릇 하자면 일이 많다. 바보가 되는 데서 참 사람이 나온다.”
진정 옛스님들의 말씀처럼 바보가 되어 수도에 방행가 되는 일에 관심을 기울이지 말고 부지런히 정진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