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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법왕 일붕 서경보 존자님의 세계일화(4)

초대법왕 일붕존자님의 일대기 태몽에서 열반까지

법왕청신문 이존영 기자 | 초대법왕 일붕 서경보 존자님의 일대기 세계일화      

     

   

4. 마을의 훈장이 되다.     

 엉뚱한 질문을 자주 하여 스승을 곤란하게 만들던 경보가 15세가 되던 해에 서당의 훈장 선생님이 신경통으로 자리에 눕게 되었다. 자리에 눕게 된 스승이 어느 날 경보를 불러 서당의 훈장을 맡으라고 부탁했다.
 "경보야, 내가 몸이 아파 더 이상 공부를 가르칠 수 없게 되었으니 네가 나를 대신하여 서당을 끌어갔으면 좋겠구나." 
 "아니 될 말씀이옵니다. 어서 빨리 병을 떨치고 일어나셔서 저희들을 계속하여 배움의 길로 이끌어 주십시오. 스승님은 곧 일어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아니다. 내 병은 내가 안다. 다시 일어난다 해도 전처럼 너희들을 호통치고 가르칠 만한 힘이 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경보 네가 이 기회에 훈장을 맡았으면 한다."
 "스승님, 저는 아직 글도 짧고 나이도 어려 훈장을 맡을 수 없는 처지입니다. 제발 쾌차하셔서 저희들을 다시 가르쳐 주십시오." 
 "아니다. 내가 보기에는 네가 이미 나의 수준을 넘어선 것 같구나. 글공부는 나이로 하는 것이 아니란 것은 경보 너도 잘 알고 있지 않느냐?"
 "스승님, 저도 군사부일체를 스승님께 배워서 스승의 뜻을 제자가 따르지 않는 것이 도리에 어긋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오나 저는 아직 모든 것이 부족할 뿐만 아니라 때가 이르다고 여겨집니다. 또 가장 중요한 마음의 준비가 전혀 없는 상태입니다." 
 서당의 훈장을 경보가 맡아야 한다, 안 된다 하는 사제지간의 당부와 완곡한 거절이 몇 차례 오고가는 사이에 스승의 병세는 점점 더 나빠지고 있었다. 더 이상 서당의 훈장 자리를 비울 수가 없고 가까운 곳에서 자신을 대신할 훈장을 모셔올 수도 없다고 판단한 스승은 어느 날 서당의 학동들과 부모들을 한 자리에 불러 모았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병이 깊어 여러분들을 더 이상 지도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리저리 나를 대신할 훈장을 찾았으나 마땅한 분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나이는 비록 어리고 결혼도 하지 않은 총각이지만 글재주가 뛰어난 경보에게 훈장 자리를 물려주고자 합니다. 경보에게 배울 수 없다고 생각하는 학동이나 부모님이 계시면 나서서 그 이유를 말씀해 주십시오."
 반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주위를 둘러 본 스승은 학동들과 부모님들에게 다시 말했다.
 "지금까지 경보를 같이 배우는 친구로 알고 지냈지만 오늘 이후부터는 엄연한 훈장이니 각별히 대하도록 하십시오. 옛 부터 임금과 스승과 아버지는 같다고 했습니다."
 그동안 같이 공부했던 학동들은 이미 경보의 학문이 범상한 수준이 아니 란 것을 알고 있었다. 부모들도 인근에서 '천재가 났다'고 소문난 경보의 실력을 모를 리가 없었다. 이렇게 해서 경보는 15세의 어린 나이에 서당의 훈장이 되었다. 배우는 입장에서 가르치는 입장으로 변하자 경보의 몸가짐은 한결 의젓해졌다. 책임감과 자부심도 생겼다. 같이 장난치고 어울리던 학동들도 경보가 훈장이 되자 처음에는 어색스러워 '훈장님'이란 말을 안 하려 했으나 경보가 훈장으로서의 품위를 지키자 스승의 예우로서 대했다. 그러나 경보의 입장에서는 자신보다 나이가 10어살이나 많고 이미 결혼하여 자식까지 둔 사람이 섞여 있는 서당을 끌어나가기가 쉽지는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혼자 있지를 좋아하던 경보는 훈장을 맡게 되자 같이 어울릴 친구까지 잃게 되어 혼자 생각하는 시간이 점점 많아졌다. 아는 것을 다 가르치고, 그것도 부족하여 밤늦게까지 공부하여 하나라도 더 가르치려고 애쓰니 머리가 매우 무거웠다. 경보는 머리가 무거울 때마다 머리도 식힐 겸 해서 서당 주위의 나무 밑이나 한라산에서 발원하여 제주를 돌고 돌아 서귀포 앞바다로 빠지는 도순천을 자주 찾았다. 
 개구쟁이 시절 멱을 감고 뛰놀던 도순천은 유년기의 추억이 고스란히 살아 있는 곳이었다. 화강암과 현무암이 고루 바닥에 깔린 도순천은 부근 마을 소년 소녀들의 놀이터로, 여름이면 헤엄치고 물장난을 치던 곳이었고, 겨울이면 동백꽃이 곳곳에 피어 있는 '꿈의 강'이었다. 
 경보가 훈장이 되자 누구보다 기뻐하고 축하해준 사람은 그렇게도 아껴주시던 할아버지였다. 항상 변덕을 부리는 날씨 때문에 목숨이 위태로운 바다에서 평생을 보내며 쌓인 한을 장손이 대신하여 풀었기 때문이다. 바다에 나가 목숨을 걸고 고기잡이를 하거나, 밭일로 햇볕에 얼굴을 태우지 않고도 학동들의 부모들이 거두어 주는 학비로 살 수 있게 되었으니 얼마나 기뻤겠는가. 할아버지는 그런 경보가 대견스럽고 기특하여 가는 곳마다 칭찬을 늘어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