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왕청신문 이존영 기자 | 법왕청의 설립 취지 유사 이래 전 인류가 갈망하고 추구해오던 자유와 평화 그리고 행복은 노력이 증대되고 시간이 흐를수록 결과적으로 기대와 상반된 역 현상의 불행만이 가중되고 있으므로 세계사는 새로운 질서와 가치를 절규해 맞이하는 실정에 놓여 있다. 따라서 진정한 자유와 평화 및 행복을 개시할 전 세계 불교지도자는 일대 각성하여 기성 가치관에 대처할 새로운 생명질서를 위하여 일치단결하여 일력 탄생의 세계적 운명을 압정 할 새로운 불교 이념과 방법을 구체적이고 생동성 있게 새로운 각도에서 연합 제시할 의무를 져야 하며 또한 인류평화를 위하여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 다른 종교 지도자(가톨릭, 모슬렘, 개신교 등) 와도 폭넓은 대화를 가지면서 당위적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데 전력고자 함에 있다. 법왕청 주요 목적 사업 1) 전 세계 모든 불교도로 하여금 부처님의 추종자로서 하나의 목표하에 단결하여 함께 모이게 한다…. 2) 전 세계 불교도들의 상호 이해를 증진하고 그들 의 공동이익을 보호 한다. 3)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파, 보호, 장려한다. 4) 불교의 연구 활동 및 통일 교전 출판업무를 추진한다.. 5) 인류문명의 기초
법왕청신문 이존영 기자 | 보통 사람은 평생에 한 권을 내기도 어렵다는 저서를 어떻게 9백여 권 가깝게 쓸 수 있었을까요? “처음으로 책을 쓴 것은 종로구 창신동 안양암에서 동국대를 다니며 포교사로 일할 때였습니다. 그때 학생 신분으로 불교 입문, 불교학개설, 석가여래와 그 제자 전, 한국불교 역사 등을 썼습니다. 부처님의 말씀을 널리 전하자는 차원에서 불특정다수를 상대로 한 포교의 한 방편으로 책을 펴낸 것이지요. 이후의 여러 책도 같은 범주에 넣을 수 있겠지요. 다만 한시의 경우는 약간 다르겠지요. 시상詩想이 떠오르면 즉시 메모하는 것을 습관화했습니다. 메모지가 없을 때는 손바닥이나 나뭇잎에도 기록합니다. 한시漢詩는 오랫동안 공부했기 때문에 자유자재로 운을 맞추고 쓸 수 있습니다. 다른 저서는 생각을 정리하고 포교를 위한 법어나 강연한 내용 들이 어느 정도 모이면 책으로 펴내곤 했습니다. 이런 생활 태도를 보인다면 누구나 많은 책을 낼 수 있을 것입니다. 항간에서는 다른 사람이 글을 쓰고 서경보란 이름만 붙인다고 비난하는 사람도 있는 모양입니다만 양식이 의심스러운 사람들의 입에서 나온 소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식으로 얘기한다면 역사적으로 유명한 '게티즈
법왕청신문 이존영 기자 | 이 글은 일붕 서경보 법왕을 독자들이 쉽게 이해하도록 하기 위하여 당시 법왕청 담화 이존영 비서실장이 각종 신문, 잡지, 회보, 방송 출연 테이프, 저서, 전기 등을 종합적으로 비교 검토하여 비교적 객관적인 입장에서 정리한 것이다. 일붕은 언제 어디서 출생했으며 몇 세에 어떤 스님께 머리를 깎았습니까? “1914년 10월 10일 제주도 남군 중문 면(현 서귀포시) 도순리 301번지에서 할아버지 서봉진(徐鳳辰)아버지 서성현(徐成賢)의 손자와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조부는 3형제 중 장남이었고 아버지는 3남 5녀의 장손이었습니다. 법왕의 형제자매는 3남 2녀인데 장남입니다. 19세에 산방굴사 강혜월 스님을 은사로 하여 불가에 입문했습니다.” 3남 5녀 중 장남. 13대 손孫子:승철·승일가계도(圖)제주목사 서상우(徐相虞)祖父 徐鳳辰祖母(古阜李氏)父 徐成賢母 李卯生本人 徐京保出家 前의 妻 李亥生-3형제중 장남⁺ 京保⁻允保-京垓- 3남2녀중 장남孫女:子 徐松默 子婦 한예선-안나 · 지나 · 후나 利川徐氏 恭度公派 ※ 出生 : 甲寅年 五月 九日 戌時 어린 시절은 어떻게 보냈으며 출가 시 부모님의 반대는 없었습니까?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하면서
법왕청신문 이존영 기자 | 일붕이 템플대에서 박사를 취득하고 한국 불교의 포교사에 그 유례가 없는 실적을 쌓고 있을 무렵 국내의 불교계와 교육계에서는 일붕을 귀국시켜 불교의 현대화를 추진하는 한편 대학 강단에서 2세 교육에 매진하도록 하자는 논의가 있었다. 그러한 소식을 접한 일붕은 귀국하는 것이 옳다고 여겨 주변을 정리했다. 그러자 미국의 법제자들은 아직 확고한 터전이 닦이지 않았으므로 당분간 미국에서 자신들을 이끌어 달라고 붙잡았다. 양 측의 주장이 다 일리가 있었다. 여러모로 분석한 일붕은 일단 귀국하는 방향으로 결심을 굳혔다. 이미 영주권을 가진 신분이므로 출입국이 자유로운 관계로 언제든지 미국을 드나들며 법제자를 지도하는 방법을 택하기로 했다. 일붕의 뜻을 알게 된 제자들은 더 이상 붙잡지 않았다. 그 대신 한국 불교의 참모습을 내외에 내세우는 공개 강연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 제의마저 거절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한 일붕은 흔쾌히 응했다. 공개 강연은 불교 신자뿐만 아니라 동양학과 한국에 관심을 가진 지성인들이 대거 참석하여 마치 세계적인 규모의 학술 세미나가 개최되는 대회장을 방불케 했다. 먼저 일붕이 불교의 전반적인 개요를 말하고 나자
법왕청신문 이존영 기자 | 일붕의 박사학위 취득은 국내외의 매스컴에 뉴스 아닌 뉴스를 제공했다. 구미에서는 논문의 특색에 초점을 맞추었고 국내에서는 박사학위 취득에 비중을 실은 차이점만 있었다. 템플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기 전 일붕에게는 그해 1월 20일 제37대 미국 대통령으로 취임한 닉슨 대통령으로부터 감사의 편지를 보내왔다. 1월부터 조계종 선원에서 정기간행물로 발간한 '불교지’를 닉슨 대통령의 취임 축하 선물로 보낸 데 대한 답례 형식으로 보낸 것이다. “본인은 올해 벽두에 들어서서 미국의 새로운 지도를 마련하는 책임을 지면서 귀하께서 보내주신 정성 어린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귀하께서 주장하고 계신 사상과 베풀어주신 법시 法施는 본인에게 힘과 감명의 원천이 될 것입니다. 1969년 2월 27일 리차드 닉슨" 다른 생각과 평가가 남아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지만 혈혈단신으로 미국에 건너가 백악관이 인정하는 신분이 되었다는 사실은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일붕의 대외적인 활동이 그만큼 힘을 얻은 것이다. 이 해에 일붕은 聖龍(요크 헌)과 聖山(로버트 킹)에게 계를 내려 법제자로 삼았다. 이들은 로스앤젤레스를 중심으로 불교 포교단을 결성하는 등의
법왕청신문 이존영 기자 | 1969년, 일부의 법랍 38세이자 세수 56세가 되던 해 기유(己酉)년 한국에서는 3선 개헌안 국민투표실시(찬성율 77.1%), 김영삼의원 괴한에 피습, 월남 티우 대통령 방한, 천주교 김수환 추기경 서임, 서울시내 중학교 무시험 추첨, 이성계 호국 원본 발견, 국보급 금불상 4점 도굴 매각한 대흥사 주지 구속, 신상옥, 김지미 제15회 아시아영화제(마닐라) 감독상과 여우주연상 수상, 대한항공기 납북 등이 있었으며‘서울의 찬가’와 ‘기러기 아빠’란 유행가가 인기를 얻었다. 국제적으로는 프랑스 드골 대통령 국민투표 패배로 하야, 아이젠하워 미국 전 대통령사망, 로마교황 바오로 6세 5백 년 만에 제네바의 신교연합체 세계선교회의 참석, 월맹 호지명 사망, 아폴로 11호 달 표면 유인착륙, 서독 빌리 브란트 수상 지명 등이 있었다. 한미관계에서는 미국 국무부 주한미군 감축 단행 발표, 애그뉴부통령 방한, 한미국방 각료회의, 하원칼 앨버트 민주당 원내총무 주한미군 감축 전 한국군 현대화 촉구, 최규하 외무장관 한국안보 협의차 방미 등이 있었다. 일붕은 이 해 생애 최고로 기쁜 날을 맞이했다. 오랫동안 고생해온 논문이 정식으로 통과되어 템
법왕청신문 이존영 기자 | 일붕은 이보다 더 높은 경지의 선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일단 경전을 더 공부하라고 이른 다음 그 수준이 일정한 상태에 오르면 보다 차원 높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때 아무리 머리가 좋고 배움이 많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문화적인 토양이 전혀 다른 서양에서 살아온 사람이란 사실을 늘 염두에 두었다. 첫째로는 짧은 시일 내에 동서양의 문화적인 차이에서 오는 미묘한 문제를 극복할 수 없었고, 둘째는 같은 뜻을 전달하더라도 언어구조의 뉘앙스에서 오는 문제까지 뛰어넘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는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의 문제이기도 했지만, 사유체계가 근본적으로 다른 언어구조에서 불가피하게 파생하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계속하여 기초적인 교리만을 반복하여 가르칠 수도 없었다. 일붕에게 귀의하여 불교를 배우는 사람들의 대다수는 이미 내로라하는 대학을 마친 후 다시 여러 종교를 학문적으로 접한 자들이라 항상 지적 목마름을 호소한 탓이다. 사실 미국의 지식인들이 생전 보지도 듣지도 못한 참선을 익히고 불교의 경전을 외우는 이유는 지극한 신심이라기보다는 지적 호기심과 새로운 종교가 갖는 흥미성을 먼저 생각한 까닭이 더 크다고 보아야
법왕청신문 이존영 기자 | 1967년 일붕이 미국에 뿌린 불교의 씨앗이 나날이 자라는 것이 보인 한 해였다. 박정희 씨의 6대 대통령 당선, 동백림사건, 문무대왕릉 발견, 중동전발발, 정일권 총리 방미 등이 있던 정미(丁未)년이었다. 일붕은 소속된 학교를 벗어나 보다 넓은 범위의 대외활동을 전개했다. 2월 23일 로스만 대학에서 종교지도자(가톨릭, 불교, 이슬람교) 대상의<禪佛敎의 救世主義> 강연, 2월 6일과 16일의 필라델피아 라디오방송(禪을 소개), 2월 24일 국제회관의<선의 근본정신> 공개강연, 3월 14일과 16일 췌스트낫 여자대학의<불교의 역사적 발전>, 4월 4일과 6일의<불교의 인생관과 한국의 선> 강의, 드렛셀공대의 초청강연<한국고승의 열반과 사리><소승불교와 대승불교> 강좌, 법률가 및 종교심리학회 강연, 3월 12일의 필라델피아, 뉴욕, 뉴저지 선원 합동 좌 선회, 7월 뉴저지주 리에 촌의 3일간 특별하기 선회, 8월 뉴욕주 택시도 공원 지대와 펌프킨 지대의 특별 좌 선회, 5월 10일 뉴저지주 아틀랜틱 캄유니대학 초청 <한국불교는 어떤 불교인가> 강연, 4월 2
법왕청신문 이존영 기자 | 1964년 10월 4일. 미국 뉴욕의 불교회관. 이날은 한국 불교의 미국 포교에 일대 전환점이 된 획기적인 날이다. 연일 지식인을 상대로 선을 강의하던 일붕의 진지한 태도와 求道者다운 엄숙함, 그리고 엄한 계율에 반한 미국인 네빌 워위크(Dr. Neville Warwich) 박사가 자청하여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은 날이기 때문이다. 네빌 워위크 박사는 20년간 가톨릭 신부로서 가톨릭의 성의聖衣인 로만 칼라를 입고 활동하다가 몇 년 전 神父職을 포기하고 티베트불교 淨土宗에 귀의했다가 일붕을 만나 한국 불교의 승려가 된 것이다. 그는 일붕의 상좌(上佐: 제자)가 되었는데, 일붕이 상좌에게 주로 내리던 돌림자인 道字를 따 도명道明이란 법명을 얻었다. 일붕은 참으로 흐뭇한 마음으로 도명의 건당식建幢式을 치렀다. 건당식이란 눈 밝은 큰스님과 눈 밝은 제자 사이에 법法을 고스란히 이어주고 이어받는 불교의 엄숙한 의식 중 하나이다. 건당식을 마침으로써 네빌 워위크씨는 도명으로 새롭게 태어났고, 일붕은 벽 안의 지식인 상좌를 얻었으며, 한국 불교는 최초의 미국인 승려가 생겨난 것이다. 도명으로서는 가톨릭의 신부복인 로만 칼라 대신 승복을, 성서
법왕청신문 이존영 기자 | 1964년 8월 29일. 세속의 나이로는 51세, 법랍 33세가 되던 해, 갑진년(甲辰年) 음력 칠월 스무이튿날. 일붕은 마침내 미국으로 향하는 영국 항공사의 트랩을 올랐다. 이 해에 국내에서는 대일 굴욕외교반대 범국민특위가 결성되고 김종필, 오히라의 메모로 불이 붙은 데모 격화로 서울 일원에 비상계엄령선포(6·3사태), 월남파병을 위한 국군파견에 관한 협정체결, 동양방송 개국, 석굴암 복원공사 항공기 국내 첫 취항 등이 있었고 미국 레인저 착륙, 맥아더 사망, 소련 흐루쇼프 실각과 브레즈네프 입각, 존슨 미국 대통령 당선, 중공 제1회 원폭실험 성공 등이 있던 해였다. 인공위성 6호 발사 및 同 7호 달 표면 착륙, 맥아더 사망, 소련 흐루쇼프 실각과 브레즈네프 입각, 존슨 미국 대통령 단선, 중공 제1회 원폭실험 성공 등이 있던 해였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중국 승려 경륜조사慶輪祖師와 불교협회 초청으로 미국행 비행기에 오른 일붕은 동남아시아 미얀마와 스리랑카, 유럽의 서독과 영국에서 보낸 교환교수 시절과 6·25 때의 고생이 연상聯想작용에 의해 겹쳐졌다. 참으로 힘들고 어려운 시기였다. 동남아에서는 더위와 오후 불식(하루에 두
법왕청신문 이존영 기자 | 초대법왕 일붕 서경보 큰스님 전기집 오! 한국의 달마여 佛敎와 文學 불교에는 팔만대장경이란 거대한 경전經典이 있다. 이는 종합적인 성격을 가진 방대한 종합 체이다. 따라서 보는 관점과 입장에 따라 여러 종류로 나누어진다. 예를 들면 철학자, 과학자, 문학자, 정치가, 교육자, 미술가, 경제학자, 군사연구가들이 각각 자기의 기준에 따라 팔만대장경을 다르게 평가하는 것이다. 옛 문장가 소동파蘇東坡가 노산盧山이란 높은 산을 이렇게 그린 시가 있다. 橫着成嶺側着峰하니, 遠近高低自不同이라, 不見盧山眞面目은, 只緣身在此山中이라. 이는 다 같은 노산이지만 멀리서 횡(옆)으로 보면 큰 재가 되고 몸을 기울여 올려다보면 높은 봉우리가 된다. 멀고 가까이서 보는 높낮이가 같지 않다. 그러나 노산의 참모습을 보지 못하는 것은 몸이 노산 가운데에 있기 때문이란 의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불교는 보는 자의 생각과 기준에 따라 달리 표현된다. 그래서 한 가지로 규정짓기 어려운 것이다. 불교는 마음 심(心)자 하나를 온갖 형태로 전개 한 것이다. 그런데도 ‘이것이 불교다'라고 단언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 갈래가 워낙 복잡하기 때문이다. 불교는 마음의 근본 바탕
법왕청신문 이존영 기자 l 오한국의달마여! 불교의 4중 세계관 (3) 일붕의 초기 사상을 엿볼 수 있는 글을 두 가지만 더 보기로 하자. 실제 일붕의 초기사상은 미국으로 건너가기 전에 거의 완결된 상태로 짐작된다. 경전의 연구나 선의 수행에서나 모두 최고의 경지에 도달했다는 게 당시의 중론이었다. 불교의 다면성多面性 가운데 문학적인 요소를 간추린 佛敎와 文學이란 글과 불교철학을 압축시킨 佛敎哲學의 四重 世界觀이란 글은 잘 정돈되고 체계화된 그의 내면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글을 통해 일붕은 불교의 대중화란 신념을 점진적으로 구현하는 발판을 구축한 것이다. “모든 것은 변화합니다. 불교도 시대와 여건에 맞도록 변화하고 적응하는 가운데 시대와 조화를 이루는 슬기를 익혀야 합니다. 그래야만 범세계적인 진리로서의 영구성을 확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는 이를 위해 남들이 꿈조차 꾸지 못하던 시절에 물설고 땅 설은 동남아와 유럽에서 공부했습니다.” 일붕이 절치부심하여 불교의 현대화를 추구하는 이유를 짧게 설명한 말이다. 뒤에 싣는 두 글은 당시 일붕이 어떤 사상의 틀을 형성했는가를 잘 나타낸 것이다. 따라서 다소 긴 인용이 되더라도 꼭 살필 필요가 있는 글이다. 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