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왕청신문 이존영 기자 | 하처래 하처거(何處來 何處去). 우리 인간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 것일까. 우리 인간은 태어나기 이전의 곳도 모르고 죽음 그 이후의 곳도 알 수 없다.
부처님(佛陀)은 바로 이러한 삶의 이치를 한 조각 뜬구름이요, 죽음은 한 조각 구름의 스러짐이라고 말했다.
나는 무엇일까. 누구나 예외 없이 겪는 생노병사(生老病死)의 과정을 거치는 우리의 인생은 무엇일까. 왜 태어나고 죽을까. 삶의 진정한 목적은 무엇이고 죽음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 무엇을 기쁨이라 이르고 무엇을 슬픔이라 이를까. 삶과 죽음의 경계는 어디일까….…
그는 이러한 본질적이고 근원적인 답을 얻으려 세정(世情)을 끊고 불제자가 되었고, 얻고자 하는 답에 가까이 가려 참선을 통한 수행에 몰두했다. 아니 지금도 고통받는 중생들을 위한 수행을 계속하고 있다.
서기 1914년(불기2458년)음력 5월 9일 술시, 제주도 서귀포시 도순동 331번지에서 徐成賢·李卯生 부부의 3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일붕은 어릴 때부터 총기가 넘쳐 할아버지 鳳辰 선생의 전폭적인 뒷받침을 받으며 당시 제주의 제일가는 문장이자 덕망가였던 외삼촌 선생께 한학을 배웠다.
민족정신이 투철했던 할아버지의 뜻에 따라 학교 대신 서당에서 공부했던 일붕은 학동들 가운데 나이가 가장 어렸음에도 성적이 제일 뛰어나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이때 공부만 잘한 것이 아니라 불가에서 말하는 ‘마음의 승복을 입은’ 흔적을 곳곳에 남겼다. 뱀과 개구리를 함부로 죽이고 꽃을 함부로 꺾는 일을 나무란 일, 할아버지가 잡아 온 고기 중 살아 숨 쉬는 고기를 골라 되살려 준 일 등이 그것이다.
15세의 나이로 서당의 훈장이 된 일붕은 이미 제주 전체에 학문이 높은 청년으로 소문이나 한학이 상당한 경지에 오른 노인들과 교유하면서 漢詩를 즐겨 짓기 시작했다.
어느 날 귤나무를 심다가 문득 스스로가 한스럽다고 느낀 일붕은 道人을 찾아 전남 영광과 일본을 다녀오기도 하였다. 그러는 틈틈이 마을 어린이들에게 민족혼을 불어넣는 가르침을 주다가 일본인 순사의 감시를 받았으나 똘똘 뭉친 이웃의 협조로 위기를 넘겼다.
16세에 할아버지의 강요 때문에 고부이씨(亥生) 집안으로 장가를 들었지만 '세속의 삶에 만족을 느끼지 못하다가 신경쇠약증세에 시달렸다.
<법화사>를 드나들며 불교에 심취한 일붕은 종송을 듣고는 출가를 결심한다….
문종성번뇌단(聞鐘聲煩惱斷)
지혜장보리생(智慧長菩提生)
이지옥출삼계(離地獄出三界)
원성불도중생(願成佛度衆生)
종소리 들리니 온갖 번뇌 다 끊어지고 지혜가
보리(覺道)가 생기는구나/ 지옥을 여의고 인간세
상에 나타나/ 부처를 이루어 중생을 제도하리.
원차종성편법계(願此鐘聲遍法界)
철위유암실개명(鐵圍幽暗悉皆明)
삼도이고파도산(三途離苦破刀山)
일체중생성정각(一切衆生成正覺)
원컨대 이 종소리 온 법계에 두루 퍼져/ 철 위산
어둠 다 밝혀서 / 삼도의 괴로움 다 여의고 지옥산
깨어져서/ 일체중생 모두 정각을 깨치게 하소서.
마치 仙界에서 들려오는 것 같은 이 종송을 듣고 스님들께 빌린 불경을 탐독하던 일붕이 주지 스님을 찾아가 출가의 뜻을 밝혔으나 한마디로 거절당했다.
집안의 반대도 극심했다.
그동안 자식도 태어났다.
그런데도 일붕은 부처님의 품에서 고결한 생애를 보내면서 높은 경지의 학문을 얻고 싶었다.
생각다 못해 부인 이씨에게만 승낙을 반강제로 받은 후 부처님이 말을 타고 담을 뛰어넘어 속세를 벗어난 유성 출가와 흡사하게 새벽에 담을 넘어 속세를 뒤로했으나 또 잡혀 오고 말았다.
일곱 번 도망쳤다가 일곱 번 모두 붙들려오자 할아버지도 어쩔 수 없다는 판단이 내렸는지 출가를 허락했다.
이때 태몽이 큰 도움을 주었다. 불가에 널리 알려진 일붕의 태몽은 이렇다.
한반도 최남단에 자리한 제주도 남제주군 중문면 도순리 331번지. 이천 서씨 공도공파(恭度公派)의 중시조 격인 제주 목사 서상우(徐相)의 10대 장손 徐鳳辰과 11대 장손 徐成賢 父子가 사는 집 50호가 되는 마을에 이천 서씨가 오손도손 모여 사는 半農 半漁村. 만물을 소생시키는 따사로운 봄기운이 바닷바람에 실려 오는 어느 날 밤, 이씨 부인(李卯生)은 몸을 뒤척이다 눈을 떴다.
너무 신기한 꿈을 꾼 것이다. 이것이 말로만 듣던 태몽이 아닐까 하고 이씨 부인은 낯을 붉혔다.
갓 피어난 개나리보다 더 노란 색깔의 옷차림에 길 반이 넘는 긴 지팡이를 짚은 백발의 노승이 신비하고 오묘한 흰 구름이 자욱하게 싸인 한라산 꼭 대기로부터 미끄러지듯 날아 내려왔다.
백발의 노승은 이씨 부인 앞에 서더니, 품 안에서 사방팔방으로 영롱한 빛을 발하는 푸른 옥구슬을 꺼내어 건네주며 말했다.
"이씨 부인이여! 이 구슬을 받으시오.”
깜짝 놀란 이씨 부인은 마음을 가다듬고 다소곳한 몸가짐과 정중한 목소리로 그 노승에게 물었다.
“스님은 어느 절에 계신 스님이시온데 이런 값진 보배를 저에게 주시는 것입니까?” “나는 한라산 백운사(白雲寺)에 있는 중입니다.
그동안 이 푸른 옥구슬을 전할 곳을 찾았으나 마땅히 전할 데가 없더니, 이제 귀댁에 인연이 닿아 전하게 되었습니다.
모두 인연이니 더 이상 묻지 말고 이 옥구슬이나 받으시오.”
이씨 부인은 다시 물었다.
아무 까닭도 없이 거저 받을 수 있겠습니까?” “세상의 모든 일은 전세(前世)에 지은 인연에 따라 되는 것인데 대가는 무슨 대가입니까? 부인이 이 옥구슬을 받을 만한 인연을 지었고, 나 또한 그 인연에 따라 드릴만 해서 드리는 것이니 여러 말씀 마시고 받기나 하십시오.”
이씨 부인은 사양해서 될 일이 아님을 깨닫고 두 손을 모아 노승이 건네주는 옥구슬을 소중하게 받았다. 받아 든 옥구슬에는 부인이 알 수 없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스님께서 인연 따라 주시는 것이라니까 받기는 받았습니다만 옥구슬에 새겨진 글자가 무슨 뜻인지나 가르쳐 주십시오."
“네, 그것은 삼장전인(三藏傳印)이라는 네 글자입니다.
"그것은 무슨 뜻입니까."
"머잖아 부인께서 아들을 얻으시면 그 아드님이 장차 삼장법사라는 이름을 가진 큰 인물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삼장법사, 삼장법사, 삼장법사….“
이씨 부인은 수없이 되뇌며 그 뜻을 알고자 애썼으나 도무지 삼장법사에 대해 알 길이 없었다.
그래서 다시 물었다.
“스님, 삼장법사란 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부인께서 지금 이 노승이 아무리 설명해 드려도 잘 모르실 것입니다.
그러하오니?
어찌 여러 말씀을 드리겠습니까?
장차 태어날 아드님이 크면 저절로 알게 될 날이 올 것이니 더 묻지 말고 옥구슬이나 고이 간직하옵소서.” 말을 마치자 노란 옷을 입은 백발의 노승이 실로 눈 깜짝할 찰나에 어디론가 사라졌다. 깨어보니 꿈이었다.
그로부터 약 1년 후인 1914년 5월 9일, 그의 祖父 徐鳳辰은 새벽에 꿈을 꾸다가 黃衣를 입은 백발 노승을 만났다.
黃衣의 백발 노승이 말했다. “댁에 귀한 아기가 탄생할 것이니 각별하게 사랑하여 키우십시오. 장차 그 아이가 자란 후 도통을 하면 하늘 밑의 구름을 헤치고 날아다니며 천하를 주름잡고 세계를 누빌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널리 포교를 펼칠 귀한 아이를 잘 가르치고 잘 키우십시오." 말을 마치자 노승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참 이상한 꿈이 있구나.'라고 생각한 그의 조부는 잠자리에서 일어나 빗자루를 들고 집안 곳곳을 쓸고 동네 어귀까지 청소했다. 무식하지만 순박하고 착했던 조부는 그렇게나마 귀인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이날 이천 서씨 댁의 장손이 귀중한 生을 받아 태초의 일성(一聲)을 울리면서 '중생의 빛'이 되고자 태어났다. 갓 태어난 아이는 모친 이씨 부인의 태몽과 조부의 꿈을 뒷받침이나 하듯 피부가 유난히도 희고, 이목이 수려하고, 골격이 단단하게 생긴 옥동자였다.
이천 서씨 집안에는 밀동자 같은 장손을 얻은 기쁨에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산모도 건강했고 갓난아이도 탈 없이 건강해 그 기쁨은 더욱 컸다.
아무리 붙잡아도 안 된다고 여긴 가족들의 출가 허락을 얻을 때는 날아갈 것 같은 기쁨을 얻었지만, 막상 떠나려 하니 세속의 정이 사무쳐 몇 번이고 마음을 다져야 했다. 질기고 질긴 것이 인연이란 사실을 새삼 느꼈다. 그때의 상황과 일붕의 심정을 되살려 본다.
마침내 출가를 허락받았다는 기쁨에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일붕은 다음날 일찍 길 떠날 준비를 마쳤다.
조부님과 부모님께 떠나기 전 세속인(世俗人)으로서의 마지막 큰절을 했다.
어머니와 아내가 멀리까지 따라왔다.
길모퉁이를 돌아서자 어머니는 치맛자락을 들추더니 비상금으로 감추어 놓았던 돈을 “배고플 때 먹을 것을 사 먹어라" 하시면서 주었다.
아내는 체면을 차리느라고 눈물을 참고 참았던 설움이 일시에 복받쳐 오르는 듯 오열을 시작했다. 눈만 껌벅거리던 송묵도 제 엄마를 따라 울음을 터뜨렸다. 며느리와 손자가 하도 서럽게 울어대자 일부의 어머니도 울음보따리를 풀고 말았다.
일붕은 어머니가 울고, 아내가 울고, 자식이 우는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자신마저 눈가에 눈물이 고이는 것을 느끼고 급히 고개를 돌려 눈물을 감추었다. 하늘을 쳐다보았다.
맑았다.
마음속으로는 울지 마시오. 울어서 될 일이 아니 오를 반복했지만 하도 서럽게 우는 모습을 보니 자신도 눈물이 글썽거렸다.
정말 슬프므로 우는 것이 아니라 울기 때문에 슬픈 것인지도 모른다. 눈물바다는 쉽게 거두어질 기미를 안 보였다. 이럴 때 말이 필요 없다는 것을 이미 경험한 일붕은 그저 가만히 있었다.
시간이 흘렀다.
울기도 힘든 것이다.
울다가 지친 내색이 보이자 일붕은 조용히 다가갔다. “어려운 일인 줄 알지만, 기왕 떠나는 사람이니 가볍게 떠나도록 도와주십시오.
부탁입니다.” 어머니도 아내도 어깨까지 들썩거리던 울음을 삼키려 노력했다.
눈빛이 마주쳤다.
어머니는 눈으로 말했다.
'부디 건강히 잘 보내라.‘
아내도 눈으로 뜻을 전달했다.
‘이 무정한 사람아, 부처가 뭐라고 핏덩이 같은 자식과 갓 피어난 꽃은 아내를 두고 간단 말이오. 어쨌든 잘 되시오.
일붕은 눈인사를 나누고 발걸음을 옮겼다. 천 근같이 무거운 발걸음이었다. 순간 '무엇을 위한 출가인가 하는 의문이 생겨 '모든 것을 팽개치고 돌아설까'하는 마음도 일어났다. 몇 걸음 더 옮겼다. 뒤돌아보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마음이 약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내가 달려와 손을 붙잡을 것 같았다. 재롱을 부리던 아들 녀석이 눈에 선했다. 그 부드러운 볼, 고사리 같은 손, 태초의 정기를 간직한 맑은 눈, 방글방글 웃던 얼굴···'약해지면 안 된다.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가. 약해지지 말자. 더 멀어지도록 빨리 걷자 자신을 끝없이 추스르며 모퉁이를 돌고 돌아 마을이 보일락 말락 한 곳에 이르러서 뒤를 돌아보았다.
어머니도, 아내도, 송묵이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점이 있었다. 집도 바위도 나무도 사람도 하나의 점일 뿐이었다. 점은 곧 없어져 무(無)로 화(化)했다. 인간적인 괴로움도 번뇌도 차츰 사그라지었다.
일붕은 걸음을 재촉했다. 일붕은 19세에 <산방굴사> 강혜월 스님으로 부터 계를 받고 회암(悔巖)이란 법명을 받았다. <법정사>와 <산방굴사>를 오가며 예불과 예식을 익히며 불경을 공부하다 1년 후 제주를 떠나 더 넓은 세계로 나가려고 속에 들러 여비를 마련했다. 이때 또 한번 애별이고(愛別離苦)의 고통을 맛보았다.
지리산 <화엄사>의 진진웅 대강백을 스승으로 모시려 목선을 타고 떠났다. 도중에 풍랑을 만나 죽을 고비를 맞이했으나 기지를 발휘하여 모두를 살리고 거지꼴로 <화엄사>에 도착한다. <화엄사>에서 공양주, 채공, 부목 등을 하면서 행자 생활을 다시 겪다가 사집과 사교를 건너뛰어 <화엄경>의 교학에 입문했다.
1935년 가을, 법랍 4세, 세수 22세가 되던 해 진진웅 대강백의 수제자를 따라 전북 완주군 <위봉사>로 갔다가 주지 유춘담 스님의 제자가 된다.
유춘담 스님은 일붕이란 호를 내리고 애제자로 삼았다. 그러나 주로 <송광사>에서 열던 강원이 재정난으로 문을 닫자 춘담 스님의 소개로 서울 동대문 <개운사 대원암>에 계시던 박한영 대강백의 제자가 된다.
박한영 대강백은 노재봉, 진진응 스님과 함께 불교계의 세 번째 천재로 불리던 분이라 학인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이곳에서 일붕은 4년여를 머무르며 사교 과와 대교 과를 마쳤다. 박한영 스님은 일붕을 특히 아껴 불교뿐만 아니라 동양학의 전반적인 지식을 전수하여 주었고 자신의 필사본 사기(私記)까지 물려주었는데, 일붕은 이때 만해 한용운, 춘원 이광수, 육당 최남선 같은 당대의 거물들을 만났다.
박한영 스님은 불교전문학교(동국대 전신) 교장을 지낸 분이라 발이 넓었다. 일붕의 학문이 경지에 오르자 그분은 강원도 오대산 월정사> 강원의 강사가 되도록 주선했다. 일붕은 포광 김영수스님이 계시던 전북 김제 <금산사>로 내려가 6개월간 식수 행상을 공부하고 <월정사>로 향했다.
문수도량 오대산 월정사>에서 일붕은 <상원암>의 선원을 이끌고 계시던 방한암 스님을 만나 禪에 관한 지도를 받는 한편 20대 후반의 나이에 강원의 강사가 된 일붕이 나아갈 길을 제시해 주었다.
어느 날 세속의 부인 이씨가 찾아왔으나 차갑게 대해서 돌려보냈다. 부인으로부터 어머님의 별세 소식을 들은 일붕은 혼절할 정도로 놀랐으나 곧 정신을 차려 백일 간의 지장 기도를 정성껏 드렸다.
일붕은 <월정사> 시절 지극한 기도를 올려 문수동자를 두 번이나 친견하는 즐거움을 얻었다. 일본의 명성이 알려지기 시작할 무렵 포교왕 김태훈스님이 해외 유학을 권했다. 항상 신학문에 대해 갈망을 하던 일붕은 이종욱 주지 스님의 협조로 일본 경도 임제종 <묘심사> 경내에 있는 임제대학전문부에 유학한다.
일본의 패망과 함께 귀국한 일붕은 종로구 창신동 <안양암> 포교사로 있으면서 동국대학을 마친다. 동국대를 졸업한 후에는 전북대, 원광대, 항공대, 국학대, 부산대, 해인대, 동아대 등의 대학 강단에 섰다. 또한 해동고 교장과 경남일보 논설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1958년에는 아세아재단의 지원으로 제5차 방콕 세계불교도대회 한국 측 대표로 하동산 종정, 이청담 총무 스님 등과 참석했다. 대회가 끝나고 동아대 철학과 주임교수로 재직 중일 때 미얀마 상가대학 교환교수로 초청을 받았다.
상가대 교환교수직을 마치고 나서는 인도 성지순례를 거쳐 독일 함부르크대, 영국 런던대, 스리랑카 Vidyodaya대 등에서 교수를 맡았다.
1962년 5월 25일에는 귀국길에 대만 삼장학원 백성법사로부터 불교계 최고의 영예인 삼장법사 인가를 받고 박사학위까지 취득했다.
다시 한국에 온 일붕은 <불국사> 주지와 동국대 교수를 겸임하여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미국 컬럼비아대로부터 교환교수로 초빙한다는 초청장이 날아왔다.
일붕을 아끼던 불교계 인사들이 장기간의 외국 생활이 국내 기반을 무너뜨린다며 미국행을 재고하라고 권하자 “허-허, 답답하고 안타까운지고, 천지가 내 집이고 인류가 한 식구거늘 어찌 그리 옹졸한 생각에 젖어 들 있소이까” 하면서 바랑을 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