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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법왕 일붕 서경보 존자님의 세계일화(8)

초대법왕 일붕존자님의 일대기 태몽에서 열반까지

법왕청신문 이존영 기자 | 초대법왕 일붕 서경보 존자님의 일대기 세계일화 

 


 

8. 큰 스승을 찾아서 

 

 1933년 10월 초순.
 경보 스님은 전남 구례군 '화엄사'에 진진응이란 큰 스님이 계신다는 것을 알고 여수로 향하는 목선에 몸을 실었다.
 조그마한 목선이 망망한 대해에서 세차게 파도치는 물결을 뒤로 하고 둥둥 떠가는 모습은 마치 넒고 넓은 하늘의 한 조각구름 같았다. 목선이 바다 한 가운데 이르자 풍파가 심해졌다. 세찬 파도가 뱃머리를 때릴 때마다 목선이 도리질하여 여자들이 멀미로 몸을 가누지 못했다. 멀미가 심한사람은 먹은 것을 모두 선실바닥에다 토했다.
 파도가 점점 심해졌다. 목선은 심하게 흔들렸고 사람들은 울부짖었다. 마음이 약한 사람은 무서워 떨었고 기절하는 사람도 있었다.
 경보 스님은 '이것이 고행의 시작이다'고 여기며 <천수경>과<반야심경>을 소리 내어 외웠다. 파도가 갈수록 거칠어지자 처음에는 태연하던 뱃사공들까지 파랗게 질려서 안절부절 했다. 경보 스님이 뱃사공에게 물었다.
 "왜 배가 방향을 못 잡고 제 마음대로 흘러가는 것이오?"
 "너무 짐을 많이 실어 우리가 배를 마음대로 부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짐짝들만 없애면 무사하겠소?" 
 장담은 못하겠으나 짐짝들만 버리면 배가 가벼워 질 테니 빠르게 노를 저을 수도 있고, 사람들이 한 군대로 몰리지만 않으면 배의 중심을 잡을 수 있기 때문에 암초에만 걸리지 않으면 목적지까지 갈 수도 있겠습니다." 
 경보 스님은 사람들 앞에 섰다.
 "여러분, 비상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모두 물귀신이 될 위험한 지경에 놓였습니다." 
 승객 중에 빈정거리는 사람이 있었다. 
 "스님, 염불만 잘하면 살겠지요?"
 "염불과 기도는 제가 하겠습니다만 우리가 할 일을 먼저 해놓고 부처님께 빌어야 합니다. 살고 싶으면 짐짝을 버리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모두 고기밥이 됩니다. 나는 이 바랑이 전 재산입니다만 제일 먼저 던지겠습니다."
 경보 스님은 다른 승객들이 보란 듯이 바랑을 바다에 던졌다. 그러고 다시 말했다.
 "자, 내 것 네 것 가리지 말고 눈에 보이는 대로 바다에 버리십시오." 
 분위기는 순식간에 변했다.
 "옳소. 옳소, 스님 말씀이 옳소," 
 사람들은 짐짝을 닥치는 대로 바다에 던졌다. 배가 가벼워지자 사공들이 사람들을 여기 저기 나누어 있게 하여 배의 중심을 잡고 힘차게 노를 저었다.
경보스님이 다시 나섰다.
 "여러분 ! 이제 우리의 생명을 위태롭게 하는 장애물을 모두 버렸으니 위안을 얻도록 합시다.
 “모두 저를 따라 하십시오. 나무대자대비고구구난 관세음보살…."
 "나무대자대비고구구난 관세음보살…."
 목선은 순식간에 법당이 되었다. 승객 모두 관세음보살을 외웠다.
드디어 배가 무사히 여수항에 도착했다. 
 경보 스님은 "짐을 버려 돈이 떨어진 사람은 모두 나를 따라오시오." 하고 앞장 서 걸었다. 큰 여관을 잡아 숙박비와 음식 값을 대신 치러주고 따라온 사람들에게 불교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다음날 경보 스님은 걸인 같은 차림을 하고 구례' 화엄사'에 들어섰다. 스님들을 만나 목선에서 있었던 일을 말하자 칭찬했다.
 경보 스님은 한 시라도 빨리 전진응 스님을 만나 뵙고 싶었지만 가사 장삼과 바릿대까지 바다에 버려 모양새가 하도 초라하여 행여 실례가 될까 봐서  객실에 머물면서 대중공양도 참여하지 않았다. 
 며칠 후 가사 장삼을 준비한 다음 말로만 듣던 전진응 강백을 찾았다. 
전 강백은 키가 크고, 눈동자가 별처럼 빛나고, 음성이 종소리처럼 웅장하고, 근엄한 표정을 가진 분이라 저절로 고개를 숙여 존경의 뜻을 표시했다. 강백은 경보스님의 출가 경위와 뜻을 다 듣고 나더니 고개를 끄덕거렸다.
 "뛰어난 인재로다. 나이 겨우 이십에 그처럼 큰 뜻을 품고 스승을 찾아 죽을 고비를 넘기며 육지로 나오다니…." 
 강백은 경보 스님을 반가이 맞으셨다. 
 그런데 '화엄사'에는 그때 사미과와 사집과가 없고 사교과와 대교과만 있었다. 사미과는 불교입문의 초등부 과정으로 초등학교와 중학교에 해당되고, 사집과는 고등학교에 해당된다. 또 사교과는 대학에 해당되며, 대교과는 대학원에 해당된다. 의식수행은 불교 과학으로 이해된다.
 경보스님은 사정이 그렇다 하더라도 여기까지 와서 그냥 포기할 수는 없다고 여겨 염불과 예식 절차를 더 익히기로 하고 구청대 선방에 들어갔다. 이 선방에서는 경보 스님에게 출가전의 학문 실력이 아무리 뛰어났더라도 불경은 유교의 글과 달라서 마음을 다루는 것이니 먼저 참선을 하라고 권했다. 위아래를 따지는 것이 군대보다 엄격한 곳이 절이라 가장 아랫사람인 경보 스님은 손이 나무가시에 찔려 피가 흐르고, 옷자락에 물이 마를 틈이 없어 썩은 냄새가 코를 찔렀다. 거기다가 노장 스님들은 일을 잘하니 못하니 하면서 끊임없이 시비를 걸고 골탕을 먹였다.
 잠시도 쉴 틈이 없었다. 자고나면 물 길어 오고, 방과 마루를 쓸고 닦고, 불을 때는 일이 반복될 뿐이었다. 손은 갈라 터지고 팔다리가 움직이지 않을 만큼 지쳤다. 너무 힘이 들어 울고 싶기도 하고 회의할 때도 있었다. 
 “내가 노장 스님들의 뒤치다꺼리나 하려고 이곳까지 오지는 않았다는데…….” 
 하지만 경보스님은 다시 힘을 내어 '나만 거치는 과정이 아니라 누구나 거치는 것인데, 이것마저 못 견디면 어떻게 큰 뜻을 펼치겠는가. 참자.' 하면서 이를 악물고 견디었다. 그러다가 너무 한다는 생각이 들면 '그래, 늙은이들끼리 잘 해 보아라.' 하고 마음을 가졌다.
 어려운 처지에도 도와주는 분이 계셨다. 선방의 가장 어른격인 순조대사란 분은 절대 말을 하지 않으면서 수행을 하는 일을 곧잘 거들어 주었다. 이 묵언 수좌는 경보 스님에게 눈을 떴다 감았다 하고,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고, 땅을 가리키고, 가슴을 가리키고, 배를 가리키며 선 공부를 시켰다. 처음에는 벙어리 굿 같아 킥킥 웃음이 나왔으나 오랫동안 지켜보니 말로 지껄이는 것보다 의미가 깊은 것 같아 존경하는 마음을 가졌다. 
 그 스님 덕분에 경보 스님은 밤이 되어 남들이 다 잠이 들고 난 후 열시부터 열두시까지 뒤뜰에 나가 오락가락 거닐며 화두를 붙잡고 정진할 수 있었다, 눈이 쌓인 곳에서 그렇게 하다보면 어떤 때는 몸이 얼어 팔다리가 마비되기도 했다. 그때마다 묵언 스님은 방긋 웃으시고 어깨를 툭툭 두드린 다음 손가락으로 방을 가리켰다. 병이 나면 안 되니 방에 들어가 자라는 뜻이다. 온갖 고생 끝에 겨울을 보내고 나서야 경보 스님은 전진응 강백에게 교학의 깊은 뜻을 배우게 되었다. 이때도 아랫반이 없어<화엄경>부터 보게 되었다.
<화엄경>은 사짐과 사교의 거치지 않으면 읽기 어려운 경이지만 경보 스님이 유교의 <사서삼경>을 통달했다는 점을 감안하여 청강을 허락했다. 전진응 강백은 구례군의 고박사, 황박사와 함께 3박사라는 칭호를 받는 석학이고 식견과 기억력이 뛰어난 분이라 경전에 대한 설명을 마치 누에고치가 풀리듯 술술 쉽게 했다. 더구나 강백은 송경허 스님께 선지를 받아서 문자견성을 하여 선교를 겸한 분인데, 불교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역사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었다. 
경보 스님은 속으로 '이러한 고매한 스승을 만나니 그간의 고생이 보람이 있구나' 하고 생각하면서<화엄경>강의에 빠졌다. 그래도<화엄경>은 어렵고 따라가기 힘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