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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법왕 일붕 서경보 존자님의 세계일화(15)

초대법왕 일붕존자님의 일대기 태몽에서 열반까지

법왕청신문 이존영 기자 | 초대법왕 일붕 서경보 존자님의 일대기 세계일화 저자 담화총사

 

 

15. 새로운 곳을 향하여 

 

1964년.
한국의 대표적인 전통 사찰인 불국사 주지 자리를너무 바빠 더 이상 못하겠다고 사양한 일붕 스님은 미국으로 건너갈 준비를 했다.
우리나라가 후진국에 속하던 60년대 초에 대통령이나 외무부 장관보다 거많은 나라를 돌아 본 일붕 스님은 이렇게 생각했다.
'세계의 중심이 대서양 일대의 유럽에서 아메리카 대륙으로 움직이고 있다. 세계의 중심이 옮겨간다는 것은 문명이 움직이는 것이다. 이는 한 국가나 한 개인이 막아서 될 일이 아니다.
더구나 경제발전이 늦은 후진국에서는 국제조류를 재빨리 읽어 거기에 맞도록 대처하는 슬기를 사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영원히 약소민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강대국의 속국이 될 것이다.
강대국이 되려면 강대국을 배우고 알아야 된다.
괜한 고집을 부리다가는 망신만 당하고 손해만 보게 된다.
어서 빨리 미국으로 건너가자.'
보통 사람 같았으면 명예가보장되는 대학 교수와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절인 '불국사' 주지를 맡고 있었기 때문에 그 정도에서 만족했을 것이다. 
일붕 스님은 그렇지않았다. 항상 보다 새롭고, 보다 향상된 길을 찾았다. 길을 찾았다고 생각되면 그 어던 고난을 격더라도 꼭 실현시키고자 노력했다. 
또 대부분 꿈을 실현 시켰다. 일붕 스님은 말한다.
"언제나 꿈과 희망을 가져야 합니다. 희망이 없는 삶은 이미 죽은 것이나 같습니다.
특히 어린이들은 원대한 꿈과 큰 이상을 가져야 합니다. 역사에 빛을 남긴 인류의 위대한 스승들은 다같이 어린 시절에 가졌던 꿈을 실현시킨 분들입니다.
민족도 마찬가지입니다.꿈과 희망을 잃은 민족은 죽은 민족입니다. 우리한민족이 수많은 외침을 받았어도 굴복하지 않겠다는 용기와 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일붕 스님이 이렇게 외칠 때 우리나라는 제1차경제개발5개년계획을 힘차게 추진하고 있을때였다.
바라던 기회가 왔다.
미국 콜롬비아대학에서 교환교수로 초청한다는 연락이 온 것이다. 1년 기한으로 출국했으나 캘리포니아 대학과 하와이 대학에서 머물게되었다. 그동안 한국어, 동양학, 비교종교학, 불교철학 강좌를 맡아 강의를 하면서 포교에 힘썼다.
미국에 도착한 즉시 일분 스님은 미국 불교계를 둘러 보면서 한국 불교의 씨앗을 뿌릴 방법을 알아보았다. 
당시 미국에는 스리랑카, 일본, 자유중국,몽고등에서 불교를 포교하고있었다. 우리 한국의 불교는 아예 싹조차 자라지 못한 불모지라는 것도호가인되었다.
원래 포교를 위해 미국에 건너간 것은 아니었지만 미국 불교계의 실정을 알고나자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이미 다른 나라들은 본국으로부터 재정적인 뒷받침을 받아 사원을 세우고 신자 수를 늘려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일본은 스즈끼 같은 불교학자가 '선'에 관한 영문서적을 많이 낸 데 힘입어 왕성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심지어 중국과 한국이 '선'으로 읽고 쓰는 말을 '젠'이라는 일본식 발음으로 퍼뜨려 미국인들이 '선'이라면 몰라도 '젠'이라고하면 알아들을 정도가 되었다.
이런 상황을 본 일붕 스님은 이렇게 다짐했다.

'일본은 우리 민족에게 거의 모든 것을 배워갔다. 불교는 우리가 고스란히 가르친 것이다.
그런데 우리에게 불교를 배운 일본은 서방세계에 우리보다 먼저 불교를 포교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생각할수록 부끄러운 일이다. 
그러나 지금부터라도 열심히 하면 곧 따라잡고 앞설수도 있다.
나는 동남아와 유럽의 명문대학을 모두 돌면서 교수를 했던 사람이 아닌가. 또 우리나라의 어린이들에게는 언제 어떤 경우에도 힘을 잃지 말고 용기를 가지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늦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바로 시작하면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다.
무엇보다 우리는 저력을 자랑하는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민족이 아닌가.' 객관적으로 비교해도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일본인 학자들은 일붕 스님과 비교도 안되었다. 
그렇지만 그들은 몇 십년을 빨리 시작했고 그 동안 무시 못할 만큼의 탄탄한 포교실적도 쌓았다. 
그 넓고 넓은 미국 땅에 단 한 개의한국 절도 없을 때 일본 사람이 지은 절은 수도 헤아리기어려울만큼 많았다. 가는 곳마다 일본의 절이 있었다. 불교학술단체도 대부분 일본인이 만들고주도하는 것들이었다.
한국 불교는 다른 나라들이 해외로 눈을 돌릴 때도 계속 국내에만 머물러 있었다. 해외로 진출하기는커녕 불교신자가 이민가서도 참배할 교포용 법당 하나도 마련하지 못했다.그래서 어쩔 수 없이 다른 종교로 바꾸는 실정이었다.
그래서 일붕 스님은 고민을 거듭했다. 무슨 뾰족한 수가 없을까를 계속 찾았다. 
이러는 사이에 밝고 맑던 일붕 스님의 얼굴에 걱정이 서렸다.한번 하기로 마음먹은일을 포기하기는 싫고, 확실한 바업은 떠오르지 않았디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일붕 스님은 무릎을 탁 치면서 일어났다.
'옳다. 바로 그거야.'
교포들이나 동양인을 상대로 한국의 불교를 알리기에 앞서 미국사회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을 먼저 신자로 만들자는 아이디어가 떠오른 것이다. 
본격적인 활동은 캘리포니아 대학에서부터 시작했다.
돈을 절약하려고 잠은 외국인 교수를 위해 캠퍼스 안에 마련해준 아파트에서 자고 아낀 돈을 모아 일반 가정집의 전세방을 얻었다.
집 앞에는 대패질을 한 판자에다 먹으로 <일붕선원>이라고쓴 간판을 붙였다.
미국 땅에 한국인이 세운 최초의 선방은 이렇게 일붕 스님의 사비로 탄생했다.
어디를 둘러 보아도 네온사인이 번쩍이고 빌보드간판이 하늘을 가릴 것처럼 솟아있는 거리에서 조그마한 나무에 먹글씨로 쓴간판을 본 미국인들은 매우 신기하게 느꼇다. 
첫 제자는 대학을 마친 완델 와그너란 사람이다.
그는 일붕 스님이 학교 강의가 끝나면 곧바로 선원으로 와 한국의 선불교아 좌선을 설법하는 데 감동을 받아 제자가 된 미국인이다. 일붕 스님은 그에게 '도심'이란 한국식 불명을 내렸다. 그는 비구승이 되어 금주와 금연을 실천하는 스님이 되었다.
일붕 스님의 예상은 적중했다. 와델 같은 지식인이 한국 불교를 믿게 되자 순식간에 수백 명의 신자가 생겼다. 나중에는 하도 사람들이 들끓어 집 주인을 피해 다니는 즐거운 비명도 지르게 되었다.
이때 일붕 스님이 성공한 까닭은 한국 불교의 장점을 일본 불교와 비교하는 설명을 유찬한 영어로 잘 했기 때문이다. 즉 지나치게 형식에치중한 일본 불교보다 내면적인 수양이 중요하다고 믿는 한국 불교가 자유로운 생각을 가진 미국인들에게 쉽게 접근한 것이다.
일붕 스님이 이 시기에 얻은 제자들은 후일 한국 불교를 미국 전역에 전파하는데 있어서 없어서는 안될 보배같은 역할을 했다.
유진 와그너 씨는 '법인'이란 불명을 받은 사람으로 미시간 대학 재학 중에 불교를 믿기 시작하여 동남아 각국을 돌며 수도생활을 한 사람인데, 미국 불교 승단장을 맡고 있다. 네빌 와릭 씨는 하와이에서 출발했으나 현재는 샌프란시스코에서 한국불교를 포교하고 있다. 막스 씨는 심리학을 전공한불교학자로 '법심'이란 불명을 가졌다. 루이스와 호르비츠 씨는 각각 '도성' '도향' 이란 불명을 받은 여성들인데, 비구니로서 여성 포교에 큰발자취를 남겼다. 
교수 자격으로 미국에 간 일붕 스님이 놀라운 성과를 거두자한국에서는 정식으로 최초의 해외 포교사 자격을 주었다. 잠시 귀국했던 일분 스님은 다시 믹구 필라델피아 주립 템플 대학의 종교학과 주임교수로 초청받았다. 대학에서 연구와 강의를 하면서도 포교에 힘쓰던중 기적같은 일이 일어났다.
일붕스님을 존경하고 따르던대령출신 스탠피셔씨가 신자들이 늘어나도 모두 받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보다가 자기 땅 11만평을 기증한 것이다. 세계 중앙선원 선센타를 지으라고 내놓은 이 땅은 버어지니아주 서부, 뉴욕, 워싱턴의 중간지점에 위치한 스푸르스런 산인데 경치가 유명한 곳이다.
스탠피셔 씨가 선뜻 그렇게 큰 땅을 내놓자 그의 친구 헨리 씨가 '나도 질 수 없다'고 11만 평을 또 내놓았다. 모두22만 평의 땅을 기증받은 것이다. 미국에서 불교를 위해 이렇게 큰땅을 내놓기는 미국 건국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비록 늦게 출발했지만 일붕 스님이 밤낮으로 뛰고 열심히 기도 한덕분에 그 어느라다보다 훌륭한 신자들이 생겨난 것이다. 일붕 스님은 제자들이 생길 때나 22만평의 땅을 기증 받을 때 모두 좋은 꿈을 꾸었다.
이 땅에는 1970년 세계중앙선원 기공식을 했고 세계승가 대학의 인가를 방아 한국불교의 앞날날을 짊어질 인재를 양성하고 있다.
일붕 스님은 1969년 또 하나의 쾌거를 이룩했다. 
미국 템플대학에서 <조당집 연구>라는 논문으로 정식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것이다. 한국 승려 역사상 최초로 해외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것이다. <조당집>이란 중국 당나라로 유학을 갔던 신라의 스님들이 남긴 행적과 어룩이 정리된 귀중한 자료인데, 경남 합천군 가야산 해인사 장경각에 판본으로 깊이 감추어져 빛을 보지 못했던 기록이다.
이 <조당집>의 가치는 한국 불교의 정신이 무엇이었는가를 담고 있는 점이다. 간결하기는 하지만 풀이가 쉽지 않은 <조당집>이 일붕 스님에 의해 풀이되어 영어 논문으로 나오자 전 세계의 불교학자들은 대단한 관심을 보였다.
영국에서 발간되는 세계적인 불교잡지 <미들 웨이>는 이렇게 소개했다. 

"...지난 1969년 미국 켈리포니아주 월나드 크리시의 조계종선원판으로 발간된 서경보 박사의 <한국불교 조당집>은 지금까지 유럽에 전혀 알려지지않은 한국불교의 모습을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이 불교잡지의 편집장 알버트 씨는 머릿 글에서 "지금까지 유럽에 알려진 선불교는 스즈까? 박사에 의한 일본적인 것과 찰레스 추크가 소개한 중극적인 것 뿐이었다. 그러나 서경보 박사의 <조당집>은 한국불교 뿐만 아니라 선의 경지를보다 체계적으로 열어주는 문이다."고 격찬했다.
일붕 스님이 논문을 발표한 지26년이 지난 현대에도 한국불교를 알고자 하는 서양의 불교학자들은 이 <조당집>을 가장 먼저 구해서 보고 있다. 이 논문을 뛰어넘을 만한 연구서가 아직 안나오기 때문이다. 
미국의 매스컴은 일붕 스님이 손 하나 까딱하는 것까지 신문, 방송, 잡지에 실을 만큼 절대적인 지원을 했다.
수수께끼 같은 일이 아닐수없다. 일붕 스님을 잘모르는 사람은 '세계적인 학자이자 스님이니까 그랬겠지'라고 말할 것이다. 물론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이유가 있다.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나거나 사실을 생각하고 가슴을 당당히 펴고 자신있게 행동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포교를 하던 여러나라의 스니들은 민족 고유의 의상보다 양복을 입고구두를 신은 복장으로 활동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러나 일붕 스님은 언제나 한국 고유의 승복차림에 머리를 빡빡 깍고, 흰 고무신을 신고, 육환장이란 지팡이를 들고 다녔다.
이렇게 처음 본 미국인들은 앞다투어 소개하려 했다.
어울리지도 않은 양복을 입고 다니는 것보다 더 멋지다고 느낀 것이다.
어떤 미국인이 신기해 하며 물었다.
"왜 머리를 빡빡 깎고 흰 고무신을 신습니까?"
"예, 우리 한국의 승려는 전통적으로 부처님의 모습을 닮고자 머라를 깎습니다. 흰 고무신을 신는 것은 우리가 평화를 사랑하는 백의 민족이기 때문이기도하고 실용적이기 때문입니다. 고무신은 마른 땅 진 땅을 가리지 않고 다닐수 있어 좋습니다. 우리는 흰 고무신을 신기 전에는 짚신이란 신발을 신었답니다."
미국인들은 달려들어 만져보고 좋다고들 칭찬을 했다. 
일붕 스님은 여기에서 만족하지 않고 한국에 올 때마다승복과 흰 고무신을 신고 백팔염주를 목에 걸고 머리를 깎았다.
이런 복장과차림새를 한 일붕 스님의 제자들이 미국 전역을 돌아다니자 실제보다 더 많은 신자들이 한국 불교를 믿는 것처럼 보여 너도 나도 신자가 되려 했다. 
그렇다고 그냥 신자들이 늘어난 것은 아니었다.
풍속의 차이에서 오는 것을 바로잡기가 제일 어려웠다. 좌선을 할 때면 다리를 틀어 가부좌를 하라고 가르치자 화장실에 간다고 하고는 도망가는 사람까지 생겼다. 참고 하는 사람도 가부좌를 틀다가 뒤로 벌렁 넘어지기 일쑤였다. 합장을 하라고 해도 얼마동안은 손부터 내닐어 악수를 하자고 하다가 움찔 놀라기도 했다. 그런가하면 가사 장삼을 입고 한국식 큰절을 하다가 장삼에 휘감겨 앞으로 넘어져 코를 다치는 사람도 많았다. 참선을 하라고 앉혀 놓으면 병에걸린 닭처럼 끄덕끄덕 하며 조는 것은 보통이었다. 그렇게 힘들고 고통스러워도 미국인들이 일붕 스님께 참선을 배운 이유는 현대 의학이나 과학이 못 고치는 신경성 노이로제 같은 문명병을 낫게 하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영국에서와 마찬가지로 미국에서도 천누교 신부, 힌두교인, 기독교 목사들이 종교를 바꾸어 불교를 믿은 일이 생겼다.
이때 일붕 스님이 영문으로 번역한 <한국 선불교 연구>, 서산대사의 <선가귀감>, 보조국사의 법어 <수심결·정해결사문·원둔성불론> 등이 각 대학의 교재로 채택 되거나 불교단체의 강의용 책자로 활용되었다. 
일붕 스님이 미국에서 일으킨 '한국불교 붐'은 국위선양의 효과도 있엇지만 한국의 어린이들에게 '나도 노력하면 세계와 어깨를 나랑히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