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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법왕 일붕 서경보 존자님의 세계일화(13)

초대법왕 일붕존자님의 일대기 태몽에서 열반까지

법왕청신문 이존영 기자 | 초대법왕 일붕 서경보 존자님의 일대기 세계일화 저자 담화총사

 

 

13. 배우며 가르치며 

 

일본어를 다 배우기도 전에 일붕 스님은 1944년 31세의 나이로 일본으로 떠나게 되었다.
'월정사' 이종욱 주지스님이 일본 경도의 유종묵씨를 소개해주며 "이왕 갈려면 하루라도 빨리 떠나라"고 독촉했기 때문이다. 학비는 이종욱 스님이 도와 주었다. 
부산으로 내려가 관부연락선을 타고 현해탄을 건넜다. 유씨의 주선으로 들어간 대학은 임제종 묘심사 경내에 있는 경도의 임제대학 전문부였다. 그곳에서도 재능을 인정받아 조교로 일하기도 했다.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조국이 해방되자 일붕 스님은 '더이상 일본에 머무를 이유가 없어' 서둘러 귀국했다.
서울로 와보니 대학원은 아직 안 생겨 대학 밖에 없었다. 그래서 일붕 스님은 '공부처럼 즐거운 것이 없는데, 4년만 더하자'고 생각하고 1946년 동국대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동국대에는 권상로, 김영수, 김잉석, 김동화, 등의 쟁쟁한 교수진이 계셨다. 이때 일붕 스님은 동대문 밖 창신동 '안양암'의 포교사로 있으면서 학교를 다녔다.
'안양암'의 이태준 주지스님은 일봉 스님을 여러 가지로 도와주신 분이다. 일봉 스님이 학생의 신분으로 <불교입문> <불교학 개설> <석가여래와 그제자전> < 한국불교 역사> 등을 저술하여 학계의 관심을 끌 수 있엇던 것도 이태준 스님이 도왔기 때문에 가능했다. 
일본에서 간접적으로나마 유렵과 아메리카의 선진문물을 알개 된 일붕 스님은 '앞으로 영어를 모르면 아무 것도 못한다'는 것을 깨달아 밤이면 영어를 가르치는 학원에 나가 ABC...부터 배우기 시작했다.
영어를 배우기느 일본어보다 더 어렵고 피눈물 나는 과정이었지만 창피하다거나 부끄럽다는 마음을 룧 갖지 않았고 열심히 공부 했다.
지금은 스님들이 영어를 배우는 것이 일반화 되었지만 그때만 해도 머리를 깎고 가사장삼을 걸친 스님이 혀꾸부라지는 영어 발음을 연습하고 스펠링을 익히는 분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일붕 스님이 학원에 나가 막내 동생 또래의 어린 학생들과 같이 영어를 배우는 것이 하나의 구경 거리였다.
어떤 여학생들은 일붕 스님이 나타나기만 하면 영어 공부는 뒷전으로 돌리고 키득거리며 웃기도 했다. 
1950년 동국대를 마치자 전북대와 원광대에서 불교철학과 윤리학을 강의 했다. '월정사'에 가기전 식수행상을 가르치고 동국대에서도 불교를 가르쳤던 김포광 선생님이 추천한 것이다. 
3년 뒤에는 부산대와 해인대학으로 자리를 옮겨 학생들을 지도하다가, 1956년부터 동아대 철학과 주임교수를 지냈다. 이때 부산 온천동의 금강사와동래의 법륜사 포교사를 겸직하였다. 
그 뒤 해동고등학교 교장을 지내면서 해동불교역경원을 열어 어려운 불경을 우리말로 옮기는 작업을 계속하시는 한편<해동법륜>이라는 잡지를 펴내기도 하였다.
일붕 스님이 우리나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사이 세계의 불료국들은 국제기구인 세계불교우의회르 조직하여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일붕 스님은 네팔에서 열리는 4차 대회에도 초청을 받았으나 여러 가지 사정이 생겨 참석하지 못했다. 1958년 5차 대회는 태국의 서울 방콕에서 열리게 되어 일붕 스님을 포함한 3명의 한국 대표를 뽑았으나 참가할 돈이 없어 종정과 총무원장 스님만 나가게 되었다. 
국제회의에 참석하고 해외 포교를 하기위해 열심히 영어를 공부하고 있던 일분 스님은 매우 안타까웠다. 
그래서 일붕 스님은 밤을 세워 문수보살과 관세음 보살에게 '우리 한국 불교를 세계에 소개하고 포교하고 싶어 꼭 참석하고자 하오니 부디 자비를 베푸소서' 하는 기도를 드렸다. 그러던 날 새벽 꿈에 문수동자가 학을 타고 내려왔다.
"스님, 스님도 허공을 날고 싶습니까?"
"날고야 싶다만 날개가있어야 날 것 아니냐?"
"지금 제가 호공에서 학을 타고 내려오지 않았스니까?"
"그것은 나도 보았다."
"제가 타고온 이학을 스님께 드릴테니 날으십시요."
일붕 스님은 문수 동자가 시키는 대로 올라타니 학이 너울너울 춤을 추듯 하늘로 날아갔다.
그때 종소리가 들려와 눈을 떳다. 꿈이 었다.

허전했으나 '오늘 안으로 좋은 일이 생길 징조'라고 기대하였다.
날이 밝자 아세아재단에서 누가 찾아왔다. 
"한국에서 유명한 강백이고 많은 저서를 내신 저명한 붉학자께서 이런 세계대회에 경비 때문에 못가신다면 외겠습니까? 저희가 모든 경비를 지불할테니 떠나실 준비를 하십시오." 
뿐만 아니라 태국 방콕 시립 병원으로 보내는 "우리한국 대표부로 가는 서경보가 기후 풍토 때문에병이 생겼을 경우 귀 병원에 입운시켜 치료해 주십시오. 치료비는 우리 재단에서 지불하겠습니다"는 편지까지 가져 왔다. 11월22일 낮 12시 여의도 비행장에서 하동산 종정, 이청단 총무원장, 일붕 스님 등 3명은 종단의 대표자격으로 비행기 크랩에 올랐다. 나머지 4명은 개인 자격이었다.
일붕 스님을 포함한 한국 대표들은 최초의 국제회의에 참석하여 한국을 새롭게 인식시키고 돌아왔다.
제5차 세계불교우의회의 참석은 일붕 스님이 해외 포교의 문을 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각국 대표로 참가한 사람들과 만나 서로를 소개하고 알리는 기회가 되었기 때문이다.
일붕 스님이 동아대로 돌아와 철학과 주임교수를 맡고 있을 때 미얀마의랑군에 상가대학에서 교환교수로 오라는 초청장이 왔다. 일붕 스님은 붕새가 날개짓을 할 수 있느 기회라 여겨 초청에 응했다. 
미얀마에 도착하자 상가대학측은 일붕 스님을 랑군의 재벌인 우덴씨를 쓰도록 특별한 친절을 베풀었다. 이 서재에는 미국인 아난다 박사, 일본인 오까다 박사, 인도인 고벤디 교수, 서독의 대학교수 등이 자주 모여 불료에 관한 대화를 즐겼다.
불교국가인 미얀마는 외국인 일지라도 머리를 깍은 비구승 교수에게는 자기 나라의 스님과 같은 생활 양식을 요구 했다. 때문에 불교 철할을 강의 하여야되고 맨발로 거리를 걸어야만 했다. 또한 오후 불식이라 해서 아침과점심만 먹고 저녁은 굶어야 했다.

풍습에 익숙하지 않은 일붕 스님으로서는 더 없는 고행이었다. 맨발로 드뜨거운 거리를 걷자니 발바닥에 화상을 입어 피가 나고 고름이 흘럿다.
저녁을 갑자기 못먹게 되니 배가 고파 배를 움켜쥐고 잠들어야하는 것도 보통 고역이 아니었다. 독충에 물려 쓰리고 아프기도 했다.
일붕 스님은 속으로 '이것이 교환교수하러 온 것이 아니라 고행교수 하러 온 꼴'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조국으로 돌아간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만약 도중에 돌아간다면 '한국의 스님은 엉터리'라는 비웃음을 들을 것 같았다. 갖가지 어려움을 참고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일붕 스님이 간절히 기도하자 문수 동자가 두 번이나 도와 주었기 때문이다. 
미얀마는 불교사원이 많다는 점 외에도 일반인은 일부다처제가 인정된다. 언제나 스님들은 부채와 우산을 갖고 다닌다는 것과 새해 첫날 길가는 사람에게 물세례를 퍼붓는다느 점도 재미있다.
일부다처제라 한 남자가 2∼3명의 여자를 데리고 살아도 여자들 끼리 절대 싸우지 않는다. 성씨는 20세 까지는 몽, 20세부터 40세까지는 고, 40세 이상은 우라고 구별한다. 아니에 따라 성이 변하는 것이다. 그들은 비가 오나 안 오나 우산과 부채를 가지고 다니는데, 일반인은 검은 색을 쓰고 스님들은 누런 색을 쓴다. 새해 첫날에는 대통령이 지나가도 거침없이 물세례를 퍼붓는다. 남녀 구별없이 치마를 입는 것도 흥미롭다. 스님들은 모든 것이 무료다.
일붕 스님은 미얀마에서의 교환교수를 마치고 서독의 함부르크대학 교환교수로 초청되어 1962년 서독으로 건너갔다. 미얀마에 와 있던 서독의 교수가 1년간 연구비를 지급하기로 한 것이다. 처음에는 서독학술연구교환회 총재를 통해 6개월간만 연구비를 지급하겠다는 조건이었지만 일붕 스님의 연구열에 감명을 받았는지 6개월을 연장시켰다.
함부르크에서는 장삼에 황금빛 가사를 맨 한국 고유의 승려복이 이국적으로 보였는지 가는 곳마다 모델이 되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런가 하면 주로 소승불교가 진출하여 포교사업을 한까닭에 대승불교 이론을 강의하자 많은 사람이 몰려 들었다.
서독에서 교환교수를 마치고 귀국하려 하자 스리랑카의 비죠다야 대학에서 또다시 간곡한 요청을 했다. 불교 총무원장 데아라키타 씨가 "스리랑카에 오셔서 한국 불교와 대승불교를 연구하는데 큰 도움을 주십시오" 하면서 끈질기게 부탁한 것이다.
스리랑카에서는 대학 강의도 많이 했지만 신자들에게 직접 설럽을 하는 기회도 자주 가졌다. 
스리랑카의 교환교수 임기가 거의 끝날 무렵 영국 불교총무원장 안난다 도티씨가 함부르크 대학에서의 인연을 말하면서 런던 대학 교환교수로 꼭와야 한다고 했다.
영국으로 가보니 세계적인 명성을 가진 옥스퍼드대학과 케임브릿지 대학까지 불교 강좌를 두고 있을 만큼 불교에 대한 연구가 활발했다.
영국은 지식인들이 예불, 독경, 기도 등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고 학술적인 부분을 중요시하고 있었다.
일붕 스님은 영국에서 교환교수의 본분보다 포교사의 역할을 더많이 했다. 일봉 스님이 강연을 하면 교회의신자들보다 많은 청중이 몰리는 인기를 누렸다. 일붕 스님의 막힘없는 강연을 듣고 못나 신부가 불교로 종교를 바꾸는 일까지 있었다. 
영국에서는 일붕 스님의 인기에 힘입어 불교서적이 베스트 셀러가 되는 기적같은 일이 일어나기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