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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법왕 일붕 서경보 존자님의 세계일화(7)

초대법왕 일붕존자님의 일대기 태몽에서 열반까지

법왕청신문 이존영 기자 | 초대법왕 일붕 서경보 존자님의 일대기 세계일화 

 

 

7. 결혼에 이어 출가

 

 일본에서 돌아와 집안일도 돕고 그동안 못 읽었던 책도 읽으면서 훌륭한 스승을 찾아 뭍으로 떠날 계획을 짜고 있었다. 
 어느 날 할아버지께서 경보를 찾으셨다.
 "할아버지, 저를 부르셨습니까?" 
 무릎을 꿇고 앉은 경보를 보고 할아버지께서는 조용한 말씀하셨다.
 "경보야, 나는 네가 더없이 자랑스럽구나. 내게 응석을 부리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어엿한 청년으로 자랐구나. 이 할애비를 실망시키지 않고 열심히 공부하더니 서당의 훈장까지 되었으니 그저 장할 뿐이다. 그런데 남을 가르치려면 어른이 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나이도 열여섯이나 되었으니 혼사를 치르는 것이 좋겠다. 또 나도 많이 늙었으니 증손자를 안아보고 이 세상을 떠나고도 싶고…." 
 눈앞이 캄캄했다. 
 경보는 온갖 핑계를 다 말하면서 할아버지를 설득하려 했다가 오히려 호된 꾸지람을 들었다. 경보는 결혼을 해야 한다는 할아버지의 권유를 받자 얼떨결에 육지로 나가 신학문을 배우겠다는 말을 했다. 
 "뭐라고! 학교엘 가려고 장가를 못가겠다고? 고약한 놈 같으니라고! 그래 꼭 왜놈의 종살이를 하겠다는 것이구나?" 
 "할아버지, 저는 큰 인물이 되고자 신학문을 배우겠다는 것인지, 일본 놈의 종살이하는 방법을 배우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게 그것이 아니냐. 안될 말이다. 학교를 다니면서 왜놈 말을 배워서 왜놈 아래서 굽실거리는 벼슬을 할 테니, 어찌 그것이 왜놈의 종살이가 아니란 말이냐?" 
 "할아버지, 그럼 앞날이 구만리 같은 제가 이 좁은 섬에서 훈장이나 하면서 꿈을 꺾으란 말씀이십니까? 너무하십니다." 
 "허-허, 이 녀석 보아라! 글을 가르쳐 훈장을 만들어 놓았더니 그 알량한 말재주로 할애비에게 대드는구나! 네가 그만큼이라도 배운 것이 누가 땀 흘리고 희생한 덕인지 아느냐? 내가 애지중지하면서 너를 기르고 가르친 것은 할애비에게 말대꾸나 하라는 뜻이 아니었다. 만일 네가 남의 집 아이들처럼 겨우 이름 석 자나 쓸 만큼 가르쳤으면 너도 할애비 말을 고분고분 잘 듣고 어른의 뜻을 거스르지 않을 것 아니냐? 허-참, 가르친 것이 탈이 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느냐? 경보야, 글을 배워 할애비에게 덤비라고 네 훈장이 가르치더냐? 논어, 맹자에 나오더냐?" 
 할아버지는 노발대발 하셨고 쉽게 노여움을 풀지 않으셨다. 경보는 장래를 위해 결혼을 다음에 하겠다고 버틸 만큼 버티었다. 그래도 할아버지는 고집을 꺾지 않으셨다. 그러다가 경보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렇다. 결혼과 학문을 정반대의 위치에 놓고 안절부절못한 나의 생각이 짧은 것이었다. 결혼을 한다고 해서 학문의 길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동양의 대성현으로 추앙받는 공자님은 결혼을 했어도 크게 학문을 깨쳤고, 석가모니 부처님은 결혼 후 아들을 낳은 후 출가했어도 인류의 정신적인 대지주가 되질 않았는가. 내가 장가드는 문제로 할아버지와 불편한 관계를 계속 유지하면서 죄책감을 갖는 것 보다는 차라리 할아버지의 소원을 풀어드려 자손 된 도리를 다하는 것이 학문을 깨치는 지름길이 될 수도 있다. 옛 부터 이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라고 하지 않았던가?”
 이렇게 생각한 경보는 할아버지가 정해주신 규수와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을 하고도 경보는 집안에서 머무는 시간보다 조용한 절과 들을 찾아 명상을 하고 생각을 정리하는 시간을 더 많이 가졌다. 그러다 일곱 번이나 집을 떠났다. 모두 붙잡혀 오는 일을 반복한 끝에 출가를 허락받았다.
 19세에 제주도의 '산방굴사'에 계시는 강혜월 스님을 찾아가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다. 강혜월 스님은 당시 제주도에서 고명한 고승으로 이름이 알려진 분이었다. 
 강혜월 스님 앞에 무릎꿇은 경보의 얼굴은 비장했다.
 “스님, 이제 조부모님과 부모님의 출가허락을 받고 찾아 왔습니다. 저의 스승이 되어 머리를 깎아 주십시오."
 "허허, 또 저번과 같이 잡혀 가지 않겠는가?" 
 강혜월스님은 인자하게 물으셨다. 
 "그래, 그러면 자네 말을 믿지. 머리를 깎아 줄 테니 우선은 행자로 있으면서 신심을 기르게나. 수계는 당분간 두고 보다가 내리겠네."
 "스님, 고맙습니다."
 얼마 후 경보는 법명과 수계식을 받았다. 강혜월 스님은 경보에게 '회암'이란 법명을 내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중국 달마대사가 소림굴에서 9년 면벽 끝에 깨달았듯이 전생의 모든 업장을 참회하고 이 설굴바위의 천정에서 감로수가 떨어져 방울이 생기듯이 수도하라."
 이렇게 하여 속세의 청년 경보는 경보 스님이 되었다.
 경보 스님은 아침저녁으로 부처님께 기도하는 일 외에도 한라산 같은 깊은 곳에 자리한 '법정사'를 찾아 나무 아래에서 참선을 하였다. '법정사'에서 돌아오면 염불독경과 법요집행의 예식을 하나하나 배우면서 부처님의 역사와 내력을 철저히 학습했다. 교리도 열심히 익혔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이 흘러갔다. 몸은 물 먹은 솜처럼 축 쳐지고 고달팠지만 정신은 맑고 개운했다. 스님이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모든 역경과 고난을 이겨낼 자신감이 내부에서 솟아나곤 했다. 
 이때 읽었던 <팔상록>과 <서유기>는 두고두고 생각나는 책이 되었다. 마치 한문을 처음 배운 후 삼장법사를 따르는 손오공과 저팔계의 활약상이 재미있게 펼쳐지는 <서유기>에 반해 읽고 또 읽었던 것과 같았다.
'신방굴사'와 '법정사'를 오가며 불교의 기초를 익히며 참선에 정진하는 사이에 어느덧 일 년이 지나갔다. 
 경보 스님은 이렇게 다짐했다. 
 '나는 스님이 되는 것에 만족하지 않겠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제주에도 많은 절이 있으니 이곳에 머물러도 되겠지만 그런 식으로 주저앉을 수는 없다.
내가 취미로 스님이 된 것은 아니지 않는가. 참선이건 교리건 당대의 내 노라 하는 스승을 모시고 싶다. 육지로 나가자. 그래야만 차원 높은 불교를 배우고 어머니의 태몽대로 삼장전인을 전수받을 수 있을 것이다.'
 경보 스님은 수륙만리 육지로 떠나면 언제 만날지도 모르는 어른들께 작별인사를 드리려고 속가에 예고 없이 들렸다. 가족들은 깜짝 놀랐다. 어머니는 버선발로 뛰어나와 반겼다. 수도하는 절에 이씨 부인이 찾아가 잠깐만 보자고 해도 매몰차게 거절하던 경보 스님이 제 발로 집대문 안으로 들어서자 놀라 수밖에 없었다. 승복과 머리를 깎은 모습도 그렇거니와 어른들을 대하는 인사도 승려의식이었다.
 "영락없는 진짜 중이구나. 집을 떠나 얼마나 고생이 많았느냐? 어서 들어오너라." 
 할아버지는 경보 스님을 방으로 들였다. 
아버지는 "중이 되는 것도 팔자려니 하고 포기했다. 이왕 내친걸음이니 훌륭한 도사가 되거라."고 등을 두드렸다. 이씨 부인은 '꿈인가 생시인가' 하는 듯 놀란 토끼눈으로 그저 보고만 있었다.
 경보 스님은 가족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일부러 부드럽고 편안한 표정을 짓고 말했다.
 "어르신들 덕분에 이렇게 소원을 이루고 보니 세상에 부러운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오직 훌륭한 인물이 되도록 전심전력을 다해 애쓰고 있습니다.…"
 "원 녀석두…. 그래 소원대로 중이 되어서 좋겠구나. 그건 그렇고 무슨 일로 연락도 없이 느닷없이 찾아왔느냐?"
 "이제 육지로 나가 학문과 덕망을 고루 갖춘 스승을 만나 본격적인 공부를 하려 합니다. 그래서 마지막 인사라도 드리려고 들렸습니다."
 "앞으로는 만나기도 어렵겠구나. 그래도 같은 제주에 있을 때는 마음만 먹으면 달려가 볼 수는 있다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먼 길을 떠나는 경보 스님에게 3∼4일 동안이라도 집에 머무를 수 없느냐고 부탁했다. 경보 스님은 이 부탁마저 거절하고 싶지는 않았다.
 다음날 아침 이씨 부인에게 경보 스님은 삼국시대 의상조사와 선묘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며 말 했다. 
"이제 당신도 나를 남편이라 생각하지 말고 스님이라 생각하고 나의 신도가 되어 주시오." 
 또 부처님과 야수다라 이야기, 아난과 마등가 이야기, 마하가섭과 금강비구니 등 수도생활 둥에 읽은 <팔상록>과 <능엄경>에 실린 이야기를 들려주며 한글로 된<팔상록>한 권을 부인에게 주었다.
 "내가 보고 싶으면 이것을 읽으시오." 
 사흘 루 경보 스님이 집을 떠나려 하자 할아버지는 노자돈 100원과 철에 맞추어 입도록 의복을 준비해 주셨다. 
 노자 돈 100원은 당시 소학교(초등학교)선생님의 월급이 20원이었으니 큰 돈 이었다.
 "할아버지, 고맙습니다."
 "이 녀석아, 고맙기는 뭐가 고마워. 내가 너를 얼마나 아끼고 보살폈는지 알기나 하느냐? 어디를 가든지 몸조심하고 병이나 들지 않도록 하고 자주 연락하는 것을 잊지 마라."
 "아버지, 어머니 안녕히 계십시오." 
 "오냐, 잘 가거라. 부모는 자식을 낳아 기르면서 오직 자식 위하는 일에 평생을 바치는 것이다. 몸조심하고 크게 도를 이루길 바란다."
 경보 스님은 스승을 찾아 육지를 향해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