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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법왕 일붕 서경보 존자님의 세계일화(3)

초대법왕 일붕존자님의 일대기 태몽에서 열반까지

법왕청신문 이존영 기자 |  초대법왕 일붕 서경보 존자님의 일대기 세계일화 

         

                   

3. 할아버지의 가르침

 "할아버지, 저는 신학문을 가르치는 학교엘 가고 싶어요. 서당보다 학교를 보내 주세요."
 "뭐라고, 왜놈들이 가르치는 신학문을 배우고 싶어 학교를 간다고?"
 "할아버지, 학교엘 간다고 왜놈이 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안 된다. 누가 뭐라고 해도 안 된다. 학교에 가 왜놈 말과 글을 배우면 왜놈의 종노릇 밖에 할 것이 없는데, 그놈들의 종노릇을 하려고 돈 들여 공부한단 말이냐?"
 "할아버지, 저는 학교를 다니고 싶어요. 한문은 다 배웠는걸요."
 "안된다면 안 되는 줄 알아라. 다시는 학교에 간다는 말은 아예 입 밖에도 내지 마라."
 경보는 그때까지 할아버지가 그처럼 화를 내시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할아버지는 비록 배우지 못해 고기잡이로 생계를 꾸렸지만 기개가 높고 성격이 강직했으며, 남다른 의리가 있는 행동으로 주위의 신망을 얻는 분이었다. 때문에 결코 사사로운 일로 남에게 머리를 숙이지 않았고 이웃에 어려운 일이 생기면 앞장서서 도왔다.
 경보가 태어난 제주도의 이천 서 씨 가문은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부지런히 일을 해서 비교적 넉넉한 살림을 꾸린 집이었다. 그러면 이천 서 씨 문중이 어떻게 하여 본토가 아닌 외딴 섬 제주에 정착하게 되었을까? 여기에 대해 자신 있는 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다만 경보의 직계 조상이 제주 목사를 지낸 서상우라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이천 서 씨가 몇 백 년 전부터 제주에 뿌리를 내린 가문은 아니었다고 여겨진다. 
 일반적인 경우로 생각하면 경보의 조상은 중앙 정계에서 큰 벼슬을 하다가 정쟁에 휘말려 귀양을 왔거나 시끄러운 세상을 싫어하는 유생이 물설고 땅 설은 곳에 몸을 숨긴 후예일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경보의 조상은 원래가 제주 사람이 아니라 어떤 연유로 귀양을 왔거나 당쟁을 피해 제주에 숨어든 양반일 것이라 짐작된다.
 이런 배경을 가진 이천 서 씨 가문인지라 비록 물일과 밭일로 살아가고 있었지만 조상의 영광을 되찾아 가문을 일으켜 세우겠다는 맹세를 가슴에 새기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늘 이렇게 말씀했다.
 "나는 이미 물일이 생업이자 피할 수 없는 운명이 되었지만 자식과 손자에게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고기잡이를 시키지 않겠다."
 할아버지는 자신의 각오대로 경보의 아버지 서성현 선생은 밭일을 하게 했고, 손자 경보에게는 공부를 가르쳤다. 그런 할아버지였기 때문에 물일과 농사일로 햇볕에 얼굴이 검게 타고 손발은 굵어지고 터졌어도 옛 사대부의 후손답게 점잖은 자세와 의연한 기상을 간직했던 것이다.
 경보가 신학문을 배우고 싶어 서당대신 학교를 가고 싶다고 보채도 딱 잘라 "안 된다"고 거절하신 할아버지는 언제나 "옳고 그른 것을 가려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 경우 경보가 학교에 가는 것은 그른 일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경보가 학교엘 가려고 고집을 부리던 시기는 3·1운동 직후라 민족의식의 중요성을 깨닫고 있던 때이기도 했다. 
 물론 경보의 할아버지도 사랑하는 손자인 경보가 왜놈 말과 글을 가르치는 학교를 다녀 출세하는 것이 싫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편하고 쉽게 살기 위해 조상 대대로의 교육방식인 서당교육을 포기하는 것이 못마땅했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경보는 서당을 다니게 되었다.
 글공부를 익히려 서당에 들어간 경보는 마치 고기가 물을 만난 듯 재미있게 공부했다. 그 당시 서당에 다니는 아이들은 대개 10세가 넘었고 나이가 많은 사람은 장가를 든 15∼16세도 있었다.
 경보는 서당 훈장으로부터 날마다 칭찬을 들을 만큼 열심히 공부했다. 
 할아버지는 자신이 못 배운 한을 똑똑한 손자가 풀어 주리라고 생각하여 어떤 뒷바라지도 해줄 각오를 했다. 그래서 석유 값이 금값 같던 그 시절에도 할아버지는 경보가 밤늦도록 공부하도록 석유를 모아 두었다. 하지만 경보는 철이 들자 '낮에 뛰어놀고 밤늦게 호롱불을 켜고 공부하지 말고 밝은 낮에 공부하는 것이 비싼 석유를 아끼는 방법이다'고 여겼다.
 해가 지기 전에 그날 배운 것을 완전히 익히기로 작정한 것이다. 
 나이 어린 경보가 아무리 결심을 했어도 개구쟁이 기질까지 완전히 벗어버린 어른은 아니었다. 어떤 때는 글을 읽고 외우는 담 밖에서 아이들이 재미있는 놀이를 하고 흥겹게 노는 노랫소리가 들려오면 '우리 서당에서 내가 공부를 제일 잘 하는데, 조금만 놀다 들어오면 안 될까…' 하는 생각이 끊임없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할아버지가 꼭두새벽에 마을에서 제일 먼저 일어나 집 안팎을 깨끗이 청소하고 나서 고기잡이를 나가시면서 하시던 말이 떠올랐다.
 아버지께는 "농부란 제 때에 씨앗을 뿌려야 하고 그 싹이 돋아난 시절에 재대로 돌보아야 가을에 풍성한 수확할 수 있는 거야. 부지런히 일해야 된다." 하셨다.
 경보에게는 "사람도 다 때가 있단다. 공부는 한때 하고 배울 때 배워야지 어른이 되고 나면 배우고 싶어도 배울 수 없단다." 하셨다. 
 이 무렵 경보의 집에서 각자의 몫이 정해져 있었다. 물일은 할아버지의 몫, 밭일은 아버지의 몫, 할머니와 어머니는 아버지를 돕는 일이 각자의 할 일이었다. 물론 경보의 몫은 공부하는 일이었다. 경보는 매일 공부를 해서 저녁이면 그날 배운 것을 할아버지께 외워 보여 칭찬을 듣곤 했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글을 배운 분이 아니라서 경보가 얼마나 공부를 잘 하는지를 몰랐다. 어떤 때는 경보가 글을 외우다가 틀렸음을 알고 "할아버지, 틀렸어요. 다시 외울게요." 하고 고개를 돌려보면 할아버지가 주무셔서 속이 상한 일도 있었다. 
 이 시절 경보는 공부만 잘했던 것이 아니라 마음씨도 곱고 유순해서 동네 어른들로부터 "그 애는 재주가 특출할 뿐만 아니라 품행도 단정하고 예의도 바른 학동이다"는 칭찬을 곧잘 들었다. 글재주가 있다고 뽐내지도 않았고, 공부를 못하는 아이들을 눈 아래로 깔보지 않고 스스럼없이 잘 어울렸고, 어른들에게는 언제나 공손하게 인사를 잘했기 때문이다. 
 또한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닮아 매우 부지런했다. 골방 샌님처럼 방구석에 틀어박혀 책벌레 노릇만 하는 것이 아니라 틈나는 대로 집안을 깨끗하게 쓸고 동생들을 돌아보았다. 그런가 하면 동네 우물에서 물을 퍼다 부엌의 물 항아리를 채우고 어머님이 밥을 지을 때에 아궁이에 불을 지피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