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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법왕 일붕 서경보 존자님의 세계일화(20)

초대법왕 일붕존자님의 일대기 태몽에서 열반까지

법왕청신문 이존영 기자 | 초대법왕 일붕 서경보 존자님의 일대기 세계일화 저자 담화총사

 

 

20. 영원한 외교관 

붕새처럼 '세계를 가슴에 안고' 오대양 육대주 지구촌 곳곳을 날아다니는 일붕 스님의 업적 중 가장 빛나는 것의 하나가 민간외교다.
김포 국제공항이 없어 여의도 비행장을 이용하던 60년대에 이미 동남아 각국과 유럽 주요 대학의 교수를 지내면서부터 시작된 민간외교야말로 일붕 스님이 '국보적인 인물'임을 느끼게 한 일이다. 
70년대 초 일붕 스님이 세번때의 미국 순방에 나섰을 때는 미국 전역에서 600명 이상의 제자들이 한국불교를 포교하고 있었다. 일붕 스님과 제자들이 세운 절만 해도 펜실바니아주 이스톤시 혜능사와 월나크리크시 조계종선당을 중심으로 40여 개이상이 세워진 상태였다. 이들 절에서는 선에 들어가고 마칠 때 한국말로 시작하고 끝냈다.
세번째 순방에서는 1,2차에서 뿌린 한국불교의 씨앗이 자라 열매를 맺고 있었다. 일붕 스님이 기대한 것 이상의 효과가 나타난 것이다.
한국식 불명을 받은 사람은 샌프란시스코 컴퓨터 기술자 캘로그 씨, 펜실베니아주 보마 씨, 캘리포니아주 스테판 캘로그 씨 등이 있었고, 큰 환영행사로는 레드유시, 버클리시, 필라델피아, 버어지니아, 워싱턴, 뉴저지주, 윌나트크리크시 등에서 있었다.
이때 우리나라 최초로 한국과 미국 대학간의 교환강의가 시도되었다. 동국대와 그랙셀대가 원칙적인 합의를 본 것이다. 또 캘리포니아대학 랭카스터 박사와 로저스 교수가 <파만대장경>의 영역을 제의하기로 했다. 그런가 하면 샌프란시스코의 출판인 칼버트 씨가 일붕 스님이 쓴 <불국사와 석굴암>을 영어로 출판하겠다는 약속을 받기도 했다. 인디아나주 천주교 신부인 스몰른시키 씨와 마리안 프라디 씨는 일붕 스님의 제자가 되어 좌선을 배우겠다고 했다. 
특히 일붕 스님이 잊지 못했던 것은 캘리포니아에서 '서광'이란 불명을 가진 미국인 제자가 불교 음악회를 열면서 <반야심경>을 참석자 모두가 한국말로 읽도록 했던 일이다. 이 '서광' 스님은 불교 주문을 외워 신비력을 얻었는데 뜨거운 장작불 속을 맨발로 108회나 들어가고 나오는 시범을 보인 사람이다.
미국 시민권을 가진 일붕 스님은 이후에도 계속하여 한국불교를 미국에 심기 위해 수없이 미국과 한국을 오갔다. 
종교와 학문을 통해 자연스러운 민간외교를 벌여온 일붕 스님의 해외활동은 그 어떤 대통령이나 외무부 장관이 거둔 실적보다 화려하고 다양하다. 일붕 스님의 민간외교는 한국불교의 해외포교를 쁼세운 것이기 때문에 거의 모든 활동이 불교와 깊은 관련을 갖고 있다. 학문, 예술, 사회활동 등 모든 것이 불교라는 큰 그릇 안에 들어 있다. 

 

 

그래서, 일붕 스님의 민간외교를 '승복외교관'이 라고 하는 것이다. 
또한 '평화의 사절'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다. 불교의 교리에 따라 끊임없이 평화를 주장하기 때문이다. 
유엔 총회 연설에서도 평화를 말했고, 각국의 대통령과 수상을 만나도 평화를 이야기했고, 종교가 다른 가톨릭의 교황과 러시아 정교 주교와 자리를 같이 했을 때도 평화를 사랑하자고 말했다.
일붕 스님은 "세상 사람들이 나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고 욕심을 버리면 저절로 싸움이 없어지고 평화가 이룩된다."는 쉬운 말로 평화를 강조한다.
역사에 기록될 만한 내용만 보아도 카터·부시·레이건 미국 대통령과의 민간외교, 각국 저명인사로부터의 감사장·상패·명예시민권·행운의 열쇠, 서경보의 날 제정 등 이루 헤아리기조차 어렵다.
카터 미국 대통령은 미국 외무부 직원을 일붕 스님께 보내 자문을 구한 일도 있다. 그 만큼 가깝게 지냈고 서로 믿었다는 증거이다.
그 중 가장 특이한 것은 미국 뉴멕시코주와 산타페시에서 1979년 8월 17일을 '서경보 박사 기념일'로 제정 선포했다는 것이다. 아직까지 동양인으로서는 최초이자 마지막 있었던 영광스러운 일이다.
전 세계에서 받은 굵직굵직한 상은 일붕 스님의 민간외교 업적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베네주웰라 국제문화교류공로상, 네델란드 레이덴시 특별예술상, 필리핀 마닐라 문화상, 영국 케임브릿지 국제 인물사전편찬본부 국제성공인상, 국제문화협회 세계평화상, 아시아 태평양문화협회 영예지휘지사장, 미국 국제 예술대사관 평화예술상, 아인슈타인상, 스리랑카 국제학술평화상, 미국 저명인사전기편찬회 국제 문화상, 알버트 슈바이처 평화상 등이다.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국민훈장을 받았다. 
1991년 9월 8일 한 일간지에는 그 신문의 편집부 국장이 쓴 이런 글이 실렸다. 일붕 스님의 민간외교를 아는 데 좋은 자료이다.

"…일붕 스님은 남들이 해외진출에 관심도 갖지 않던 60년대부터 서울에 근거지를 두고 한국의 것을 세계에 알렸다. 일붕 스님의 해외활동은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이다. 그의 이력 23페이지 중 20페이지가 해외활동과 민간외교다.
일붕 스님의 해외활동은 아무도 한국불교를 해외에 소개한다는 생각조차 못할 때 시작되었다. 동국대 교수로 근무하면서도 방학만 되면 어김없이 미국, 인도, 스리랑카 등으로 나갔다. 종단이 종권과 재산싸움으로 시끄러울 때도 해외활동에 심혈을 기울였다.
외국 것이 정신없이 몰려오고 또 너도나도 외국으로 몰려나가 과소비하는 시대에 단기간의 업적에 신경을 쓰지 않고 꾸준히 차근차근 밀고 나간 일붕 스님이 돋보인다…" 
그러면 일붕 스님은 어떻게 하여 그처럼 뛰어난 민간외교를 할 수 있었을까?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가 있다. 
첫째 한국불교이고, 
둘째 영어를 비롯한 어학실력이고,
셋째 서예로 대표되는 예술이다.
한국불교는 곳곳에서 나왔으므로 외국어와 예술을 살펴본다.
잘 알려진 것처럼 일붕 스님은 일찍이 국제무대에서 활동하려면 영어를 잘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피나는 독학을 한 끝에 영어를 익혔다.
일붕 스님이 '닭 가운데 학'처럼 돋보일 수 있었던 것은 인격과 실력이 뛰어난 탓도 있지만, 영어에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가슴을 당당히 펴고 의견을 내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많은 분야의 지도자들이 국제회의에 나가거나 외국인을 만나면 갑자기 반벙어리가 되어 슬슬 눈치만 보고 어색한 웃음을 짓던 시절에 일붕 스님은 통역없이 자유롭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수준이 올랐다. 
이것이 큰 무기이자 자신감을 가지게 한 힘이었다. 
다음으로 예술을 들 수 있다.
예술에 관심이 높은 서양인들은 일붕 스님의 먹을 갈아 붓으로 쓰는 서예를 매우 좋아했다. 한문도 그렇지만 붓글씨가 낯선 서양인들이 신기하게 볼 것은 당연했다.
더구나 일붕 스님의 붓글씨의 서예의 본 고장이라고 일컫는 중국에서조차 텔레비전으로 전국에 스님의 글씨 쓰는 모습을 방영했을 만큼 대가였으니, 서양인들이 얼마나 좋아했겠는가. 
짙은 먹으로 그린 달마상도 일품이었다. 몇 번 붓이 왔다갔다하는 사이에 웃는 듯 찡그린 듯한 달마상이 그려지는 것을 보고 파란 눈의 서양인들이 입을 다물지 못했다.
다섯 살 때부터 한문을 배우며 붓을 잡기 시작한 일붕 스님의 선시 역시 대단하다. 탄탄한 한문실력이 기초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세계 어디를 가서 누구를 만나든지 즉석에서 7자로 된 절구의 시를 자유자재로 짓는다.
무려 773권의 저서 중 시집만 165권이나 되는 것도 참선을 통해 정리된 생각이나 시상을 시로 표현했기 때문이다. 이 시집도 세계 최고기록이다. 그 어떤 시인도 165권의 시집을 낸 사람이 없다. 시의 내용은 레이건 대통령의 편지를 받고 쓴 것, 통일을 기원하는 것, 마음을 닦는 것, 오도송 등 퍽 다양하다.

미주 한 마리 푸른 새 날아와 
나의 산문에 서신 한 장 전해 주었다.
내 그를 위하여 7일 기도를 해준 공덕에 대하여
그는 편지로 깊은 은혜에 감사한다고 했다.
두 쪼각으로 갈라진 조국이여 가슴깊이 서리고 서린 한이여 
아-아 통한을 씹은 지 몇 해런고 
온 나라 온 겨레가 통일을 바라고 있사오며
자손은 대대로 평화가 깃들기를 바라고 있나이다.

마음도 행동도 걸릴 것이 없으니
걸림없는 마음과 행동
이것이 도인의 길 
흐르는 물 걸림이 없으니
구름도 걸림이 없네 
걸림없는 운수와 사물 밖의 이웃이어라. 
고요하게 법왕성에 앉아 있는데
태양이 삼경 밤 자정에 떠오르고
학이 한 소리 지르고 날았다. 

일붕 스님이 1042권의 책을 쓸 수 있었던 것은 언제나 메모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무슨 생각이 떠오르면 어디에라도 적어 놓는다. 마땅한 종이가 없으면 손바닥에도 적도 나뭇잎에도 적는다. 
그렇게 하여 적어놓은 메모를 국내에 있을 때는 참선을 끝낸 정신이 맑은 시간에 책상에 앉아 글로 정리하고 시를 쓴다.
그렇기 때문에 여행을 한번 다녀오면 책과 시집이 3∼4권씩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추사 김정희의 글씨에 버금간다는 붓글씨는 피눈물 나는 노력의 댓가다. 추사의 글씨를 배우기 전에는 중국의 왕희지, 조맹부, 구양순체를 두루 익혔다. 그 다음에는 백파선사의 '살인도 활인검' 필법을 터득했다. 다소 거친 듯 하나 힘이 넘쳐 살아 꿈틀거리는 느낌이 드는 것은 이 때문이다.
추사 김정희는 어느 날 갑자기 글씨를 쓰고 싶은 생각이 들었으나 먹과 벼루가 없고 붓만 있어 물을 묻혀 바위에 글을 썼더니 바위가 갈라졌다. 그렇게 힘이 좋은 글씨를 익힌 것이다. 
일붕 스님은 그 후 추사의 필체를 터득하여 자기만의 고유한 필체를 개발했다. 그 필체가 지금 볼 수 있는 일붕 선필인 것이다. 
우리나라가 자랑할 만한 위대한 예술혼을 간직한 스님이 탄생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