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왕청신문 이존영 기자 | 다음 달인 6월 중순 일붕은 다시 태평양을 건너 한국으로 돌아왔다.
갈 때도 빈손이었지만 올 때도 빈손이었다.
가사 장삼을 걸치고 바랑을 하나 들었을 뿐이다.
그러나 일붕은 가져올 수 없는 많은 것을 미국에 자랑스럽게 남기고 돌아왔다. 미국 땅 곳곳에 불음(佛音)을 남기고 수많은 제자를 심어놓고 돌아온 것이다.
공항에는 일붕을 영접 나온 조계종의 간부진과 신도들로 대성황을 이루었고 각 언론사에서 파견된 기자들이 붐볐다. 일붕은 귀국 소감을 이렇게 밝혔다.
한국 불교는 이제 좁은 울타리를 벗어나 국제화를 지향해야 합니다.
유럽과 아메리카는 정신적인 위대성을 가진 우리 한국 불교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물질문명의 폐해로 인한 인간성 상실과 심리적인 방황에 대한 치유책의 하나로 참선을 강조하는 우리 한국 불교를 원하고 있습니다.
더 넓은 세계로 나가기 위해서는 우리 내부의 의식부터 고쳐야 합니다.
그들은 이미 고답적인 종교를 원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자면 神이 창조한 인간이 갖는 원죄(原罪)의식을 말하는 기독교나 오직 견성성불(見性成佛)해야 한다는 불교의 목표를 다른 각도에서 받아들이고자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시대에 맞는 종교를 원하는 것입니다. 막연한 사후세계나 종교적인 구원보다는 현실적인 도움을 얻을 수 있는 실질적인 종교를 바라고 있습니다.
우리의 선(禪)은 그들의 요구에 가장 부합되는 내용입니다. 우리는 이 선을 유효적절한 포교의 수단으로 활용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불교계의 내부적인 문제부터 점검해야만 합니다.
서양은 우리 동양의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이는 우리가 서양의 과학과 합리성을 필요로 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참신하고 대중적인 불교 교재와 선 사상을 재개발하여 국내에서는 젊은 세대에게 어필할 수 있도록 준비하면서 해외 포교와의 균형을 유지하는데 총력을 경주해야 합니다.
그 길만이 우리 한국 불교가 전진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입니다.…”
일붕의 앞선 생각은 국내 불교계의 자성(自省)을 요구함과 동시에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명확히 제시한 까닭에 많은 공감을 얻었다.
국내의 각 단체는 일붕의 귀국을 맞이하여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강의를 요청했다. 은평구 불광동 조실로 거처를 정한 일붕은 잠시 휴식을 취한 후 대중강연에 나섰다. 7월13일 삼보학회(三寶學會)주최의 ‘세계불교 동향과 한국 불교의 사명' 강연회가 그 대표적인 경우다.
이 강연에서 일붕은 자신이 직접 경험한 서구인의 사상체계와 정신적인 위기를 자세히 이야기한 후 우리의 불교가 과감한 체질 개선을 이룬다면 서구인의 대체 종교로서 자리를 잡을 수 있다고 주장하여 열렬한 박수갈채를 받았다.
미국에서 돌아오는 길에 비행기 위에서 고향 제주를 내려다 본 일붕은 불가에 들어와 36년간이나 못 찾은 생가와 조상의 산소를 찾고 싶었다.
하지만 세속을 등진 불제자로서 자청하여 찾아가는 것도 흠이 되었기 때문에 망설이고 있었다. 고향의 뒷 골목과 잊고 살았던 정겨운 얼굴들이 밤마다 꿈에 나타났다. 그러한 일붕의 심정을 알기라도 했는지 제주도민회에서 '고향을 빛낸 인물'로 선정하여 초청했다.(그동안 불교 관계로는 두 차례 방문했으나 생가와 조상들의 산소는 찾지 못했다.)
7월19일 제주공항에서 대단한 환영을 받은 일봉은 다음 날 태을호텔에서 기자회견을 가졌다. 이어 오후에는 관음사觀音寺주최로 열린 시민회관 강연에서 '한국 선불교와 미국의 종교'를 주제로 귀향 강연회를 가졌다. 또 21일에는 보덕사普德寺, 22일부터 24일까지는 천왕사天王寺 등에서 각각 법회와 좌선회를 가졌다.
부산<법은사, 恩寺>로 간 일봉이 제2의 고향이라 할 수 있는 부산과 영남일대를 돌아보려는 일정을 짜고 있을 때 서울에서 급한 연락이 왔다.
8월 5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속개된 학교법인 동국학원 제151차 이사회에서 일붕을 전격적으로 불교대학장에 임명했다는 소식이었다.
일정을 연기하고 상경한 일붕은 왜 이사회에서 본인과의 충분한 상의를 거치지 않고 불교대학장에 임명했는가를 곧 알게 되었다. 채벽암(蔡碧庵)신임 이사장이 취임사에서 밝힌 바와 같이 구습과 악폐를 과감히 쇄신하려는 시기에 일찍이 선진 문화에 접한 일붕 같은 개혁적인 인물이 필요 했던 것이다.
중생제도의 불타 정신을 바탕 삼아 민족중흥을 이룩하고자 설립된 동국대는 섭심(攝心: 마음을 깨끗이 가다듬는다), 탁세(度世: 중생을 苦에서 건져낸다), 자애(慈愛: 대중을 자비로 사랑한다), 신실(信實: 참되고 미더운 行을 한다)은 교훈 4조와 교가(이은상 작사, 김동진 작곡: 거룩한 삼보의 언덕 위에 / 한 줄기 눈부신 동국의 빛/큰 光明 큰 지혜 큰 힘으로 / 우리의 어두움 밝히노니 / 우러보라.
진리의 동산 / 학문의 성화 높이 들렸다 / 가슴마다 높푸른 이상 / 오직 의기에 찬 젊은 모습, 이 땅에 새 역사를 창조하리라 / 겨레를 위해 인류를 위해 / 이 땅에 새 역사를 창조하리라)에 잘 나타난 것처럼 불교를 간판으로 내건 학교이다.
이 학교는 원흥사元興寺: 현 창신국교에 명진학교 설립(1906․ 5․ 8), 불교사범학교로 개칭(1910.4), 전국 30본사 제3회 주지총회 결의로 불교고등강숙(일명 불교고교)으로 개칭(1914. 7), 교명을 中央學林으로 개칭(1915. 11. 5: 현재 명륜동 1번지),독립운동으로 강제 폐교(1922. 9. 30), 전국 각 사찰의 기부금으로 승격인가를 얻어 중앙불교전문학교로 개칭(1930. 4. 7), 혜화전문학교로 개칭(1940.6. 19), 동국대로 승격(1946. 9.20)>등의 발전과정에서 잘 나타나듯이 불교 중흥의 기치를 내건 민족 도량이다.
소위 불교 문중이라 불리는 어떤 문중에도 속하지 않았던 일붕에게 동국대는 파격적인 인사로 불교대학장을 맡긴 것이다.
일붕은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김인홍(金仁鴻) 교무처장이 직무대리를 맡던 불교대학장에 취임했다. 당시 총장은 김동익(金東益)이었으며 불교관계의 역경원 원장과 대학선원장은 이운허(李耘虛)와 김탄허(金虛) 스님이었다.
일붕은 불교학과, 철학과, 인도 철학과로 구성된 불교대학을 이끌면서 강의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강의는 그때까지의 정형(定型)에서 벗어나 해외석학들의 광범위한 이론을 소개하고 시대에 맞는 경전 해석에 의한 현대 불교의 재창조에 중점을 두었다. 한편 점차 활동 폭을 넓혀 대외적인 행사에도 참여하면서 외국의 승려나 학자가 초청되는 모임의 통역을 도맡기도 했다.
불교대학장에 취임한 후 조계사 대법당 강연, 관훈클럽 주최 대동상고 강연(주제: 계정혜의 원리와 한국 불교의 호국사상), 밀양<삼문사>주최 불교사상강연회(주제:세계 불교계의 동향과 우리 동국대 선무부(禪武部) 수련도량 나라 불교의 발전), 대한불교달마회 주최 수요법회(주제: 선사상과 미국 불교), <감로암, 甘露庵>관음법회, 월간 法施社 정기강연회(주제: 불타 사상의 재인식), 부산<금강사>대강연회(주제: 불교와 현대인의 생활), 경기 고양군<흥국사,興國寺>수계법회, 육사 신입생 환영법회, 공사 졸업기념법회 등의 대외활동을 통해 현대 불교의 정립에 안간힘을 썼다.
1969년 10월1일 한국 선불교를 연구하려고 내한한 서독인 로렌즈(Gred Lorenz)와 스위스인 후레이(George Frey)는 태국, 인도, 스리랑카, 일본, 유럽 각국을 돌면서 순례 수행을 하는 승려들인데, 일붕이 함부르크대 교환교수를 지냈다는 사실을 알고 일부러 대담을 요청해 왔다.
해인사海印寺와 범어사梵魚寺 등 주요 사찰을 순례할 목적으로 온 이들은 <조계사>에서 하룻밤을 묵으며 월산(月山) 총무원장과 대화를 나누고 나서 일붕에게 한국 불교의 전반적인 개요를 들었다.
이들은 일붕을 통해 한국 불교의 선이 갖는 특색을 배운 다음 “한국의 僧風은 지금까지 알아 온 세계 어느 나라의 것보다 특이하고 연구할 가치가 있다.”는 감탄의 말을 전했다.
또한 각기 자기 나라에 돌아가면 한국의 참선을 더 진지하게 연구, 수행하면서 일붕 같은 동서양의 사상에 정통한 대학자가 한국에 있음을 널리 알리겠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