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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법왕 일붕 서경보 큰스님 전기집, 오! 한국의 달마여 3

원효의 뜻을 새기며

법왕청신문 이존영 기자 | 세계 문명의 새로운 중심지가 된 미국에 직접 뛰어들어 미국을 배우고 한국의 불교를 알리겠다는 각오로 이미 기반이 다져진 한국을 떠날 준비를 하던 일붕은 지나온 세월을 되돌아 보았다.

 

 

참으로 바쁘게 살아온 세월이었다. 한날한시도 헛되이 보낼 틈이 없이 늘 시간에 쫓기면서 보낸 지난 50년이 주마등처럼 스쳐갔고, 잊을 수 없는 장면들이 파노라마처럼 전개되었다.

 

가슴이 찢어지고 창자가 끊어진다는 애 별이고(別離苦)의 고통을 이겨내고 세속 떠나 부처님 품 안에 안긴 32년 전 일이 마치 어제처럼 선명하게 떠올랐고, 스승을 찾아 뭍으로 나와 지리산 〈화엄사>로 들어간 시절이 생생하게 재현되었다.

 

<화엄사>에 계시던 진진응 대강백의 제자를 따라 전주<위봉사>로 가 유춘담 스님으로부터 일붕(一鵬)이란 법호(法號)를 받던 일, <위봉사>의 살림이 어렵게 되어 강원이 폐지되자 춘담스님이 마련해준 학비와 소개장을 들고 서울로 올라와 동대문에 있던 <개운사 대원암>의 박한영 대강백의 수제자가 된 일,

 

강원도 오대산 <월정사> 선방의 강사 초청을 받고도 부족한 부분을 더 채우기 위해 김제 <금산사>를 찾아 김포광 스님께 식수 행장을 마친 일, <월정사>에서 당대의 善知識 방한암 스님의 아낌을 받던 일, <월정사>까지 찾아온 세속의 부인을 차갑게 되돌려 보내고 어머님의 부음에 혼절한 일 등이 차례로 지나갔다.

 

문수동자를 친견하고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귀국하여<안양암>에 머물면서 동국대를 마친 일, 김포 광(包光) 스님의 소개로 <금산사>의 말사인 군산의 <은적사,隱寂寺>에 머물며 전북대와 원광대(당시는 唯一學校)에서 동양 윤리와 경전을 강의하던 초창기의 교수 시절, 해인 대학교수로 일하던 진주의 <금선암, 金仙菴> <연화사, 蓮華寺> <의곡사, 義谷寺>의 생활, 아시아재단의 배려로 하동산(河東山) 종정·이청담 총무원장과 함께 다녀온 제5차 세계불교도 방콕대회의 추억, 부산대와 동아대에서 강의하면서 해동고 교장을 역임했던 부산의 <금강사, 金剛寺><법륜사, 法輪寺> <법제사, 法濟寺> 등의 절들, 미얀마 상가대·서독 함부르크대·영국 스리랑카 Vidyodaya대 등에서 교환교수로 있었던 이국의 삶, 자유중국에서 첫 박사학위를 받던 감격, 불국사 주지로서의 동분서주 등이 끝없이 이어졌다.

 

 

일붕은 이미 최고의 학식과 경륜을 가진 승려로서 국내외에 이름이 알려진 상태였으며 저서만 해도 아메리카로 가기 전에 23권을 간행한 상태였다. 

 

동국대 재학시 부터 책을 펴내기 시작했으며 부산의 <동래포교당>에서는 해동불교 역경원을 세워 어려운 불경을 쉬운 우리말로 옮기는 작업을 활발하게 진행했다.

 

당시 우리나라에는 조계종과 동국대에서 경영하던 서울의 호국 역경원이 유일한 번역기관이었으니 일붕이 얼마나 발 빠르게 움직였는가를 짐작할 수 있겠다. 그때 세운 해동불교 역경원에서는 부정기간행물<海東法輪>을 발간했는데, 후에 <금강사>로 기념비를 옮겨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금강사>는 부처님의 가피로 자신의 중병을 고친 김월화 보살이 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1953년에 창건한 절로 일붕을 주지로 모셨다. <금강사>는 후에 일붕이 부산에서 활동하는 동안 중심 사찰이 되었으며, 한 미국제 불교수도원으로서 국제 포교의 요람이 된다. 베나레스(녹야원, 포공스님 설립) 학생회도 이 <금강사>를 중심으로 활동을 했다.

 

 

“사찰을 중심으로 한 설법과 외부의 초청 강연은 그 한계가 있습니다. 즉 시간이 가면 쉽게 잊히기 마련이지요. 또한, 포교의 상대가 너무 소수에 그치게 됩니다. 

 

반면 언론이나 서적을 통한 포교는 일시에 수많은 사람을 상대할 수 있고 오랫동안 지속한다는 장점이 있지요.” 일붕이 평생을 두고 서적 간행에 애써온 이유를 설명한 것이다. 

 

그래서 일붕은 잡지, 신문, 방송 등의 매스컴을 최대한 활용했다. 진주에 가자마자 설창수 씨가 사장으로 있던 경남일보의 논설 위원직을 수락한 것도 이런 생각을 반영한 것이다.

 

<자유민보>에 1959년 2월 19일과 20일에 걸쳐 분재한 <불교문헌의 대중화>란 글은 지루하고 난해한 불경보다는 그때까지 도외시돼온 일화 중심의 이야기를 많이 번역해 소개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佛敎文獻의 大衆化>


불교 서적을 접하는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알기 어렵다고 한다. 또 교리가 무미 담백하다고 말한다….과연 어렵고 무미 담백한가. 나는 여러 해를 두고 그 이유를 연구하였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불교는 모든 학술을 총망라한 큰 보고(寶庫)이다.

 

이를 세 분야로 크게 나누면 철학, 종교, 문학 방면으로 나눌 수 있다. 그중 사원에서도 많이 사용하고 세상에서도 널리 알려진 것은 철학과 종교이다. 문학적인 분야가 알려지지 않은 까닭이다.

 

<능화경> <반야경> <원각경> <화엄경>과 같은 철학 중심의 서적만을 보는 이는 그 교리가 무한히 심오하여 진리가 어느 곳에 있는 줄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자연히 알기 어렵다고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 <지장경> <십육관경> <무량수경> <아미타경> <미근상생경> <약사본원경> <법화경>같은 신앙 중심의 서적과<불토장엄론> <지옥변상설> <공덕찬란론> 등을보게 된 이들은 자연히 무미건조하다는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아함경> <보요경> <출요경> <현유경> <잡보장경> <백유경> <법사비유경> <삼세인과경> <선악보응경> 등은 비유문학을 중심으로한 서적들이기 때문에 책이 쓰일 당시의 사회상을 재미있게 담고 있으며 실제 생활에서 나타나는 문제를 풍자와 비유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므로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르는 무식한 이들도 듣기만 하면 깨우칠 수 있도록 쉽게 구성되어 있다. 즉 모든 것은 과거의 전생으로부터 내려오는 인연에 의해서 결정되므로 착하고 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권선징악을 담고 있다. 

 

인간들이 누구나 겪는 눈물, 고민, 한숨, 기쁨, 화냄, 즐거움에서 비롯되는 욕심과 집착의 정체를 낱낱이 해부한 다음 결국은 환상과 꿈으로 끝나는 무상한 것이 인생이므로 세상의 일에 너무 집착하지 말고 영원한 대도(大道)인 깨달음의 세계로 향하라는 것이다.

 

이 같은 서적은 듣고 볼수록 재미가 있고 감정의 변화를 일으킨다. 그 속에 인생의 희로애락이 들어있기 때문에 때로는 즐겁고, 기쁘고 때로는 슬프고, 때로는 우습고, 때로는 신나는 장면이 등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서적들은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사원에서 잘 사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구하여 보려 해도 좀처럼 구할 수가 없었다. 불교의 대중화를 위하여 걱정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비유경의 한 예를 들어 보자.
今日營比事하고
明日造被事하여
樂着不視若가
不覺死不至니라.
오늘은 이 일을 경영하고 / 내일은 저 일을 주선한다고 하여 / 애착에 빠져 괴로움을 모르고(허덕이다가 / 부지불식간에 어느 귀신이 잡아가는지도 모르게 죽음이라는 사귀에게 잡혀간다.

 

옛날에 한 걸인이 있었다.

그는 산으로 들로 얻어먹고 돌아다니다 어느 날 산골로 들어가게 되었다. 마침 소나기가 쏟아졌다. 비를 피할 곳을 찾다가 산비탈에 있는 동굴을 발견하자 그곳으로 달려갔다.

 

비를 피하고 난 걸인은 동굴을 탐색했다. 그러다 돌항아리를 발견하고 그 뚜껑을 열었더니 황금이 가득 들어있었다. 너무 기쁜 걸인은 황금을 꺼내어 바닥에 놓고 온갖 몫으로 나누었다. 장가들 몫, 집을 살 몫, 밭을 살 몫, 아들을 키울 몫, 딸을 시 시집보낼 몫….… 등으로 나누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때 산적 한 놈이 비를 피하려 그 동굴에 들어 왔다가 그 모습을 숨어서 보다가 "야, 이놈아!


타령은 그만두고 나의 칼부터 받아라." 하고는 그 걸인의 목을 자르고는 황금 덩이를 모두 빼앗아 갔다.

 

이야기에 나오는 걸인은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을 비유한 것이다. 돈벌이에만 눈이 어두운 사람들은 늘 이렇게 생각한다. '내가 만약 얼마를 벌면 얼마는 어디다 쓰고, 얼마는 누구를 주고, 얼마는 무엇을 사고…’


그러나 죽음이란 적은 언제 온 지도 모르게 슬그머니 찾아와서 하고 싶은 일을 마치기도 전에 우리 인간을 데리고 간다. 이 얼마나 모골이 송연하고 소름이 끼치는 일인가. 그런데도 우리는 죽음을 피할 아무런 대책이 없다.


이런 종류의 설화가 비유경에는 수도 없이 많다. 나는 팔만대장경 안에 있는 쉽고도 감화력이 큰 이야기를 쉬운 우리말로 옮겨 세상에 내놓는 일을 하려고 한다….


바로 그 길이 불교 문헌의 대중화와 포교의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이때 주장한 흥미로운 이야기 위주의 불교 소개는 동남아와 유럽에서 한국의 선불교(禪佛敎)를 이해시키는 힘이 되었으며 미국 포교할 때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