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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초대법왕 일붕 서경보 큰스님 전기집 오! 한국의 달마여 13

뜰 앞에 선 잣나무 13

 

법왕청신문 이존영 기자 | 일붕은 이보다 더 높은 경지의 선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일단 경전을 더 공부하라고 이른 다음 그 수준이 일정한 상태에 오르면 보다 차원 높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때 아무리 머리가 좋고 배움이 많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문화적인 토양이 전혀 다른 서양에서 살아온 사람이란 사실을 늘 염두에 두었다. 

 

 

첫째로는 짧은 시일 내에 동서양의 문화적인 차이에서 오는 미묘한 문제를 극복할 수 없었고, 둘째는 같은 뜻을 전달하더라도 언어구조의 뉘앙스에서 오는 문제까지 뛰어넘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는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의 문제이기도 했지만, 사유체계가 근본적으로 다른 언어구조에서 불가피하게 파생하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계속하여 기초적인 교리만을 반복하여 가르칠 수도 없었다. 

 

 

일붕에게 귀의하여 불교를 배우는 사람들의 대다수는 이미 내로라하는 대학을 마친 후 다시 여러 종교를 학문적으로 접한 자들이라 항상 지적 목마름을 호소한 탓이다. 

 

사실 미국의 지식인들이 생전 보지도 듣지도 못한 참선을 익히고 불교의 경전을 외우는 이유는 지극한 신심이라기보다는 지적 호기심과 새로운 종교가 갖는 흥미성을 먼저 생각한 까닭이 더 크다고 보아야 한다….

 

이 지적은 구미 불교연구의 권위자인 루이스 R.랭커스터 박사가 동국대 개교 70주년 행사로 열리<불교와 현대세계>란 학술대회에 참석하여 발표한 주제 강연<서방세계에서의 불교 붐과 현실의 의미>에 잘 나타나 있다. 

 

랭커스터 박사는 동양의 종교인 불교가 서방의 포교에 성공하려면 2세와 3세에게까지 무리 없이 전수될 수 있는 ‘지적 공감대와 특수개념의 보편화 추구'라는 양대 요소를 갖추어야 한다고 말했다. 

 

 

즉 포교에 성공하려면 지적인 요소나 호기심보다 정신적인 이질감을 뛰어넘을 수 있는 ‘따뜻한 마음의 전달'을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일시적인 붐의 조성이 아니라 문화적인 신뢰 기반을 형성하여 의식부터 바꾸어 나가는 지속적인 포교가 되어야만 상당한 개종(改宗)의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 같은 점을 고루 배려한 일붕은 일반 신자에게는 인간적인 매력을 강조하고 대학교수를 비롯한 지식인 그룹에는 잘 정리된 교리를 설명했다. 

 

 

다음<선의 진수>이란 글은 지식인 집단을 상대로 한 설교이다.
 
禪은 구체적으로 선나禪那란 용어의 준말로 정定의 뜻을 갖는다. 범어와 한자어를 합하여 禪定이라고도 하는데, 사유수思惟修또는 정려靜廬의 의미가 있다.

 

禪이란 정신을 수련하는 것으로 ‘생각하며 닦는다’ ‘생각을 고요히 한다'라는 뜻이다.

 

우리 보통 사람들은 번뇌망상 煩惱妄想으로 인해 번거롭게 흔들리기 때문에 정신을 통일하는 것이 그 목적이다.

 

그러므로 달마대사도 말하길 “밖으로는 모든 연緣을 쥐고 안으로는 마음에 헐떡임이 없이 마음이 장벽같이 되면 가히 道에 들어갈지니라"라고 하여 선정의 의미를 명백히 밝혔다.

 

 

그러면 정신통일은 무엇을 목적으로 하는가. 道를 얻자는 것인데, 도를 얻는다는 것은 마음의 본성을 보는 것이다.가 객관적 존재인가 주관적 존재인가 하는 것도 문제지만 우리가 도를 보지 못하는 까닭은 道를 볼 마음의 거울이 번뇌에 흐려져서 보이지 않는 것이므로 도를 보기 위해서는 먼저 이 마음 가운데서 기멸 起滅 하는 번뇌를 진정시키고자 하는 것이 禪의 목적이다. 

 

우리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생각은 대개 올바르지 못한 망상이 많은데, 이는 마음의 본성이 아니다. 바다의 수많은 파도가 망상이라면 고요한 바닷물은 마음의 본연의 상태라 할 수 있다. 또 하늘에서 생겨나는 온갖 구름이 번뇌라면 밝은 달은 우리 마음의 본체이다. 

 

이같이 우주의 진리도 우리 마음 가운데 생겨나는 번뇌의 물결과 망상의 구름만 없어진다면 그 본연의 자태를 생긴 그대로 나타낼 것이다. 그러므로 번뇌를 없애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아무 생각이 없이 하는 무념무상 無念無想이 되어야 한다….

 

 

대개 인도에서 행해진 선은 생각을 고요히 하는 방법 즉, 무념무상을 공부하는 것이었다.

 

그러던 것이 달마대사가 중국에 선을 전한 이후로는 이 선도 중국화 하였다. 달마로부터 제6조에 이르기까지는 인도의 선풍禪風이 크게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이후부터는 선종의 가풍이 일변하여 대나무에 소나무를 접붙이는 것과 같이 기괴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어떤 선승이 조주 趙州 선사에게 물었다.
“구자(狗子, 개)도 불성이 있습니까?”
“무(無).…”

 

부처님은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에 불성이 있다고 했는데, 조주선사는 한 마디로 '없다'라고 잘라 말했다. 이것이 문제이다.

 

또 어떤 수도승이 물었다.

“달마가 서천으로부터 중국에 온 의미는 무엇입니까?"
“뜰 앞에 선 잣나무이니라.”
이는 엉뚱한 동문서답이 아니다. 

 

 

어떤 문제에 의심이 생기면 그 의심이 풀릴 때까지 참고하여 연구하라는 뜻이다. 이를 간화선이라고도 하고 공안 또는 화두라고도 한다. 공안 公案은 글자 그대로 수도하는 누구라도 붙들고 싸울만한 의안 疑案이란 의미이다.

 

이 참선을 하는 데는 3가지의 요건이 있다. 대신은 大信根, 대분지 大憤志, 대의정 大疑情이 그것이다.

 

대신근은 부처님이 가르치신 무상대도를 얻고자 하면 먼저 그 가르치심을 철저히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대분지는 무상대도를 얻는 데는 여간한 결심으로는 안 되니 부모를 죽인 원수를 갚는 듯한 일대 불심을 가지라는 것이다. 대의정은 의심하는 마음을 가지라는 뜻이다. 

 

‘철학은 의심으로부터 시작된다.' '의심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것이다.’란 말은 대의정과 같은 뜻이다.

 

 

수도자는 어떤 공안을 가지면 그 문제에 한해서는 가능한 모든 의심을 품고 정진해야 한다. 

 

이때의 의심은 사의邪疑가 아니라 스승으로부터 받은 화두에 대하여 순수 무잡하고 힘찬 의심을 가지라는 지적이다. 참선은 이러한 세 가지의 요건을 선행조건으로 구비 해야 가능하다.

 

그러면 참선을 하여 道를 어떻게 깨치는가. 너무 많은 방법이 있으므로 육조 혜능(六祖慧能)의 오도 悟道 과정으로 대신한다. 육조는 세 살 때 아버지를 잃고 편모슬하에서 성장했다. 

 

자란 후에는 매일 나무를 시장에다 내다 팔아 그 어머니를 봉양했다. 

 

어느 날 나무를 지고 시장에 팔러 갔다가 어느 집에서 승려가<금강경,金剛經>을 독송하는 것을 차분하게 들었더니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基心),즉 ‘빽빽이 있음이 없이 그 마음을 낸다.'라는 구절이 나왔다.

 

 

혜능은 그 구절을 듣는 순간 생생한 꿈에서 깬 듯이 깨닫는 바가 있었다.

 

그래서 그 경의 유래를 물었더니 황매산黃梅山에 있는 홍인선사弘忍禪師에게서 들은 법문이란 것을 알았다.

 

혜능은 어머니의 허락을 얻고 홍인선사에게 찾아가 법을 구하였다. 그랬더니 먼저 이렇게 물었다.“너는 어느 곳으로부터 와서 무엇을 구하고자 하는가?"

 

“저는 영남인으로서 오직 부처가 되기를 구하 나이다.”
“영남인은 불성이 없나니라.”
“사람에게는 남북이 있을지라도 불성에는 본래 남북이 없나이다.”

 

 

홍인선사는 이런 문답을 거친 후 혜능이 큰 그릇임을 알고 다시 더 말이 없이 장작이나 쪼개고 방아를 찧어서 대중에게 공급하는 책임을 맡겼다.

 

육조 혜능은 홍인선사의 지시대로 8개월여를 하루 같이 장작을 쪼개고 방아를 찧었다.

 

어느 날 홍인선사는 제자들을 모아놓고 “生死의 일은 크고 正法을 알기는 어렵다.

 

너희들은 각각 글 한 귀씩을 지어 너희들이 본 바를 말하여라. 만약 진실한 바가 있다면 의발과 법을 전하리라” 하였다. 

 

이때 박학다식하기로 소문난 상좌 신광神光이 하루 만에 게偈를 지어 벽에다 썼다. ‘身是菩提樹, 心如明鏡台, 時時勤拂栻, 勿使煮塵矣’ 즉 몸은 보리수요 마음은 명경대와 같으니 때때로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 진 애가 끼이지 말게 하라는 뜻이었다.

 

 

육조 혜능은 이를 보더니 말이 좋기는 하나 아직 깨달은 것은 아니라고 하면서 이런 게를 지어 화답하였다.

 

‘菩提本無樹, 明鏡亦非台, 本來無一物, 何處煮塵矣’ 즉 보리도 본래 나무가 없고 밝은 거울도 또 한 대가 아니다. 본래 한 물건도 없거니 어느 곳에 진애(먼지나 티끌)끼이리란 화답이다. 홍인선사는 아무런 말도 없었다.

 

그러다 대중이 모두 잠든 후 비밀히 자기 방으로 혜능을 불러 의발衣鉢을 주어 전법을 표시한 후 “너는 속히 달아나야 한다. 아마도 너를 해칠 사람이 있으리라" 하였다.

 

 

혜능은 의발을 받자마자 홍인선사에게 예를 표시한 후 곧 구강역으로 달아나 배를 타고 남행南行을 거듭하여 대 유령에 다다랐다.

 

그때 시기심이 많은 대중이 혜능이 의발을 받은 것을 뒤늦게 알고는 그를 뒤쫓아가 빼앗으려 하였다. 앞장서 추격하던 혜명慧明이 가까이 오자 혜능은 의발을 혜명에게 던지면서 “이 의발은 신信을 표현한 것인데 어찌 힘으로 다투는가”라고 하였다. 

 

그러자 혜명은 “나는 법을 위해서 온 것이요 의발을 위해서 온 것이 아니오니 어서 나를 위해 법을 설하소서”라고 되받았다.

 

혜능은 짧게 말했다.
“선善도 생각지 않고 악惡도 생각지 않는 이러할 때에 어떤 것이 명상의 본래 면목인고?" 혜명은 이 말을 듣는 순간 크게 깨달아 혜능을 인정했다.

 

 

그 후 육조 혜능은 얼마간 자취를 감추고 있다가 광주부(廣州府<법성사,法性寺에 이르러 인종印宗법사가<열반경>을 강講하는 기회를 만났다. 때마침 바람이 불어 절 앞에 달아놓은 깃발이 펄럭였다.

 

이를 보고 한 승려가 “저것은 바람이 동하는 것이다”라고 하자 다른 승려가 “아니다. 그것은 깃발이 동하는 것이다”라고 하여 서로 옳다고 우겼다. 마침내 대중은 반씩 나뉘어 서로 옳다고 주장했다. 

 

이를 지켜본 혜능 선사가 점잖게 일렀다. “이것은 바람이 동하는 것도 아니고, 깃발이 동하는 것도 아니다. 오직 그대들의 마음이 동하는 것이다.” 대중은 모두 놀라 혜능 선사를 향해 합장하여 존경의 뜻을 표시했다.

 

그러면 참선은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가. 수양이 이미 쌓인 사람은 어느 곳에서도 항상 참선이 된다(行住坐臥). 그러나 그것은 드문 일이다. 보통은 고요한 곳에 자리를 정하고 앉아서 좌선한다.

 

좌선 시는 두터운 좌 복을 깔고 가부좌나 반가부좌를 한다. 가부좌는 먼저 오른발을 왼쪽 넓적다리 위에 놓고 왼발을 오른쪽 넓적다리에 놓는 것이다.

 

 

반가부좌는 오른발은 그대로 두고 왼발로 오른쪽 넓적다리를 누르는 것이다.

 

옷 띠는 넉넉하게 매고 오른손을 왼발 위에, 왼손을 오른손바닥 위에 놓고 두 엄지손가락을 서로 맞대고서 정좌해 전후좌우로 기울지 않아야 한다. 

 

귀와 어깨는 일직선이 되고 코와 배꼽은 직선이 되어야 한다. 또 혀는 입천장에 대며 이와 입술은 꼭 다물며 눈은 항상 반쯤 떠야 한다. 

 

 

콧숨은 가늘게 통할 정도로만 쉬며, 몸을 조절한 후에는 숨을 크게 한번 쉬며, 좌우로 흔들어 오뚝하게 정좌한 후에는 비사량 非思量 하라. 이것이 좌선의 요술 要術이다.

 

이렇게 오래 하면 풍파가 자는 물에 명월 明月이 나타나듯이 고요하고도 맑은 마음이 거울 위에 진여 眞如의 명월이 나타날 때가 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