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왕청신문 이존영 기자 | 1964년 8월 29일. 세속의 나이로는 51세, 법랍 33세가 되던 해, 갑진년(甲辰年) 음력 칠월 스무이튿날.
일붕은 마침내 미국으로 향하는 영국 항공사의 트랩을 올랐다.
이 해에 국내에서는 대일 굴욕외교반대 범국민특위가 결성되고 김종필, 오히라의 메모로 불이 붙은 데모 격화로 서울 일원에 비상계엄령선포(6·3사태), 월남파병을 위한 국군파견에 관한 협정체결, 동양방송 개국, 석굴암 복원공사 항공기 국내 첫 취항 등이 있었고 미국 레인저 착륙, 맥아더 사망, 소련 흐루쇼프 실각과 브레즈네프 입각, 존슨 미국 대통령 당선, 중공 제1회 원폭실험 성공 등이 있던 해였다.
인공위성 6호 발사 및 同 7호 달 표면 착륙, 맥아더 사망, 소련 흐루쇼프 실각과 브레즈네프 입각, 존슨 미국 대통령 단선, 중공 제1회 원폭실험 성공 등이 있던 해였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중국 승려 경륜조사慶輪祖師와 불교협회 초청으로 미국행 비행기에 오른 일붕은 동남아시아 미얀마와 스리랑카, 유럽의 서독과 영국에서 보낸 교환교수 시절과 6·25 때의 고생이 연상聯想작용에 의해 겹쳐졌다.
참으로 힘들고 어려운 시기였다. 동남아에서는 더위와 오후 불식(하루에 두 끼니 즉 아침과 점심만 먹는 소승불교의 계율)으로 괴롭힘을 당했고, 유럽에서는 낯선 생활방식과 입에 맞지 않는 음식으로 고생을 했다.
일붕은 독일 함부르크대학 교환교수 시절 그곳의 불교 신도들과 포교당에서 주로 숙식을 해결했는데, 유학생의 소개로 포교당에 들어가기 전의 가정집에 있을 때 향불에 캐비닛이 조금 그을렸다 해서 변상해준 일이 있었다.
그 집에서는 친절한 남편에게 독일어를 잘 배웠다. 자유롭게 생활하고 싶어 가정집을 나와 포교당에서 살 때는 연극영화업에 종사하던 처사 한 사람이 자신의 작품에 출연해달라고 하더니 간첩 노릇을 하던 배역을 주어 그만두기도 했다.
아무리 작품이라지만 한국을 대표해서 교환교수로 온 승려인 자신이 그런 못마땅한 역을 맡을 수 없다는 이유였다.
런던대학에 나갈 때는 런던포교원의 몰지각한 인사가 차 심부름을 매일 하라기에 ‘그럴 수 없다’라고 거절했더니 다음에는 '최면술을 배우라'고 강권했다.
미얀마를 떠나 인도 성지순례차 내린 캘커타에서는 영문을 모르고 호텔 측의 친절을 받았다가 돈이 없어져 쩔쩔매기도 했다. 이 생각 저 생각이 뒤범벅된 가운데 6. 25의 경험도 되살아났다.
일붕은 6.25가 터졌을 때 화계사 뒤편에 있는 독성굴獨聖窟에서 밤샘 기도를 하고 있었다.
마음을 정리한 일붕이 피난하려고 할 때는 이미 한강 철교가 끊긴 뒤라 이곳저곳의 절에서 피신하다가 겨우 한강을 건너 위봉사와 송광사를 거쳐 봉서사의 말사인 칠성암七星菴에서 머물렀다.
이때 혼란한 심경을 詩作과 산중기도로 달랬다. 9. 28수복 후에는 안양의 이름 없는 절에 머물다가 간첩으로 오인을 받아 경찰서에서 설교하여 오해를 벗었는데, 이때 얻어먹은 쌀밥 한 그릇을 평생 못 잊고 있다.
그 시절 일붕은 그야말로 草根木皮로 연명했다. 산짐승과 날짐승이 먹는 것은 다 먹었다고 일붕은 술회했다.
도토리, 날콩, 솔잎, 송피 등을 닥치는 대로 구해서 생명을 이어간 것이다. 바로 그때의 쓰라린 경험이 후일 음식이 맞지 않는 외국 생활을 할 때마다 '도토리와 날콩으로도 먹고 살았던 난데, 무엇을 가리라'는 생각을 하고 이겨낸 것이다.
삶과 죽음을 동일 선상에 놓고 바라보는 여유도 그 당시의 참혹한 주검을 수없이 목격했기 때문에 비교적 이른 나이에 생겼다. 인생무상과 육신 무상도 6. 25때 몸으로 느끼며 터득한 진리이다.
비행기 아래로 보이는 태평양을 내려다보면서 일붕은 이렇게 다짐했다.
이번의 미국행은 어느 외국행보다 의미가 크다. 이미 세계의 중심이 된 미국에 최초로 입국하는 한국의 승려라는 것도 그렇고 나의 성장을 기약하는 발판이 된다는 점도 그렇다.
내가 제대로 뿌리를 내리면 한국의 불교가 세계만방에 퍼져나갈 것이지만, 만약 좌절하거나 행실이 바르지 못해 오점을 남긴다면 한국불교가 망신을 당하게 된다.
늘 이 점을 명심하자. 나의 잘못이 곧 한국불교의 잘못으로 인식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또한, 나는 삼장법사라는 영예로운 인가를 국제적으로 받은 사람이 아닌가. 그렇다! 나는 현대판 삼장법사로서 서유기나 왕오천축국전의 현장법사와 혜초 법사의 활동을 뛰어넘는 승려가 되자.
바로 그 길이 내가 꿈꾸던 이상이요, 보람이 아니었던가. 기회는 많지 않다.
이제야 비로소 일붕이란 법호에 걸맞은 날갯짓을 시작한 셈이다. 뛰고 또 뛰자. 천하를 한 번의 날갯짓으로 뒤덮는 붕새의 위업을 되살려야 한다.
그러려면 용맹정진하되 겸손해야 하며 실력과 적응력을 길러야 한다. 일붕아!
이제 시작일 뿐이야. 그동안 갈고닦은 기량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한편 新文物을 익히고 한국불교를 해외에 알리는 선구자란 사실을 자나 깨나 머리에 새겨야 한다..
선구자는 항상 고독하고 외로운 법.
일붕! 마음을 단단히 다지게. 결심하기에 따라, 마음먹기에 따라, 행동하기에 따라 무한한 명예와 영광과 존경을 한 몸에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어떤 경우에도 부처님의 말씀과 佛法의 正道를 이탈하지 않아야 한다.
이 같은 다짐과 각오를 스스로 다지는 사이 비행기는 고도를 낮추고 착륙 준비에 돌입했다. 머나먼 여행을 마치고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한 것이다.
미국의 생활은 샌프란시스코에서 시작되었다.
첫 거주지는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중국사찰이었으나 곧 뉴욕 리버사이드의 일본 절 <西本願寺>로 옮겼다. 이 절은 일본 京都에 본부를 둔眞宗 사찰인데, 지금까지 건재하다.
일붕이 여장을 풀고 컬럼비아대 교환교수로 일하면서 가장 먼저 주안점을 두었던 일은 미국 불교계의 현황을 파악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생각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유효적절한 포교를 위한 대책을 수립하기 위해 현황 파악이 급선무였으나 유학생이나 교포 가운데 불교에 깊은 관심을 가진 이가 없었고 한국에서 건너온 승려는 전무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아무나 붙잡고 물어볼 수도 없었고, 그렇게 한다고 해서 될 일도 아니었다.
고심 끝에 컬럼비아대 교수들과 불교회를 통해 어느 정도의 윤곽을 잡았다. 이후에는 나름대로 발로 뛰고 정보를 입수하여 종합적인 데이터를 확보했다.
이 사실을 알고 나자 차라리 모른 것이 더 좋았을 것이란 결론을 얻었다. 그만큼 비관적인 상황이었다. 일붕은 원래 포교를 목적으로 미국에 간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승려 된 신분으로 포교에 나서지 않는 것은 어불성설이어서 먼저 현저의 실정을 알고자 현황을 파악한 것이다.
그런데 이미 다른 나라의 불교가 본국의 지원에 힘입어 사원을 세우고, 승려를 파견하고, 번역된 출판물을 앞세워 활발한 포교에 나선 것이 확인된 것이다.
힘이 빠졌다. 우리나라는 무엇을 했는가 하는 회의가 일었다. 특히 우리에게 불교를 배워간 일본의 활약은 실로 눈부신 성과를 이루어 놓았다. 가는 곳마다 일본 불교의 사원이 보였고 일본인 승려가 눈에 띄었다.
일본인 스즈키 다이세쯔鈴木大雄 같은 학자는 언어상의 불편을 없앨 목적으로 미국인 부인을 얻어 왕성한 집필과 연구에 매진한 결과 일본 불교를 전 세계에 알렸으며 동양 불교학의 대명사가 되었다.
임제종 신도였던 스즈키 다이세쯔는 박사학위도 많이 취득했는데, 역시 박사인 딸과 부인의 헌신적인 협조 때문에 40여 권의 영문 서적을 펴냈다.
그 책들이 주로 선(禪)을 다룬 불교 철학 저서들인 관계로 그가 禪 대신 젠(Zen)이란 일본식 발음으로 표기한 탓에 지금도 구미인들은 禪을 젠으로 알고 있으며 거의 굳어진 상태다. 일본 외에는 스리랑카, 중국, 몽고 등의 불교가 자리 잡고 있었다.
일붕이 자세히 분석한 결과 미국에 불교가 최초로 들어온 것은 1883년 시카고시에서 열린 콜럼버스기념 만국박람회' 시 16개 종교 대표가 모였을 때라는 것과 그 이후 주로 다섯 가지의 통로를 거쳐 여러 불교가 수입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미국에 불교가 들어간 계통은 다음과 같다.
첫째는 해외 포교에 일찍 눈을 뜬 스리랑카의 소승불교가 독특한 사원의 건축물을 앞세워 진출한 것이고,
둘째는 호기심에 끌린 미국인이 스리랑카의 사원에서 기초적인 수양을 쌓고 다시 스리랑카에 유학하러 갔다가 머리를 깎고 승려가 돼 돌아온 경우이다.
셋째는 일본 불교의 각파가 각개 약진식으로 진출한 대승불교이고,
넷째는 중국 승려가 교포를 상대로 포교에 나서는 경우였다.
다섯째는 티베트와 몽고 계통이 스며든 케이스였다.
우리나라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전혀 없는 상태라 싹도 자라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한국에서 불교를 믿던 사람까지 미국에 가면 기독교를 믿어야 출세를 하게 되고 처세에도 도움이 된다고 여겨 종교를 바꾸고 있었다.
그 원인은 교포들의 탓이라기보다는 절도 승려도 없게 만든 불교 관계자의 책임에 있다고 보여 진다..
상황이 어렵다고 포기할 일붕이 아니었다. 간절한 기도로 원력을 세운 일붕은 이렇게 다짐했다.
'부끄러운 일이다. 우리에게 불교를 배운 일본은 이미 저만치 앞서가고 있는데 우리는 달릴 준비운동도 안되었다니… 그렇지만 열심히 하면 곧 따라잡고 앞설 수도 있다.
나는 동남아와 유럽을 돌면서 명문대학의 교수를 지낸 사람이 아닌가. 늦었다고 깨달을 때 시작하면 가장 빠르지 않은가. 무엇보다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민족이 아니던가. 한번 해보자'
객관적으로 비교하면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일본인 승려들과 일붕은 상대가 못 되었다. 그렇지만 그들은 몇십 년 빨리 시작했고 그동안 만만찮은 여건과 탄탄한 포교의 실적을 쌓았다.
그 넓고 넓은 미국 땅에 단 한 개의 한국 절도, 단 한 명의 한국 승려도 없을 때 일본 승려는 가는 곳마다 먹색 승복을 휘날리고 있었고 높게 지은 일본 사찰이 보였다. 불교단체와 학술단체도 대부분 일본인이 조직하고 주도하는 것들이었다.
해맑은 일붕의 얼굴에 걱정이 서리고 막막한 마음에 넋을 놓고 있던 어느 날, 참선을 마친 일붕은 무릎을 '탁' 치면서 일어났다. '그래, 그거야. 바로 그거야.' 날아가고 싶었다.
방법론을 찾은 것이다. 짧은 시간에 최대의 성과를 얻을 수 있는 묘책이 떠오른 기쁨의 표시를 그렇게 한 것이다.
교포들이나 동양인을 상대로 한국의 불교를 알리기에 앞서 미국 사회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을 먼저 신자로 만들자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미국의 저명한 인사나 지식인은 접근하기가 어렵지만 한번 사람을 믿으면 철저히 믿는다는 점을 생각한 것이다. 만일 그렇게만 된다면 그 효과는 일반인 신도를 수천 명 만드는 것보다 클 것이 확실했다.
열매는 의외로 빨리 열렸다. 개별적으로 참선을 지도하면서 떠날 때 가져간 한국의 문화유적이 담긴 슬라이드를 틈나는 대로 상영하는 사이에 사람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글 / 초대법왕 일붕 / 필수자 비서실장 담화총사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