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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多島에 태어난 慧星" 世界佛敎初代 法王 一鵬 徐京保 尊者

世界人類平和와 慈悲光明을 온 地球村 衆生들에 傳法하신

초대법왕 일붕 서경보 존자예하 비서실장( 현 2대법왕 권한대행) |  三多島에 태어난 慧星

 

 

일붕 서경보 큰스님은 佛家에 歸依한지 어언 半白年. 古稀를 넘긴 지금도 國內는 물론, 海外 여러 나라를 쉴 사이 없이 다니면서 布敎 및 講義ㆍ著述에 혼신의 情熱을 다하여 한국 佛敎를 五大洋 六大洲에 널리 傳法하시고, 나아가서 우리나라의 국위를 크게 선양하시는 스님께서는 열반에 드시는 날까지도 우리나라의 國泰民安과 護國理念을 고취하기 위해서 진심으로 기도정진하고 통일촌 마을회관에 남북평화통일기원 일붕시비를 제막했다.   

 

 

  인생의 반이 넘은 나이에 學院에 다니며 영어를 배워 東西洋을 나들며 布敎活動을 벌인 스님의 강철 같은 의지는 누구나가 다 공인하는 근면과 參禪生活을 바탕으로 해가 거듭할수록 功績이 입증되었다. 


  1914年(甲寅年) 10월 10일, 그날도 끝없이 맑고 푸른 하늘아래 평화스런 하루가 저물어 가고 밤은 고요한 적막에 싸였고, 이어 구름 한점 없는 하늘에는 무수한 별들이 영롱히 지구를 위해 비쳐 주고 있었다.


  그 같은 수많은 별빛 속에 유난히 빛을 뿜는 별 하나가 제주도 서귀포시 도순동 利川 徐氏가문에 영광을 가져왔으니 섬마을에는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彗星의 탄생이었다.

 


  스님을 낳던 그날 어머니의 꿈에 한라산 꼭대기에서 긴 지팡이를 짚고 백발이 성성한 누런 도포를 입은 한 도인이 구름을 타고 내려와서 「三藏傳印」이라고 새겨진 옥도장을 어머니에게 건네주면서 훗날 귀댁에 「三藏道師」가 나올 것이며 나는「백운사」에서 온 도승이라고 하고 사라졌다.

 


 

 그 뒤 아들을 낳았으니 그가 바로 世界佛敎의 巨星인 法王 三藏法師 一鵬 徐京保 큰스님 이셨다.(큰스님일대기 "세계일화" 태몽에서 열반까지(담화이존영저)참조


  스님은 태어나면서부터 이목구비가 수려하고 성품이 온순하였으며, 5~6세가 되면서 글을 배웠고 10세 전에 <四書三經> 등을 외다시피 했으며 10세가 지나면서 儒書에 대하여 그 뜻을 깨치기에 이르자 15세 약관의 나이에 마을의 훈장이 되었다.

 


 

 어느 날 우연히 산길을 따라 오르다 法華寺(현재의 삼방굴사)를 지나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들려오는 염불소리에 발을 멈추게 되었다.


   그 뜻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그 염불소리가 가슴에 부딪쳐 소리를 내는 것이다. 가슴이 뿌듯하고 슬픈 고뇌가 꽉 차 올라왔다. 진정 알 수 없는 황홀경에 젖어 절 주위를 맴돌면서 절 주위를 오르내렸다. 희미하게나마 자신의 근본문제가 해결될 것만 같은 그러한 안도감에 사로잡기도 했다.

 


 

  19세가 되던 해 어느 날 비장한 결심을 하고 法華寺 스님을 찾아가서 出家僧이 될 것을 간곡히 발원하였다. 스님은 남제주군 안덕면 사계리에 있는「산방굴사」에서 강혜월스님으로부터 머리를 깎고 계를 받아 그의 법제자가 되어 진리체득의 첫발을 내딛게 되었다.


  산방굴사에서 몇 년을 머물다가 스님을 뜻한바 있어 지리산 華嚴寺로 옮겼고, 31세가 되던 1935년 가을에는 전북 전주 위봉사에서 沙彌科와 四集科를 이수하였다.

 

 

  1937년부터 1940년까지는 서울 동대문밖 개운사 대원암 강원에서 공부를 하셨고, 다음해 包光스님이 계시는 전북 김제에 있는 金山寺로 가셨다.


  이곳에서 고명하신 김포광스님으로부터 「식수행상」의 강론을 받으시고, 26세 되던 해인 1940년 20대의 靑年學人으로서 처음으로 講壇에 서게 되었다.

 

 

 

  이처럼 청년 一鵬 徐京保는 제주도 고향을 뒤고 두고 육지를 향하여 처음으로 화엄사에서 시작하여 대원사 강원으로, 그리고 오대산 선방에까지 요원한 求道의 길을 하나하나 더듬어가며 참구하여 나아가고 있었다.


  배움의 열망은 계속되었다. 31세가 되던 해 일본 京都에 있는 臨濟專門學校에 入學하셨는데 이곳은 일본문화의 발상지이며 일본 불교문화의 主宗을 이루는 古都였다.

 


  1946년 太平洋戰爭이 끝나면서 귀국하여 東國大學校에 편입하여 1950년에 同大學을 졸업하였다. 1953년 40세가 되던 해에 스님은 마침내 佛敎界에 그 이름이 빛을 발하기 시작하였는데, 東國大를 시작으로 釜山大ㆍ東亞大ㆍ圓光大ㆍ海印大ㆍ全北大 등에서 佛敎 및 哲學을 강의하셨다.

 

僧服外交官으로 世界傳法

 


 

 1958년 세계5차 방콕 국제불교회의에 참가한 것이 인연이 되어 버어마(현 미얀마) 상가대학에 교환교수로 가게 되었고, 그 후 미국 탬플대학에 종교학 주임교수로 韓國佛敎의 禪을 가르치고 포교활동을 펴나갔다.

 


 

 날이 갈수록 미국 전역에서 구름처럼 많은 제자들이 몰려들어 불교에 귀의해 왔다. 이처럼 모여 든 제자들의 심정은 무엇을 호소함이었던가?


  그 것은 곧 인생의 고뇌를 묻고, 바로 거기에서 답을 얻어 보려는 그 열망 때문이었으리라.

 

 그 후 1961년 함부르크대학과 스리랑카 콜롬보대학에서 교환교수로 재직하시며 포교활동을 계속해왔다. 낯도 설고 언어도 다른 외국 대학에서 많은 학생들을 가르치고 布敎活動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부처님의 입으로 설하고 마음으로 깨닫는다고 하는 진리의 확신 때문이었다.

 


  특히 인상 깊은 일은 1967년 7월 25일 渡美(한국인승려로서는최초로미국에도착)을 초하여 1개월간 미국 6개주에서 禪書畵展, 座禪會, 講演會, 援戒式 세미나를 개최하여 열렬한 환영을 받았고, 뉴멕시코주에서는 스님을 맞아 유례가 없는 東洋人에게는 처음으로 1979년 8월 17일을 「徐京保 博士 紀念日」로 제정하고 환영하여 미국 사회에서 큰 화제가 되기도 했다.

 


 

 또한 1978년 8월 미국을 순방 포교시 백악관으로 직접 카터대통령을 예방하여 자신의 禪書畵 한 폭을 증정하였는데 귀국 후 카터대통령이 천서로 답례를 해왔으며, 한편 주한 미국대사관 직원을 一鵬禪院으로 보내 스님에게 美行政府에 대하여 助言을 요청하기도 했다. 이는 실로 韓美 양국간의 유대강화에 큰 공로라 아니 할 수 없는 일이다.

 

 

世界人類平和 및 傳法度生을 위하여"世界佛敎法王廳 初代法王에 就任"

 

 

  세계인류평화 및 세계전법과 세계불교인의 단합을 위하여 WㆍFㆍB총회에서 세계불교법왕청 설립을 주장하여, 세계불교법왕청 설립위원회를 1986년 한국에 설치하고, 1987년 9월 한국에서 국제회의를 주제하였으며, 1986년 유엔 산하기구인(UN-NGO)세계평화교육자국제연합 한국본부를 유치하고, UN전권대사로 임명받아 국제적으로 활동하였으며, WㆍFㆍB 제16차 총회에서 1990년 제17차 WㆍFㆍB총회를 한국에 유치하고 제17차 세계불교도 서울대회 대회장으로서 1990년 10월 22일부터 29일까지 세계 40개국 3백여 명의 세계 각국 고승들이 참석하여 올림픽체조경기장에서 3만여 명이 동참한 가운데 개회식과 함께 판차실라 수계법회를 성대히 가졌으며 스위스그랜드호텔에서 정기총회와 알버트 슈버이저 재단으로부터 세계인류학상을 받아 WㆍFㆍB 역사상 최대의 대성황을 이루어 세계불교사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다.

 

 

 또한 1988년 대한불교종단연합회를 창립하여 전 불교도의 단합과 포교사업에 매진하셨다.      

  
  한편 스님은 1991년 1월 25일 미국 백악관에서 부시 전 미국대통령은 삼장법사 일붕 서경보 법왕에게 감사장을 보내면서 한ㆍ미양국간의 우호증진과 우정을 도모하자는 친서를 보내왔다. 


  1991년 서경보 큰스님은 미국, 일본, 소련, 인도, 영국, 몽고, 스리랑카, 방글라데시, 아르헨티나 등 40국을 비롯하여 국내외 157개국 5,200여 단체에서 법왕으로 추대 되었으며, 준비위원회는 일붕 서경보 큰스님을 만장일치로 세계불교초대법왕으로 추대되어 취임함으로서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이후 실로 2536년 만에 '불교의 UN'과 같은 기구인 '세계불교법왕청'이란 기구를 만들어 초대법왕에 취임하게 되었다.

 

 

  이 날 행사는 세계불교사상 최초로 대한민국, 스리랑카, 태국, 인도, 네팔, 일본, 홍콩, 방글라데시, 아쌈, 몽고, 소련, 중국, 부탄, 오스트리아, 미얀마, 미국, 프랑스 등 각국 대표들과 내 외빈 1천명 이상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히 거행되었다. 

 

 

  이날 서경보 큰스님은 인사말에서 "오늘은 전 세계와 불교도들에게 역사적인 순간입니다. 불교의 본질은 사람들이 올바른 생활을 통해 바르고 곧게 사는 길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교의 위대성은 남에게 즐거움을 베풀고 고통을 함께 나누는 것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불교 지도자들은 모든 사람들이 절대 평등하다는 진리를 깨달아 안으로는 본래부터 타고난 자유를 얻도록 하고 밖으로는 인류가 싸우지 않고 평화롭게 살도록 힘써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부처님의 뜻을 따르고 모든 불자들이 마음에 새겨야 할 소중한 것입니다."라고 인사했다.  

 


 

 일붕 스님은 동년 3월 15일에 방글라데시 불교계 최고 종단에서 세계 최초로 승왕에 추대되어 방콕에서 연합통신에 의해 전 세계 각국에 특종기사가 전달되어 KBS-TV뉴스를 비롯하여 동아일보 등 국내외 각 언론사에서 크게 보도한 바 있으며, 1991년 11월 11일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아르헨티나 「국제관계자문위원회」에서 위원으로 추대 받고 아르헨티나 국영 방송인 「까불레 TV」에서 일붕 서경보 법왕의 세계평화 메시지를 생방송으로 15분간 방영하였다.

 

 

  아르헨티나의 국제 관계 자문위는 그 나라의 전직대통령, 미국의 부시 대통령, 키신저 전 국무장관을 비롯하여 영국, 프랑스, 독일, 캐나다, 일본 등의 대통령과 수상 등 국제 정상들로 구성된 외교정치 자문위원회「약칭 A.R.Y」이다.)
 
                                             世界的인 禪書畵 藝術 및 碩學으로認定

 

 

 수십 년 동안 禪과 함께 살아왔고 參禪의 경지를 즐기고 음미하고 미소하면서 지내온 것이 생활의 전부인 스님의 禪筆禪畵는 이름 그대로 큰스님의 사상을 펼친 韓國高僧「禪書畵」로서 동양의 名筆들의 글씨를 능가할 만한 大名筆이며 이미 널리 알려진 世界的인 명필이시다. 7세 때부터 王義之의 習作으로부터 시작하여 秋史體를 16년간 연마한 끝에 禪을 통하여 독창적인 힘을 체득한 禪書畵는 佛敎藝術의 새로운 창조로서 지대한 업적을 쌓았다. 


  뿐만 아니라 世界的인 碩學 一鵬 徐京保 큰스님은 韓國을 비롯한 各國의 名門大學으로부터 博士學位만 126個를 取得함으로써 그의 고귀한 인격을 소유하고 계시며, 또한 저서만도 세계 어느 곳에서 찾아볼 수 없는 1026종을 저술하였으며, 南北平和統一을 祈願하는 詩碑가 전국 도처에 778個가 建立하셨으며, 세계방방 곳곳에 6,000여명의 일붕 문도 및 제자를 두고 있다. 

 

世界佛敎初代法王 一鵬 大宗師 入寂

 

 

 世界佛敎初代法王 一鵬 徐京保 큰스님이 불기 2540년1996년 6월 25일 오전 11시 40분 서울 신영동 세계불교초대 법왕 주석처에서 세수 83세 법납 64세로 입적, 원적에 드셨다. 세계불교법왕청 22개 회원국 대표와 전 조계종 총무원장 월주스님, 권익현 의원과 송석구 동국대 총장의 조사가 이어졌다.


  영결식을 마치고 일붕큰스님의 법구는 1천 오백여 만장을 앞세우고 의령일붕사에 도착 많은 스님들과 신도들이 오열하는 가운데 노제 법의식이 진행됐으며 저녁 7시부터 법구를 연화대로 옮겨 1만 5천명의 참배객이 지켜보는 가운데 종도 스님들의 거화로 다비식이 진행됐다.

 

  7월 3일 사리 습골 결과 영공 큰스님, 봉주 큰스님, 경우 큰스님의 증명으로 편골 사리 16과, 두정골 사리 6과, 비취색 영롱한 두발사리 15과, 치아사리 9과, 점사리 5과, 주홍사리 7과, 뇌수사리 9과, 쇄사리 6과, 미색사리 1과, 대소오색 영롱한 사리9과 등 83과와 덩어리 사리 등이 출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