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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대혜보살의 일자불설一字不說이란?

일정불교문화원 원장 일정대종사의 법문 2

글 / (재)일정불교문화원 원장 일정대종사 오늘의 법문 1 / 대혜보살의 일자불설一字不說이란?

 

대혜보살은 세존께 원하옵건데 성자의 모습과 일승一乘의 행상을 말씀해 주시옵소서!


세존께서는 대혜여 보살은 여러 가지 가르침에 의해서 분별을 합하는 일은 없다. 혼자 조용한 곳에 살며, 법을 보고 스스로 깨닫고 타에 의지하지 않는다. 분별의 견見에서 떠나 위로 올라가는 것이 부처의 경지로 들어가는 길이다….

 

 

이처럼 수도하는 것을 성자의 행상이라고 한다. 다음에 일승의 행상이라고 하는 것은, 일승의 길을 깨닫는 것이다.

 

그것은 주관, 객관의 차별을 떠나서 실제와 같이 사는 것이다. 대혜보살은「세존 일전에 세존은 『정각正覺의 처음부터 열반의 끝까지 한자도 말하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는, 그것은 어찌한 의도 이심이니까 묻자 세존께서는 대혜여, 두 개의 마음에서 나는 그렇게 말했었다. 하나의 스스로 깨닫는 것을 말한다. 모든 부처가 깨달은 것은 나도 똑같이 깨닫고, 증감增滅되는 일이 없다.


그 지혜는 언어를 떠나, 분별을 떠나 이름이 있기 때문이다.

 

둘째는 본성의 법에 대해서 말한다. 금이 광석속에 있듯이, 부처가 세상에 나오든 안나오든 상관없이, 법은 모두 그 본성이 상주常住의 진여眞如이다. 가령 어느 사람이 광야에 가서 평평한 고도古道로 가서 고성古城으로 들어가듯이, 예의 모든 부처가 깨달은 법을 나도 깨달았기 때문에 본성은 상주 불변이다.

 

그러기 때문에 부처는 성불成佛부터 열반까지 그사이에 한자도 말하지 않는다고 말했던 것이다.


대혜보살은 세존이여 언어에 의하지 말고 의義를 취取하라"라고 하는 것을 가르쳐 주시옵소서라고 말하자, 세존께서는 대해여 언어는 분별과 그 습관이 근본이다. 목이나 혀, 치아나 입술 등의 보조로 인하여 여러 가지 음성을 내어 상대하여 말하는 것을 언어라고 한다. 또 도道를 찾는 자가, 혼자 조용한 곳에서 듣는 것과 생각하는 것과 수행하는 것과 세 가지의 지혜로서 깨달음의 도를 향하여 경계를 알고, 더러움을 없애고, 수도의 절차에서 여러 가지의 수도修道를 하는 것이 의義이다.


대혜여, 수도 하는 자는 언어와 의는 하나가 아니고, 또 틀리지도 않다고 보지 않으면 안 된다….
만약 언과의 가 다르다면, 언에 의하여 의 나타나지 않는다.


언어에 의하여 의를 보는 것은, 등불이 물건을 비추는 것 같이, 말의 등불에 의하여 언言을 떠난 깨달음의 경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대혜여, 불생불멸不生不滅의 자성自性은 열반에 대해서 만약 말과 같이 의義를 취한다면, 상견常見이나 단견斷見 등에 떨어지겠지만 그것은 환상을 보고 질물이라고 생각 하는 것이고, 우자愚者가 보는 것이다.


어리석은 자는 의와 언은 같다, 왜냐하면 의는 체가 없으니까. 라고 말한다…. 이 사람은 말의 자성自性을 모른다. 말은 없어져도 의는 멸하지 않는다는 것을 모른다.


대혜여 모든 언어는 문자에 잡혀있지만 의는 그렇지 않다. 그것은 유무를 떠나 생 하지 않기 때문에 체體도 없다. 부처는 문자에 잡히며 설법하는 일은 없다.


만약 어떤 사람이 문자에 잡혀 설법한다면, 그것은 거짓 설법이다. 왜냐하면 모든 법의 자성自性은 자와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 때문에 나는 여러 부처와 함께 한자도 설법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것은 모든 법은 문자를 떠나 있으므로 의에 의하지 않으면 설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혜여, 설립하지 않으면 교법敎法은 단절된다.


교법이 단절되면 수도 하는 자도 부처도 없어지겠지. 만약 모든 것이 없어진다면, 누가 누구를 위해서 설법할 것인가? 그러하여 수도하는 자는 문자에 구애되지 말고 가르침을 따라 설법하는 것이 좋다.


나는 사람들의 번뇌煩悩와 양혜良慧의 소원에 따라 설법을 하고, 모든 법은 나의 마음으로부터 오는 것이고, 그 외의 경계는 없다는 것을 알린다. 유, 무의 분별을 떠나서, 심心과 의식意識을 전화転化시킨다. 이것은 깨달음 그 자체를 직접 나타내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보살은 의에 의하고 문자에 의하면 안 된다.


문자에 의하는 자는 악견惡見에 빠져 자기 생각에 집착하여 좋은 법상이나, 문장사구文章辭句를 양해할 수 없어 자기 스스로를 해치고 타인을 해치게 된다. 


대혜여. 진실의 법은 오는 일도 가는 일도 없다. 또한 『다르다 』 하는 일도 없다. 모든 무용無用의 논의는 그 앞에서 쉬겠지. 그러하므로 수도하는 자는 언言과 같이 의義에도 집착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진실한 법은 문자를 떠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사람을 손가락으로 가르치는 것과 같이 어린아이는 손가락은 보고 물건은 보지 않듯이 어리석은 자도 함부로 언어의 손가락에 집착되어, 생명이 때까지 그 손가락을 버리지 못하고 첫째로 의를 깨달을 수 없다.


대혜여, 진실한 의는 미표 또한 조용하고 열반의 인因이다. 언어는 망상과 만나 생사의 거리에서 헤메인다. 많이 듣는다고 하는 것은 의義를 잘 하는 것이고 말을 잘 하는 것은 아니다.


의를 잘한다고 하는 것은 스스로 모든 이교의 생각에 따라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로 하여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을 의義에 있어 많이 든다고 말하는 것이다. 의를 찾는 자는 가까이할지언정 문자에 구애받는 자는 멀리하라.


대혜보살은 세존께서는 부처의 자성自性을 가르쳐 주시옵소서] 세존 노래를 가지고 가르치신다. 부처는 오간五官의 한계를 넘어 과果도 아니고 인因도 아닌 모든 법의 상을 멀리한다. 


경계境界의 법도 몸도 부처는 하나도 보시지 않고 보지 않는 법이 없으니 어찌하여 분별을 일으키겠는가 분별은 외外이지만 법은 없지 않고 법은 법으로서 스스로 있나니. 「아我」 내 것의 이치를 모르고 그저 말에만 얽매인다면 유무의 편견에 빠져 자신을 파계하며 세상을 헤치게 된다. 이 법을 보지 않으면 모두 잘못에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대혜보살은 세존의 힘을 얻어 여쭙기를 세존이 말하는 법의 불생불멸과 세존이 말씀 하신 것과 같습니다.
세존은 대답하신다….


대혜여 내가 말한 법의 불생불멸과 이교들의 설과 같지 않다.


왜냐하면, 이교도는 법에는 실제의 성性과 실제의 상相이 있고 생하지 않고 변하지 않는다고 한다.


나는 그와 같이 『유 무』의 형태에 떨어지는 성은 하지 않는다. 나의 설說은 유有도 아니고 무無도 아니다. 또한 생 한 것과 멸 하는 것이 떨어져 있다. 왜 무가 아닌가 하면 모든 법은 환상과 같기 때문이다.

 

왜 『유』가 아닌가 하니 모든 법은 자성自性이없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모든 법은 유도 무도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기에 법은 자기가 보는 것에 불과하다고 알고 망상을 떠나면 세상의 복잡한 일들은 오래 쉬게 되겠지 망상은 어리석은 자가 하는 일이고 성자가 하는 일은 아니다.


대혜여 헤맴은 허위를 생각하고 어린이가 요술 인형을 보고 실제의 것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세상 사람들의 생生과 견見, 몇 滅이라고 하는 것도 미迷와 견見을 깨달음이라고 보는 것도 모두 이와 같다.
인형이 출입하는 것을 보고 생멸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대혜여. 세상 사람들은 이처럼 허위의 생명 생각을 하고 있지만, 성자는 그렇지 않다. 허위라고 하는 것은 법의 성性과 같이 보지 않고 정반대의 생각을 하는 것이다.


그것은 법의 본성을 유有 라고 고집해서 허위를 떠날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러니까 대혜여 무상無相이라고 보는 것은 훌륭한 상像을 보고 이것에 집착 하는 것은 미迷의 생을 초래하는 근원이 된다….만약 모습을 보지 않으면 분별은 없다.


대혜여 열반이라고 하는 것은 분별의 마음을 버리고 부처 안에서 깨닫게 되는 성지(性智)를 얻는 것이다.


이것을 조용한 열반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대혜보살은 세존 삼세三世의 여러 부처는 강물의 모레와 같다. 라고 말씀하신 것은 어떤 뜻이옵니까.

 

 

세존. 대혜여 말대로 들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부처는 가장 훌륭하시고 모든 세상을 초월하고 어떻게 예를 들 수가 없다.


그저 예를 들어 그 일부만을 나타낼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항상 세상에 집착하고 나쁜 생각을 계속하지만, 생사의 거리를 헤매고 그들로 하여 그것을 꺼리게 하고 훌륭한 희망을 품게 하려고 부처가 되기 쉽고 부처를 만나기 쉽다. 라고 말하고 부처는 강물의 모래와 같이 많다고 말한다.


혹간 부처의 교화를 받는 자를 보면 나는 부처를 만나는 것은 천년에 한번 피는 꽃을 보는 것과 같이 어렵다고 가르친다.


대혜여 진실한 부처는 범부凡夫의 심心과 의義, 식識을 가지고 보는 것은 초월해 어떻게 예를 들어 말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기회가 있어 예를 들어 말 하는 것은 굳이 거절 할 리는 없다.


부처의 성지聖智도 강과 같고 자재自在하시는 그 힘은 모래와 같이 이교의 어구魚亀 등 다루어 와서 요란해도 부처는 일념一念도 분별을 일으키는 일 없이 맑고 깨끗하다.


이것은 부처는 그 본원本願에 의하여 선정禪定의 기쁨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것은 강물이 모래에 애증愛憎이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대혜여. 강물이 모래에 한이 없듯이 부처의 광명도 한이 없고 모든 사람의 마음을 성취成就 시키기 위하여 모든 부처의 모임을 비치는 것이다.


또한, 강물의 모래는 파내도 줄지 않고 던져도 불어나지 않는 것과 같이 부처는 방편方便의 지혜를 가지고 사람의 마음을 안정시키는데 그 덕에 조금도 증멸增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증감 그것은 부처의 몸이 세상 사람과 같은 몸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 모래에서 기름을 짜낼 수 없듯이 부처는 사람들의 고苦에 억눌리어도 그들이 모두 열반하기까지는 싫증 나는 생각을 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대비大悲의 마음을 충만히 가지고 계시기 때문이다.


또 다음에 대하여 강물의 모래가 물에 따라 역逆으로 흐르지 않듯이 부처의 모든 가르침도 반의 흐름에 따라가지 않는 자는 없다.


대혜여 이와 같은 이치에 따라서 부처는 강물과 같다고 설법하였도다.


진실을 보고 싶으면 분별을 버리고 보는 법을 수도하니 반듯이 부처를 모실지어다.


세상은 꿈과 같고 보물 또한 환상과 같도다.


만약. 사람들이여 이 이치를 안다면, 세상 사람들로 하여 존대 받을 것이다. 헤매는 마음은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 헤매며 함부로 사물을 보는구려. 헤맴을 떠나서 삼계 없다고 진실을 모르면, 내 마음의 더러움은 떠나가지 않으니, 그림에 보이는 높은 것 낮은 것은 보이지만, 잡을 수 없고 법도 또한 같은 것은 아지랑이와 같고 꿈과 같도다.
세상 사람의 모든 분별은 하늘과 할 것이다.


사물은 본래 생긴 것이 아니고, 공空이며 자성自性 없고 그저 연)에 의하여 있는 것을, 잘 모르고 생멸生滅 있다고 생각할 뿐만 아니라 언어에 의하여 성性 없는 안에 사물 생긴다….


언어 없으면 생기는 사물 없다. 나쁜 습관 마음에 물들어, 나타나는 모습에 방황하고 허황한 계획한다. 그 계획 없으면 진성이 나타나 진공眞空의 보리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