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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법왕 일붕 서경보 존자님의 세계일화(9)

초대법왕 일붕존자님의 일대기 태몽에서 열반까지

법왕청신문 이존영 기자 | 초대법왕 일붕 서경보 존자님의 일대기 세계일화

 

 

9. 비상하기 위한 붕새의 날개 짓 

 

 1935년 가을.
 경보 스님이 21세가 되던 해에 전진응 강백의 수제자가 전북 완주군 위봉사의 초청강사가 되어 그 곳을 떠났다. 강백을 따라간 경보스님은 그곳으로 떠났다. 그 강백을 따라간 경보스님은 그 곳에서 사미과와 사집과를 마쳤다. 이때 실제로는 전중에 있는 '송광사'에서 강원을 열었다.
 위봉사에서 첫 밤을 맞았던 날이었다.
 잠든 스님들 틈에서 살그머니 빠져나와 방 윗목에 있는 호롱불에 불을 켜고 화엄사에서 가져온 <화엄경 현담>이란 책을 꺼내 막 읽기 시작할 때였다. 밖에서 천둥치는 것 같은 소리가 들리더니 칠 흙 같은 밤이 대낮처럼 밝아졌다.
 "경보야, 자지 않고 공부하는구나."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예…." 
 벌떡 일어나 예를 갖추고 싶었지만 목이 막혔고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곧이어 다시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장자에 나오는 붕새다. 내가 날개를 펴면 태양빛도 가려진다." 
 깜짝 놀라 일어나보니 꿈이었다.
 “묘한 꿈이었구나. 붕새가 나를 찾아오다니….”
 경보스님은 이미 장자의 남화경에 나오는 붕새를 알고 있었다. 또 그렇게 큰 인물이 될 꿈을 남몰래 간직하고 있었다.
 “묘한 꿈이구나. 붕새가 나를 찾아오다니….”
 붕새는 이 세상에 성인이 나타날 때 그 모습을 보인다는 상상의 새로 환상의 길조라고 부른다. 그런 던 어느 날 위봉사 주지인 유춘담 스님이 전진응 강백 제자의 방을 찾아가 무엇인가를 논의하더니 경보스님을 불렀다. 
 "내 너를 제자로 삼고 싶어 그 강백에게 부탁했더니 쾌히 승낙하시더구나. 너의 생각은 어떠냐?"
 “…….”
 느닷없는 물음에 당황한 경보스님은 멈칫했다.
 "강백께 여쭈어보겠습니다." 
 강백께 경보스님이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냐고 묻자, 그 강백께서는 이렇게 말했다. 
 "네가 장래가 촉망되는 사람이니 자기가 맡아 크게 키우겠다니 어찌 거절하겠느냐."
 그렇게 하여 경보스님은 유춘담 스님의 법제자가 되었다. 유춘담 스님은 법문도 잘 짓고, 글씨도 잘 쓰고, 성질이 온순하면서도 신앙심이 깊고, 예의가 바른 경보스님을 제자로 삼아 큰 인물로 키워보려고 했던 것이다. 
 유춘담 스님은 경보스님에게 '일붕一鵬'이란 호를 내렸다(이후는 일붕一鵬 스님으로 쓴다).
 일붕스님은 위봉사에 도착한 첫날 밤 붕새의 꿈을 꾸고 춘담 화상께서 일붕이란 법호를 내리자 '기이한 일이다'고 생각했으나 '이것도 전생의 인연이려니'하고 여겼다.
 춘담화상은 제자들에게 까마귀, 오리, 까치 같은 새 이름으로 된 법호를 내리는 재미있는 스님이었다. 춘담화상의 각별한 관심 속에서 수행과 학문에 정진하던 중 위봉사가 살림이 어렵게 되어 강원을 계속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자 춘담화상은 일붕스님에게 학비를 마련해 주면서 서울 동대문구 개운사 대원암 박한영 강백을 찾아가 공부를 계속하라고 했다. 
 일붕스님이 박한영 강백을 찾아가 합장배례후 삼배를 올렸다.
 "어디서 온 학인인가?"
 박한영 강백이 물었다. 
 "완주 위봉사에서 왔습니다."
 "위봉사에는 전진응 강백이 계시지 않은가?"
 "절 살림이 어려워 강원의 문을 닫았습니다."
 "남이 장에 가니 덩달아 따라 간다는 식으로 대책도 없이 시작했나보군."    박한영 강백은 전진응 강백과 동문수학한 분인데 2만권 이상의 책을 읽어 살아있는 사전으로 불리던 당대 최고의 학승이었다. 체구의 위풍은 당당하지 않았으나 골격이 당당하였고 눈이 실눈이라 볼품없는 시골 노인 같았다. 그럼에도 노제봉, 전진응 스님과 함께 불교계의 3천자라 불리는 재주를 거쳤기 때문에 그 스님 밑에서 공부하는 것을 영광으로 여기는 학인들이 전국에서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일붕스님은 이곳에서 거처를 정하고 사교의 능엄경부터 공부했다. 이때 무엇을 물어도 막힘이 없는 박한영 스님께 불교뿐만 아니라 유교와 도교까지 두루 배울 수 있었다. 그렇게도 찾던 훌륭한 스승을 만난 것이다. 이곳에서 사교과와 대교과를 모두 마쳤다.
 박한영 스님은 일붕스님이 어려운 것을 묻고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아는 총명함을 보이자 ‘정말 좋은 제자를 만났다’고 하면서 하나라도 더 가르쳐주려고 애썼다. 일붕스님도 진심으로 탄복하고 박한영 스님을 따랐다. 
  "일붕이 나이는 어려도 대단하단 말이야"
 4년 여를 모시고 배우는 동안 박한영 스님은 가까운 사람들이 찾아 올 때마다 자랑스러운 듯이 인사를 시키면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일붕스님은 대원암에서 학문뿐만 아니라 박한영 스님의 청빈한 자세와 엄격한 계율을 동시에 배웠다.
 박한영 스님은 어린 나이에 머리를 깍은 동진출가를 한분이라 평생 여자의 손목 한번 잡지 않았고, 술과 고기는 물론 마늘과 파 같은 오신채도 먹지 않았다. 불교전문학교(동국대의 전신) 교장으로 있으면서 받은 봉급도 쓴 것은 책사는 데 쓰는 돈 뿐이었다. 그래서 책이 수만권 있었다.
 개암사가 시내에 있는 관계로 여자 신도들이 찾아와 버선이나 양말을 드리고자 절을 하려 해도 글씨를 쓰던지 책을 보면서 쳐다보지도 않았다. 
 "스님, 이것 좀 신어보세요." 
 "거기 그냥 놓고 가시오. 아무 때 신어도 내가 신을 것이니까…."
 "그래도 저희들이 보는데서 한번 신어보셔야지요. 그래야 맞는지 알고 다음에는 몸에 맞도록 해오지요."
 "그렇게 주기가 아까우면 도로 가겨가시오."
 언젠가는 늙은 여신들이 와서 절을 한다고 하였다. 그래도 박한영 스님은 안경 너머로 본체만체 힐끔힐끔 보고는 몸을 뱅뱅 돌렸다. 
 "앞을 볼래요? 뒤를 볼래요? 옆을 볼래요? 보고 싶은 곳 다보고 가시오."
 마치 어린애처럼 앞을 보이다, 뒤를 보이다 하면서 방안을 돌았다. 이러니 여자들이 가까이 갈수 없었다.
 더 특이한 것은 냄새도, 맛도, 몸치장 할 줄도 모른다는 점이다. 국을 먹다가 옆 사람이 짜다고 하면 물을 더 붓고 싱겁다고 하면 간장을 더 넣는다. 잠도 바지저고리를 벗지 않고 언제나 입은 그대로 잔다. 세수는 비누칠을 하지 않고 찬물에 손을 담갔다가 한두 번 쓱쓱 문지르면 끝이다.
 육당 최남선 선생이나 춘원 이광수 선생 같은 분들이 떠받들었던 석학이요 거장이었지만 자기자랑을 한 번도 하지 않은 겸손한 분이었다. 천진하기가 그지없어 화장실에 가면서 곶감을 먹기도 했다. 이런 한국 최고의 선학인 박한영 스님께서 일붕스님을 가장 아끼는 제자로 삼았으니 얼마나 큰 발전이 있었겠는가.
 오랫동안 가르치고 지켜본 박한영 스님은 일붕스님의 그릇이 보통이 아니라고 판단해서 자신이 직접 풀이하고 내용을 써 넣은 귀중한 책을 모두 물려주고 강원도 평창군 오대산 월정사 불교전문 학원 강사로 가도록 주선했다. 월정사에서는 하루가 급하니 빨리 오라는 전보와 공문이 왔다.
 일붕스님은 위봉사로 내려가 춘담스님께 기쁜 소식을 알리고 포광스님께 의식수행을 6개월간 공부하고 나서야 월정사로 떠났다. 그냥 가르쳐도 되었지만 일등 강사가 되려면 의식수행을 꼭 마쳐야 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포광스님은 전진응, 박한영 스님보다 후배지만 그분들이 ‘지리산의 산신령이 사람으로 변신하여 내려온 것이 아니냐’고 감탄할 정도로 영리한 분이었다. 포광스님은 후에 동국대 총장을 했던 분인데 턱이 거의 없어 '무턱'이란 별명으로 통했다. 월정사 내에는 적멸보궁이라는 특이한 절이 있다. 보통의 절에는 적멸보궁이라는 특이한 절이었다. 보통의 절에는 대웅전에 부처님을 모시는데, 적멸보궁의 법당에는 불상은 없고 탁자만 놓여 있었다. 신라 때 자장율사가 중국에서 모셔온 부처님의 정골 사리를 모셔와 깊은 땅 속에 묻고 그 위에 적멸보궁을 지었기 때문에 법당에 불상을 모시지 않은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월정사' 적멸보궁, '통도사' 영월 사자산 '법흥사', 정선 '정암사',설악산 '봉정암' 등의 다섯 곳에 적멸보궁이 있으며 이를 오대보궁 이라고  한다. 
 당시 전국에서 제일 유명한 선원인 '월정사' 상원암에는 방한암 스님이 조실로 있었다. 백발노인이라 신선 같은 느낌을 주는 방한암 스님은 어린아이에게도 높임말을 쓰는 자비로운 분이셨다. 그러면서도 일제의 조선 총독부 총독에게는 반말로 호통을 치는 멋진 스님이었다. 
 이곳에서 일봉 스님은 27세의 나이로 원장을 맡아 학인들을 지도 했다. 학인들을 가르치면서 수행에 힘쓰던 어느 날 인연을 끊고 살았던 제주의 이씨 부인이 찾아왔다. 이씨 부인은 전국을 돌며 수소문 하여 겨우 월정사까지 찾아온 것이다 .
 "스님, 서경보스님이 이 절에 계십니까?"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한참 후에 나타난 스님이 다시 물었다.
 "어디서 오셨습니까?"
 "고향 제주에서 왔다고 일러 주십시오." 
 이씨 부인은 일붕스님이 반가움을 참지 못해 금방 뛰쳐나올 줄 알았다. 다시 나타난 스님의 대답은 차가웠다.
 "오늘 저녁에는 급한 일이 있어 만날 수 없으니 가까운 토굴에 가서 편히 쉬시고 나면 내일 아침에 뵙겠답니다." 
 새벽 예불을 마친 일붕스님이 이씨 부인을 찾았다.
 "멀리서 오시느라 고생이 많았소. 아버님과 어머님 모두 안녕하신가요?"
 "예, 안녕하십니다. 하지만, 하지만…. 어머님은 벌써 3년 전에 세상을 떠나셔서 그간 소상과 대상이 다 지나갔습니다…." 
 "아! 어머니, 어머니…."
 "전보를 치려해도 주소를 모르겠고, 편지를 보내도 다 되돌아와서 알릴 방법이 없었습니다." 
 일붕스님은 그 자리에 엎어져 이성을 잃었다.
 "아! 어머니! 어머니…! 불효자식 경보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찾아 뵌 지 5년도 못되어 세상을 떠나시다니…. 아직 젊으신 어머니가 그리도 일찍 떠나실 줄 몰랐습니다. 이 죄를 어찌해야 하오리까…."
 일붕스님은 소리 내어 엉엉 울었다.
 이씨 부인도 울고, 토굴을 지키던 노파도 울고, 옆에 있던 학인도 눈물바다가 되었다. 일붕스님의 어머니는 1939년 봄에 시름시름 앓다가 여름철에 병세가 악화되어 세상을 떠난 것이다. 시간이 흘러 마음을 진정시킨 일붕스님은 이씨 부인에게 물었다.
 "그런데 어찌하여 이곳까지 찾아 오셨소?"
 "아내가 남편을 찾은 것이 잘못된 일입니까?" 
 "그렇지만 출가한 남편이 아니오."
 "중이 아니라 부처님이 되었더라도 돌아가시면 제사를 맡아 지낼 제가 찾아온 것이 잘못이란 말입니까?"
 "다 옳은 말씀이오. 그러나 나는 이미 속세를 떠나 수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전엔 몰랐는데, 오다가 보니 어엿한 가정을 지키면서 중노릇 하는 사람도 많더군요. 정 중이 좋다면 그렇게라도 하면 될 것이 아닙니까?"
 "나는 그런 중이 되고 싶지는 않소. 원대한 꿈이 있어 출가한 사람이니 그렇게 알고 돌아가시오."
 얼음장처럼 차가운 표정과 흔들리지 않은 말씨를 보고 이씨 부인은 ‘부디 성공 하십시오’ 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일붕스님은 돌아가신 어머니를 위해 지장기도를 백일 간 지성으로 드렸다. 백일기도를 마치던 날 이런 꿈을 꾸었다.
 “너의 어머니가 비록 농사일을 하였다고는 하나 항상 바다의 고기를 많이 죽인 죄로 장수하지 못하고 일찍 세상을 떠나 좋은 곳으로 못 갔다. 그러나 네가 지극한 정성으로 천도기도를 드린 공덕으로 아주 좋은 곳으로 보냈으니 그리 알고 수행에 정진하거라….”
 월정사 상원암에는 조선조 세종대왕 나병(한센씨병·문등병)이 걸려 문수보살님께 기도를 하다가 몸이 너무 가려워 아무도 몰래 냇가에서 옷을 벗고 목욕을 했다. 그때 동자승을 만났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세조가 옷을 벗고 목욕을 시작하자 난데없는 동자승이 나타났다.
 "처사님, 제가 몸을 문지르고 씻겨 드릴까요?" 
 "그래라." 
 동자승은 달려들어 온몸을 깨끗하게 씻고 문질러 주었다. 그러고 나니 기분이 상쾌해 지더니 종기가 한꺼번에 없어졌다.
 "아이야, 고맙구나. 그러나 누구를 보던지 나의 더러운 몸을 낫게 했다고 말하지 마라." 
 "저야 꼭 지킬 테니 처사님부터 오대산에 오셔서 문수 동자를 만났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이런 말을 주고받고 나서는 홀연히 사라졌다.
 세조는 병이 완쾌된 뒤 자기 눈으로 본 모습을 되살려 조각공에게 나무에 새기도록 하여 법당에 모셨다. 이 조각 문수동자상은 법당에 모셔져있다. 일붕스님도 오대산에서 기도정진 중 문수 동자를 두 번이나 만났다.
 처음에는 가을에 머루 다래를 따려고 깊은 산속에 들어갔다가 길을 잃고 헤메다 만났다. 
 "스님께서 어쩌자고 이곳을 들어왔나요? 누구든지 여기에 들어오면 살아 나갈 수가 없는 곳입니다."
 문수동자가 손목을 힘껏 끌고는 어디론가 순식간에 데리고 갔다. 그러더니 사람들이 오가는 산길을 가르쳐 주었다. 
 "이길 만 따라 내려가십시오!"
 "너는 어디로 가느냐?"
 "제 집은 상원암이니 그곳으로 갑니다."
 작별인사를 마친 동자는 사라지고 없었다. 소리를 쳐서 불러 보낭도 대답이 없었다.
 두 번째는 무서운 독감이 걸린 겨울에 만났다. 
일붕스님은 지독한 감기에 걸려 체온이 39도에 서 40도까지 올라가 몸이 불덩이처럼 뜨겁고 입이 말라 인사불성이 되었다. 이때 동자승이 나타났다. 끙끙 앓고 누워 있는데, 병실로 열 살 쯤 된 동자승이 들어왔다.
 "스님, 제가 머리를 만져 드릴까요?"
 "그래라"
 동승은 고사리같은 손으로 머리를 만지고 가슴과 팔다리 등 곳곳을 만져 주는데, 어찌나 시원한 지 날아갈 것 같았다. 기분이 좋아 스르르 잠이 들려하는 순간이었다.
 "스님, 그럼 저는 우리 스님이 부르셔서 갑니다. 안녕히 계세요"
 동자승은 문을 열고 나갔다. 
 가볍게 일어난 일붕스님이 예전에 보지 못한 아이라 다시 문을 열고 물어보았다.
 "10세 전후의 사미승이 왔느냐?" 
 물었더니 아무도 온 이가 없다고 했다.
 월정사시절 일붕스님은 박한영 스님과 함께 가장 존경하는 방한암 스님의 가르침을 받았다. 일붕스님이 방한암 스님께 합장배례후 무릎꿇고 물었다.
 "스님, 일생을 두고 좌우명이 될 수 있는 법구 한 마디를 일러 주십시오"  .
 방한암 스님은 즉시 대답했다.
 "원장 스님, 호가 무엇이지요?"
 "일붕 입니다." 
 "붕새는 구만리장천을 주름잡아 나는 큰 새가 아닙니까?"
 "예,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큰 새와 같이 세계평화와 호국안민을 위하여 큰 뜻과 큰 안목을 가지시오." 
 그러고 나서 서산대사의 시를 일러주었다.
 
 아무리 이름난 호걸들도 
 초파리 때가 초항아리에 나는 듯하고 
 아무리 큰 나라의 도시들도 
 개미떼가 흙봉우리를 쌓아놓은 듯하다. 창 아래 밝은 달 
 청허한 베개 위에 
 끝없는 솔바람 그 소리 시원하여라. 

 일붕스님은 방한암 스님이 들려준 좌우명을 꼭 지켜 '천군만마 앞이라도 결코 물러서지 않은 굳센 호국정신을 거침없이 펼치고 세계 어디를 가든지 죽음과 삶을 뛰어넘는 애국심으로 국위를 선양 하겠다'는 맹세를 했다. 한편으로는 가르치던 방한암 스님께 지도를 받고 한편으로는 학인을 가르치던 일붕스님께 포교왕 이란 별명을 듣던 김태흡 스님이 해외로 나가 공부를 더하라는 권유를 했다.
 "일붕스님은 이제 전국에 이름을 날린 유명한 강사가 되었으니 외국에 나가 견문을 넓히는 것이 어떨까요?"
 "옳으신 말씀입니다만. 외국에 구태여 나가지 않더라도 보다 전문적으로 불료를 연구하면 되지 않을까요?"
 "그것도 방법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같은 불교라도 멀리 나가서 폭넓은 공부를 한다면 지금보다 완전한 자격을 갖추지 않겠습니까?"
 그 말을 듣고 보니 출가 전에 신학문을 배우고 싶어 했으나 할아버지께서 왜놈의 종살이를 하려느냐고 말려 꿈이 무산된 것이 떠올랐다.
 “그렇다.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는가. 내 꿈이 원래 한국 최고의 학승이 되는 것이 나이라 세계 최고의 인물이 되는 것이 아니었던가.”
 마음이 정해지면 꾸물거리지 않고 실천에 옮기는 성격을 가진 일붕스님은 당장 일본어 책을 사다가 남모르게 읽고 외웠다. '왜 일본어를 미리 배우지 않았던가' 하고 후회를 하기도 했으나 소용없는 후회라고 여겨 빨리 잊었다.
혼자 하다가 모르는 것이 나오면 서울에서 휴양하러 온 대학생에게 물어 문제를 풀었다. 모르면서 아는 체 하는 것보다 모르는 것은 뭐든지 물어서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이미 깨달은 일붕스님은 동생 같은 대학생에게 귀찮을 정도로 묻고 또 물었다.
 그러나 나이 30세가 넘어 한 번도 배운 일이 없는 남의 나라 말을 혼자 익힌다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그래서 아예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외워버리기로 결심했다. 한마디로 일본어에 미친 사람이 된 것이다. 혼자 있으면 소리 내어 읽고 말하다가 누가 있으면 입속으로 중얼중얼 연습했다. 일붕을 보는 주위 사람들은 갑자기 머리가 이상해진 것이 아니냐는 말이 나왔다. 하도 열심히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6개월을 공부하자 쉬운 대화는 할 수 있게 되었다. 세상을 덮는 날갯짓을 한다는 붕새가 날개를 달려고 애쓰는 모습이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애쓴 보람이 있어 훨훨 날수는 없어도 땅에 떨어지지 않고 겨우 날 수 있는 날개를 단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