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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법왕 일붕 서경보 큰스님 전기집 오! 한국의 달마여 15

찬연히 빛나는 조당집 15 

 

법왕청신문 이존영 기자 | 1969년, 일부의 법랍 38세이자 세수 56세가 되던 해 기유(己酉)년 한국에서는 3선 개헌안 국민투표실시(찬성율 77.1%), 김영삼의원 괴한에 피습, 월남 티우 대통령 방한, 천주교 김수환 추기경 서임, 서울시내 중학교 무시험 추첨, 이성계 호국 원본 발견, 국보급 금불상 4점 도굴 매각한 대흥사 주지 구속, 신상옥, 김지미 제15회 아시아영화제(마닐라) 감독상과 여우주연상 수상, 대한항공기 납북 등이 있었으며‘서울의 찬가’와 ‘기러기 아빠’란 유행가가 인기를 얻었다.

 

국제적으로는 프랑스 드골 대통령 국민투표 패배로 하야, 아이젠하워 미국 전 대통령사망, 로마교황 바오로 6세 5백 년 만에 제네바의 신교연합체 세계선교회의 참석, 월맹 호지명 사망, 아폴로 11호 달 표면 유인착륙, 서독 빌리 브란트 수상 지명 등이 있었다.

 

 

한미관계에서는 미국 국무부 주한미군 감축 단행 발표, 애그뉴부통령 방한, 한미국방 각료회의, 하원칼 앨버트 민주당 원내총무 주한미군 감축 전 한국군 현대화 촉구, 최규하 외무장관 한국안보 협의차 방미 등이 있었다.

 

일붕은 이 해 생애 최고로 기쁜 날을 맞이했다. 오랫동안 고생해온 논문이 정식으로 통과되어 템플대학으로부터 1월 24일 (그동안의 1월 19일이란 기록은 원본 대조결과 잘못되었으므로 이 기회에 바로 잡는다) 정규 박사학위를 받은 것이다. 

 

학위논문은<祖堂集을 通한 韓國 禪佛敎硏究>(A STUDY OF KOREAN ZEN BUDDHISMAPPROACHED THROUGH THE 'CHODANGJIP')이었다.

 

 

한국 승려 최초로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것이다. 


이전에 백성욱白性郁, 김법린金法麟 박사가 독일과 프랑스에서 받은 일은 있었지만, 미국에서 영문으로 논문을 써서 공식적인 박사학위를 받기는 일붕이 처음 이었다.

 

일붕은 박사학위를 받게 된 공을 협력해준 분들에게 돌리면서 이렇게 회상한다.

 

“당시 템플대학 종교학과장 필립(Dr. Bernard Phillips)씨는 내가 동남아와 유럽의 유명한 대학에서 교환교수를 지낸 경력, 그리고 한국의 각 대학에서 강의했던 이력을 보고 박사학위 과정을 밟아도 무리가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나중에 들으니 불국사 주지와 미국의 여러 대학에서 반응이 좋은 교수 생활을 했던 점도 참고가 되었다고 합니다.

필립씨는 독신자인데 내가 필라델피아 선원에서 참선을 지도한 일이 있던 사람입니다.

 

나는 필립씨에게 솔직하게 한국인이 영어를 아무리 잘해도 미국인 보다는 못할 것이니 여러 가지로 잘 지도해달라고 부탁했지요. 그는 나의 정직성이 들었는지 자주 문제점을 지적하고 어색한 바로잡아 주는 등 성 의를 다 했습니다. 

 

 

마음에 표현을 또 방학 때마다 내가 초안을 잡은 논문을 타자해준 제자들의 노고도 컸지요. 샌프란시스코에 있던 제자들이 많이 도왔습니다.

 

연구논문은 내가 도미하기 2~3년 전 동국대 총장을 지낸 조명기 趙明基 박사가 해인사 대장경을 열람하다가 우연히 발견한<조당집> 이 한국의 불교를 서구인들에게 이해시키는 데 적합하다고 여겨 그것으로 채택한 것입니다.

 

그때 심사에 관여한 한국인 2세로서 워싱턴 공립도서관장을 하던 분의 공도 매우 컸습니다.

 

얼마 전 애정과 성의를 다해 나의 박사학위 취득에 협조해 주신 필립씨가 목병으로 이승을 하직했다는 소식을 듣고 극락왕생을 기도했습니다.

 

나의 철학박사 학위는 나의 능력이 뛰어나서 얻은 것이라기보다는 인복人福과 주위의 성원에 힘입은 바가 더 크다고 생각합니다.”

 

다 끝난 후라 말하기는 쉽지만, 실제 그 당시 일붕이 겪어야 했던 고충은 실로 피눈물 나는 과정이었다. 대학의 교환교수, 선원을 꾸려가는 포교사, 학위논문을 준비하는 학생으로서의 힘든 일을 동시적으로 수행하느라고 항상 잠이 부족했고 시간에 쫓겼다.

 

그러나 일붕은 내 등 뒤에는 나를 지켜보는 수많은 법제자와 조국이 있다는 각오를 다지며 정진을 거듭한 끝에 결국 이루어낸 것이다. 

 

 

 

이런 정신적인 각오와 함께<조당집>들 연구 주제로 택한 시기상의 타이밍도 적절한 것이었다. 

 

한국의 선불교를 연구하면 서<조당집>울 살핀다는 것은 그야말로 선맥禪脈을 캐는 필수 불가결한 코스라는 것을 템플대 종교학과 주임교수로 재직하면서 깨달았기 때문에 오랜 숙고 끝에 그때까지 누구도 관심을 쏟지 않았던 문헌을 연구 주제로 설정한 것이다.

 

일붕은 애초부터 이<조당집>을 박사학위 논문으로 제출하려고 결정하지는 않았다. 이는 그의 다음과 같은 진솔한 회고에서 나타나고 있다.

 

사실 무척 바쁘게 생활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어떻게 하루가 오고 하루가 가는지를 짐작하기 어려울 만큼 시간을 쪼개서 살고 있었지요. 아마 오랜 수행을 한 몸이 아니었다면 지쳐서 떨어졌거나 좀 더 쉬운 일을 골랐을 것입니다. 

 

참선을 통한 템플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직후 정신적인 노력이 큰 힘이 되었지요. 그때 미국인들은 일부 식자층의 엘리트를 제외하고는 불교의 어려운 교리보다는 재미있고 흥미를 유발하는 신기한 선화禪話를 더 좋아했지요. 그래서 나의 강의는 언제나 두 가지를 준비해야 했습니다. 즉 일반용인 쉬운 이야기와 전문용인 학구적인 강의 준비입니다.

 

박사학위 논문은 종교학자, 심리학자, 철학자, 현직 신부, 판사, 기자 등이 청강했던 대학원의 강의 준비를 위해 틈틈이 정리한 내용을 치밀하게 재구성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것을 그대로 제출해서 통과될 정도로 허술한 심사를 하는 템플대는 아니었지요. 템플대 종교학과는 종교연구로 미국에서 가장 정평을 얻은 대학입니다.

 

이 말은<조당집>이 자연스럽게 연구로 이어지고 그 결과 박사학위를 취득했다는 것이지 우연한 기회에 적당히 통과된 것은 아니란 뜻입니다. 그러나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주위의 도움을 많이 받은 것은 인정합니다.…

 

 

그러면<조당집>은 과연 어떤 책인가.?

 

이해를 위해 삼국시대의 종교를 살펴봐야 한다. 불교를 중국에서 수입한 우리나라의 삼국은 각기 불교를 통해 국가의 사상을 정비하고, 통일된 국민의 신앙을 통해 국력을 키우려고 애썼다. 따라서보다 선진화된 불교를 배우는 것이 급선무였다. 

 

특히 신라는 지리적으로 고립된 관계로 백제와 고구려보다 불교를 뒤늦게 받아들였으나 불교를 국교 國敎로 택해 활발한 불교연구를 했다. 이를 위해 당시의 고승들은 대부분 중국 당唐나라에 유학하고 돌아왔던 것이다.

 

널리 알려진 원효대사와 의상대사의 이야기도 당나라 유학길에 일어난 일화이다. 

 

드물게는 신라 선덕여왕 때 구법求法을 위해 당나라로 떠났던 김교각 지장보살처럼 현지에서 깨달음 성불하여 귀국하지 않고 그곳을 불국토佛國土로 만든 분도 있었다. 그러나 대다수는 일정 기간의 공부가 끝나면 본국인 신라로 돌아와 중생구제에 나섰던 것이다.

 

조당집은 이 시기에 당나라에 유학했던 신라 고승들의 발자취를 당대唐代의 성등省燈이란 사람이 편찬한 선가禪家의 기록으로 무려 1천3백 년간이나 잠자다가 1960년대 중반에 발견된 전고미문前古未聞의 책이다. 

 

 

전질 30권 3백 35장의 판본으로 된 이 책은 판본 제1권 끝에 나타나듯이 고려 고종 을사년(22년)에 분사分司 대장도감에서 나무판에 새겨 조성한 것으로 2백50여 조사들의 행적과 어록이 들어있는데, 수록된 조사들의 적년寂年을 거슬러 역산해보면 당보대唐保大 7년이 기준 된 곳이 일곱 차례나 본문에 나타나 서기 652년에 찬술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이는 중국 조사들의 기록인 도원의경덕전등록, 景德傳燈錄이 세상에 나온 송경덕宋景德원년 보다 무려 52년이 앞서 있으니 조사들의 기록으로는 가장 오래된 것의 하나이다.

 

그렇게 유명한 책이 왜 다른 책에서만 계속하여 나타나고 실물實物은 수수께끼처럼 숨겨져 있었을까. 아마 분류법 때문일 것이라는 게 학계의 짐작이다.

 

 

경남 합천군<해인사> 장경각에서 조명기박사에 의해 발견되었을 때<조당집>은 정장도, 속장도, 잡판도 아닌 보판補板에 속해 있었다. 보판이 15종이 되는데 그 가운데 하나 가<조당집>이었던 것이다.

 

조당집은 1천3백 년의 먼지를 털고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자 곧 불교계의 시선을 끌었으나 그 체계적인 연구에 착수되지는 못했다. 

 

사본을 입수한 일붕은 기대에 못 미치는 엉성함에 크게 실망을 했다고 한다. 중국에서 중국인에 의해 편찬된 무성의 탓인지 아니면 시간에 쫓겼는지 그 사정을 알 수는 없지만 오자 誤字투성이였기 때문이다. 

 

일붕은 그 연대적 하한이 당말 5대에서 그치지만 신라 시대 구산선문九山禪門의 개조開祖들에 관한 내용이 고스란히 들어있어 그때 성립한 五敎 즉, (열반종, 계율종, 법성종, 화엄종, 법상종)과 함께 九山의 선맥을 파악할 수 있는 한국 선불교의 시발과 조계종지를 알 수 있는 보전寶典이라 믿어 각종 방계서적을 연구하여 오자와 탈脫자를 바로 잡았다. 

 

 

자주 등장하는 조계종지의 ‘조계曺溪’라는 두 글자는 조숙량曺叔良이란 사람이 정사精舍를 시내 위에(溪上) 지어놓고 육조 혜능 대사를 청하여 모셨다고 하여 조숙량의 조 자와 계상의 계를 합쳐 조계라고 한 것이다. 

 

뒤에 육조대사가 거처하신 산의 이름도 조계산이 되었고, 육조 스님을 근본으로 삼는 종명 宗名이 되었다.

 

육조의 이름은 혜능 慧能, 호는 대감大鑑, 성은 노盧씨, 고향은 광동성 조경부 신흥이다.

 

일붕이 오자와 탈자를 제대로 수정하여 영문으로 구성한 조당집은 이렇게 짜여져 있다.

 

한반도에 불교가 유래된 경로와 그 경위를 서술하고 구산선문을 연 도의(道義, 전남 장흥의 가지산 보림사), 혜철(慧徹, 전남 곡성군의 태안사), 홍직(洪直, 전북 지리산 실상사), 현욱(玄昱, 경남 창원의 봉림산 봉림사), 범일(梵日, 강원 명주군의 사굴산 굴산사), 무염(無染, 충남 보령의 성주 산성 주사), 도윤(道允, 강원 영월의 사자산 흥령사), 지선(智詵, 경북 문경의 희양산 봉암사), 이엄(利嚴, 황해 해주군의 수미산 광조사)선사 등의 행적을 낱낱이 기술했다.

 

이를 기술 함에 있어 단순한 연대적인 분류가 아닌 평가를 위해 화두와 선시도 살폈으며, 그 연원을 밝힘에 있어 중국은 물론 멀리 인도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있다.

 

이러한 기술을 통해 신라 시대에서 자리 잡은 한국의 독특한 禪이 일본의 임제종 선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고 중국의 육조 혜능 대사로부터 직수입하여 나름대로 가꾼 결실임을 주장한다..

 

중반부에 들어가서는 한국의 불교가 초기에는 敎를 우선시했으나 차츰 禪의 중요성에도 눈을 떠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별도로 발전하다가 1935년에 선과 교가 합쳐져 하나의 종단으로 통합되는 경위를 통해 중국이나 일본과는 전혀 다른 불교적인 특색을 가진 한국의 불교가 창출되었음을 천명했다.

 

 

후반부에서는 도표로써 선종과 교종의 통합을 제시하면서 근대 한국의 대표적인 승려인 박한영朴漢永, 진진응陳震應, 한용운韓龍雲, 김종래金鍾來, 오성월吳惺月, 만공滿空, 태허太虛, 월면月面, 고봉高峰, 금봉錦峰, 춘성春城, 혜암惠菴, 전강田岡, 탄허呑虛, 용성龍城, 수월水月, 효봉曉峰, 청담靑潭, 석주昔珠, 석우石牛스님 등의 활동을 그들이 있었던 사찰과 함께 소개한다. 

 

또한 박정희씨가 대통령을 맡은 1960년대 초반까지의 불교 정책에 대해서도 정리했다.

 

일붕은 한국불교의 禪을 효봉스님이 남긴 임종게 “나의 한평생을 물어본즉 그것은 모두 쓸데없는 것, 만일 나에게 오늘의 일을 묻는다면 나는 저 달빛이 천강千江에 밝을 때라고 답하리라”라는 것으로 대신하여 이해시키고 있다.

 

이 논문이 한국의 불교사에서 기념비적인 위치를 차지한 것은 그때까지 서구인들이 한국불교는 중국이나 일본불교의 아류亞流라고 여겨온 관념을 깨끗하게 씻었다는 점과 그로 인해 한국불교가 갖는 참모습을 제대로 전달했다는 두 가지 측면의 이유에서다.

 

일붕은 이 논문에서 일관되게 내세웠던 것은 세계불교사상 경전연구를 주로 하는 교종과 수행을 통한 득도를 주로 내세우는 선종이 동시에 추구되온 상자가 없다는 사실이다. 

 

 

또 설령 선교의 통합에서 나오는 취지를 주장했던 종지가 있었다 하더라도 명실상부한 실제적인 수련으로 연결한 역사는 오직 한국의 불교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특징이란 논지를 일관되게 전개하였다.

 

단일 학위논문으로서는 드물게 430페이지의 방대한 분량으로 엮어진 이 논문은 140여 권의 참고문헌을 제시하고 있는데, 학위 심사가 끝난 후 캘리포니아주 월낫트크리크市 조계종 선원판(板)으로 발간되자 전 세계의 불교학계에 충격을 던졌다.

 

중국과 일본 양국이 학문적인 주도권을 잡고 있던 탓에 그 두 나라의 불교가 정통임을 당연하게 여기던 서양인들이 의외의 연구논문이 등장하자 관심을 집중한 결과 전혀 상상하지도 못했던 주장이 실려 있었기 때문이다.

 

 

영국에서 발간되는 세계적인 불교 잡지<미들웨이> 誌는 1970년 2월호에서 이렇게 썼다.

 

“…놀라운 일이다. 지난해 미국 캘리포니아주 월낫트 크리크 시의 조계종 선원 판으로 발간된 서경보박사의<조당 집>은 지금까지 유럽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한국 선불교의 참모습을 생생하게 담고 있다.

 

우리는 지금까지 스즈키 다이세쓰란 일인 학자가 쓴 저서들로 인한 일본적인 선과 찰레스 추크씨가 소개한 중국적인 불교가 불교의 전형인 것으로 알고 있었다.

 

이제 우리는 한국의 서경보 박사가 한국의 선뿐만 아니라 불교 전반에 관한 문제를 보다 체계적으로 열어준 위대한 논문 조당집을 통해 독자적인 특성을 갖는 한국의 선불교를 새롭게 자리매김 해야 할 것이다.

 

일찍이 헤리켈씨나 린센씨는 선을 ‘일본적인 학문이거나 정신분석학 아류작인 혼합물 또는 그와 유사한 어떤 것’으로 파악했다.

 

반면 불교학자인 루스 사사키 씨와 듀몰링 박사는 “선은 불교의 적절한 수행, 정진, 정려靜慮, 학식이 필요하고 이의 특별한 전수(敎外別傳)는 경전에의 깊은 조예가 있는 스승을 요구한다”라는 학설을 내세워 서로 팽팽한 대결을 벌였다.

 

그러나 이제 서경보 박사가 쓴 조당집이 나온 이상 그 같은 논의가 무의미해졌다. 선이 중국과 일본불교의 틀에서 벗어난 새로운 유형이 있음이 확인되었고, 그 확인은 한국 선불교가 禪敎의 통합 위에서 창출된 독특한 것임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이 잡지의 편집장 알 리 비트 씨는 일붕의 논문을 처음부터 끝까지 분석하여 특집으로 게재하면서 ‘유럽 불교계의 시각을 바꾼 대변혁’이라고 극찬했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아직 한글 번역판조차 나오지 않았다.

 

부끄러움을 넘어 개탄스러운 일이다.

 

논문이 발표 된 지 26년이 지난 지금까지 한국의 불교를 알고자 하는 서양의 불교학자나 신도들은 일붕의 조당집을 가장 먼저 구해서 보고 있는 실정이다. 

 

사반세기가 지나도록 이 논문을 뛰어넘을 영문 서적과 연구서가 나오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비슷한 내용을 적은 일붕의<선맥, 禪脈>이란 저서가 1978년 한글판으로 나와 있을 뿐이다. 

 

이 책은 ‘역대 조사들의 발자취’란 부제가 암시하듯이 시대별로 큰 깨달음을 얻은 스님들을 소개하고 있다. 즉 신라시대 9명, 고려시대 11명, 이조시대 6명, 근대 18명 등 총 44명의 선사의 생애를 조명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