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법왕 일붕 서경보 스님의 삶은 불교의 울타리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그는 “불법은 인류 전체의 것”이라 믿었고, 종교와 종파, 국경의 벽을 뛰어넘어 화합을 실천하고자 했다. 그 상징적인 장면이 바로 교황과의 만남이다. 일붕 스님은 한국을 방문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게 친히 염주를 걸어드렸다. 가톨릭의 최고 수장과 불교의 법왕이 합장으로 마주한 이 장면은, 인류 종교사에서 보기 드문 화합의 상징으로 기록되었다. 스님은 이를 ‘세계일화世界一花’라 불렀다. 인종과 언어, 종교와 문화를 넘어 인류 전체를 한 송이 연꽃으로 피워내겠다는 서원이자, 모든 종교가 하나의 평화로운 세계를 위해 함께해야 한다는 선언이었다. 교황과의 만남은 단순한 예우가 아니었다. 그것은 곧 불교적 자비와 기독교적 사랑이 손을 맞잡은 순간, 인류 평화의 가능성을 보여준 역사적 사건이었다. 스님의 친필 휘호 松風梅月송풍매월은 이 사상을 그대로 드러낸다. 솔바람처럼 청정하고, 매화 달빛처럼 고결한 마음으로 서로를 존중할 때, 비로소 세계일화의 꽃이 피어난다는 메시지였다. 일붕 법왕의 발걸음은 이렇게 종교 간의 벽을 허물며, 인류 화합의 길을 밝혀갔다. 송풍매월松風梅月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1960년대의 격동은 불교에게도 새로운 길을 열어주었다. 전쟁과 분열의 그림자가 세계를 뒤덮을 때, 한 스님의 원력은 국경을 넘어 인류를 향했다. 그분이 바로 초대법왕 일붕 서경보 스님이었다. ‘법왕法王’이란 단순한 직함이 아니다. 이는 불법을 왕도로 삼아, 세상의 어둠을 밝히는 지혜와 자비의 등불이 되겠다는 서원誓願이다. 마치 용龍이 구름 속을 뚫고 하늘로 솟구치듯, 스님의 즉위는 한국 불교를 넘어 세계 불교의 새로운 도약을 알리는 상징이었다. 즉위는 곧 선언이었다. “불교는 특정한 민족이나 언어의 소유가 아니다. 부처님의 진리는 모든 인류의 것이며, 평화는 불교가 세상에 내리는 가장 고귀한 공양이다.” 스님은 이 선언을 단지 말로만 남기지 않았다. 세계 53개국의 대표들과 손을 맞잡고, 종교와 사상을 달리하는 이들과도 벽을 허물었다. 그 만남은 서로 다른 색채의 꽃잎들이 한 송이로 피어나는 ‘세계일화世界一花’의 실현이었다. 일붕 스님의 법왕 즉위는 ‘권위의 자리’가 아니라 ‘책임의 자리’였다. 전쟁의 시대에 평화를 설파하고,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자비를 전하며, 불법을 통해 인간의 존엄을 지키려는 수행자의 서원이자 사상적 결실이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1964년, 51세의 나이에 초대법왕 일붕 서경보 큰스님은 한국 스님으로서는 최초로 미국 땅을 밟았다. 당시 한국불교는 전쟁의 상처 속에서 재건의 길을 걷고 있었지만, 세계를 향한 도전은 여전히 낯설고 험난한 길이었다. 그러나 일붕 스님은 이미 구만리를 나는 붕새처럼, 더 큰 서원을 품고 있었다. 한국 스님 최초의 미국행 스님은 미국 콜롬비아 대학, 워싱턴 대학, 캘리포니아 대학, 하와이 대학 등에서 교환교수로 활동하며 동서양의 학문과 불교사상을 교류했다. 1965년 7월 16일, 한국 불교사에서 처음으로 해외 포교사 임명장을 받은 것은 그 노력의 결실이었다. 해외 포교와 교민 사회 미국에 머무는 동안 스님은 학문뿐 아니라 교민 사회와도 깊은 인연을 맺었다. 워싱턴 불국사, 세계중앙선원 등을 중심으로 교민 불자들이 모였고, 스님은 그들의 신행信行과 삶의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당시 교민들에게 불국사는 단순한 예배당이 아니라, 잃어버린 고향과 정체성을 회복하는 도량이었다. 스님은 불교를 통해 이들에게 마음의 안식과 삶의 희망을 주었고, 이는 곧 한국불교가 세계 속에서 뿌리내리는 첫걸음이 되었다. 세계평화와 호국불교의 발원 스님의 해외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불법은 수행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교학과 경율론經律論에 정통하여, 수행과 학문을 겸비한 스승만이 대중을 지도할 수 있다. 일붕 서경보 큰스님의 행적은 바로 그 점을 잘 보여준다. 동국대와 임제전문대학, 학문의 토대 1940년대, 스님은 일본 교토의 임제전문대학 전문부에 입학하여 정밀한 교학 과정을 수학했다. 이는 당대 조선의 젊은 스님들로는 드물게 해외 유학의 길을 택한 사례였다. 귀국 후에는 동국대학교 불교학과에 입학해 졸업하며, 한국불교의 전통과 근대 학문을 두루 익혔다. 그 후 원광대·전북대 강사, 해인대학 교수, 부산대와 동아대 철학과 교수로 활동하면서 불교학의 학문적 깊이를 한국 사회와 학계에 전파했다. 불교와 사회를 잇다. 스님은 단지 학문 연구에 머물지 않았다. 1953년에는 경남일보 논설위원으로 활동하며 불교적 시각에서 사회 문제를 조명했다. 이는 불교가 교단 울타리를 넘어, 사회 속에서 목소리를 낼 수 있음을 보여준 중요한 사례였다. 삼장법사 학위 수여 1962년, 일붕 스님은 자유중국臺灣의 삼장학원三藏學院에서 삼장법사三藏法師학위를 수여받았다. 삼장법사는 불교 경전인 경장·율장·논장에 모두 정통한 학승에게만 주어지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1914년, 일제강점기의 격랑 속에서 제주 서귀포에 한 소년이 태어났다. 그가 훗날 세계불교 초대 법왕으로 불리게 될 일붕 서경보一鵬 徐京保 큰스님이다. 산방굴사에서의 첫 걸음 1932년, 19세의 청년 서경보는 세속의 길을 버리고 불법佛法의 길을 선택했다. 그가 처음 발걸음을 옮긴 곳은 제주 산방굴사였다. 기암절벽 속에 자리한 산방굴사는 예로부터 수행자들이 참선하던 고요한 도량이었다. 여기서 그는 첫 수계受戒를 받고, 불법에 귀의한 승려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스승을 찾아, 큰 법맥을 잇다 이듬해, 그는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 지리산 화엄사로 향했다. 당시 불교 교학의 대강백으로 이름 높던 진진응 스님을 찾아가 가르침을 받았다. 이어 1935년에는 전북 위봉사에서 사미과와 사집과를 마쳤고, 이때 은사 유춘담 스님으로부터 법호 ‘일붕一鵬’을 받았다. “구만리 장천을 나는 붕새”라는 뜻을 지닌 이 법호는 그의 일생을 예고하듯, 곧 세계불교를 향한 큰 날갯짓이 되었다. 교학과 수행의 두 바퀴 1936년부터는 서울 동대문 개운사 대원암에서 박한영 대강백을 스승으로 모시고, 사교과와 대교과를 마쳤다. 이 시절 그는 단순히 승려로서의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삼보에 귀의하며, 법왕의 큰 뜻을 기립니다. 거룩하신 초대법왕 일붕 서경보 존자 예하께서는 불법의 광명을 온 세상에 비추시고, 중생 구제와 인류 평화를 위하여 한평생 붕새의 날개로 구만리를 비상하셨습니다. 이에 담화총사는 존자 예하의 법맥과 사상을 잊지 않고 계승하기 위하여, 가을 보름 명절을 맞아 7편의 연재기획으로 그 삶과 가르침을 다시 봉헌하고자 합니다. 출가의 첫걸음에서 삼장법사의 위덕에 이르기까지, 세계불교 법왕으로 추대되시어 평화와 화합을 설하신 발자취는 오늘 우리 모두에게 길이 등불이 될 것입니다. 세계일화世界一花, 한 송이 연꽃으로 온 세상을 피어나게 하고자 하신 법왕의 서원은 지금 이 시대에도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이에 삼가 예하의 크신 업적을 기리며, 후세에 전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이번 연재를 올리오니, 독자 대중께서도 함께 뜻을 새기시기를 발원합니다. [글쓴이 담화총사] 1편. 세계불교 초대 법왕, 붕새의 날갯짓을 시작하다. 2편. 출가와 수행-제주 산방굴사에서 시작된 불법의 길 3편. 학문과 교단-교학과 수행을 겸비한 삼장법사의 길 4편. 세계로의 도약-한국 스님 최초의 미국행과 해외 포교 5편. 세계불교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옛날 한 마을에 농부가 있었습니다. 그는 새벽마다 들로 나가, 풀잎 위에 맺힌 맑은 이슬을 보며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해가 떠오르면 그 맑던 이슬은 금세 사라져 버렸습니다. 농부는 그 모습을 보며 늘 생각했습니다. “사람의 인생도 저 이슬 같지 않은가.” 어느 날 밤에는 하늘을 가르는 번개가 번쩍했습니다.눈을 감을 새도 없이 사라지는 그 섬광 앞에서, 농부는 다시 마음을 일깨웠습니다. “우리 삶 또한 저 번개처럼 짧고 덧없구나.”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이다. “모든 인연 따라 생겨난 법은 꿈과 같고, 환상과 같으며, 물거품과 그림자 같고, 이슬과 같고, 또한 번개와 같으니 이와 같이 관찰하라.” 이 가르침은 우리에게 두 가지를 전합니다. 첫째, 덧없음 無常무상을 직시하라. 이슬이 사라지듯, 번개가 꺼지듯, 우리의 생명도, 재산도, 명예도 오래 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집착하는 그 마음을 내려놓으라는 것입니다. 둘째, 현재를 소중히 하라. 이슬이 비록 짧지만, 그 순간에는 가장 맑고 아름답습니다. 번개가 비록 순간적이지만, 그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성라자로마을, 한센인을 위한 한국 최초의 구라사업기관으로 75년간의 여정을 걷다. 1950년 6월 2일,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직전 경기도 광명리 신기촌에 한 작은 요양원이 설립되었다. 이름은 ‘성라자로요양원’. 이는 성경 속 한센병 병자였던 ‘라자로’의 이름을 따 지어진 것이며, 한국 천주교 최초의 구라사업기관으로 무의탁 한센병 환우들의 치료와 자립을 목적으로 출발했다. 이 요양원을 세운 이는 미국 메리놀 외방선교회(M.M.)의 조지 M. 캐롤 몬시뇰. 그는 한국 사회에 소외된 이들을 위한 보금자리를 마련하고자 했고, 전쟁과 가난, 차별 속에서 버려졌던 800여 명의 한센인들이 그의 뜻에 따라 모여들었다. 이듬해 1951년, 마을은 현재의 경기도 안성시 보개면 오전리로 자리를 옮기며 본격적인 복지마을로서의 기반을 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1952년, 한 젊은 사제가 이 마을의 역사에 전환점을 가져온다. 이경재 알렉산델 신부(초대 원장)는 성라자로마을에서 30여 년을 헌신하며 한센인의 치료와 인권 회복, 자립 지원에 평생을 바쳤다. 그는 “마음이 먼저 치유되어야 몸이 낫는다”는 철학으로 의료·교육·신앙·문화 전반에 걸친 돌봄 시스템을
법왕청신문 이존영 기자 부처님오신날 축시"曇華總師 담화총사 作" 今此佳辰 如來降誕금차가신 여래강탄 오늘은 여래께서 자비의 빛으로 이 세상에 오신 날. 어둠 깊은 세상에 자비의 등불 하나 켜지니, 그 빛 따라 모든 생명에 희망이 스며듭니다. 세속의 고해에서 헤매던 중생들이 그 손길 하나에 안식을 얻고 그 미소 하나에 눈물을 씻습니다. 부처님, 이 작은 몸과 마음으로 어떻게 그 큰 은혜를 다 갚으리이까. 다만 오늘, 이 연등을 올리며 서원합니다. 고요히 피는 연꽃처럼 성냄 없이 살겠습니다. 자비를 삶의 등불로 삼아 가는 길마다 빛이 되겠습니다. 무명 속에서도 지혜로 깨어 있고, 혼탁한 세상 속에서도 맑은 향기 머금겠습니다. 불기 이천오백육십구년, 오늘, 이 봉축의 등불 아래 우리는 다시 태어납니다. 연꽃처럼 맑고, 달빛처럼 고요히, 부처님 따라 자비의 길을 걷겠습니다.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시아본사 석가모니불
법왕청신문 장규호 기자 | 청주에 위치한 벽사초불정사僻邪招佛精舍가 단순한 불교사찰을 넘어, 민족의 기억과 세계 평화를 품은 복합문화성지로 새롭게 부상하고 있다. 이곳은 북관대첩비 복제비, 세계불교 초대법왕 일붕 서경보 존자 기념관, 6·25 사진전, 고승 유작 및 미술작품, 세계 외교사진 전시까지 총망라된 공간으로 조성 중이다. 이 대역사의 중심에는 담화 이존영 이사장(북관대첩비 민족운동중앙회 이사장, 외교저널 발행인)이 있다. 철창 속 100년, 다시 국민 앞에 선 북관대첩비 북관대첩비北關大捷碑는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정문부 장군이 함경도에서 일본군 1만여 명을 격퇴한 ‘북관대첩’을 기념하여 1707년(숙종 34년) 세워진 것이다. 하지만 이 비는 1905년, 러·일 전쟁 당시 일본군 제2사단장 이케다 마시스케에 의해 강탈돼, 도쿄 야스쿠니신사 구석 철창 속에 1톤의 돌을 얹은 채 방치되는 수난을 겪었다. 이후 국제 불교계와 민족운동가, 문화유산 전문가들의 공동 노력, 그리고 담화 이존영 이사장의 외교적 설득과 협의를 통해, 2005년 비석은 반환되어 2006년 북한 길주군 본래의 자리에 복원되었고, 현재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보 제193호로 지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