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왕청신문 이존영 기자 | 취임 첫 해에 일붕이 남긴 가장 큰 업적은 우리나라의 중요무형문화재 지정자료를 조사, 연구하려는 목적으로 불교의 세속적인 대중 가곡 화청(和請) 조사위원회를 발족시킨 일이다.
화청이란 귀족불교로 전해 내려온 한국 불교가 대중화 과정을 밟는 과정에서 민족정서와 혼합되어 형성된 ‘음곡(音曲)에 의한 법문'으로 그 리듬과 멜로디가 민속 가요에 지대한 영향을 준 불교음악이다. 이 같은 중요성이 있음에도 그 전승자가 점차 사라져 보존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조사위원은 사계의 전문가인 김영태, 홍윤식, 김인덕, 목정배, 오형근, 고익진이었다. 고문에는 홍정식, 김동화, 장원규, 이재창, 황성기가 참여했다. 일붕이 화청조사위원장을 맡은 것은 일붕의 새로운 일면이 드러난 부분이다. 지금까지 일붕이 무형문화재 지정에 참여했다는 사실은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일이다.
10월 11일부터 본격적인 조사에 들어가 12월 25일 문공부 문화재관리국에 1차 보고서를 제출하고 다음 해 1월 16일 마감하는 일정으로 시작된 이 조사는 서울, 부산, 전주지방을 중심으로 기능보유자를 찾아 음곡과 가사를 녹음하는 채록작업을 전개했다.
이때 원래의 화청인 불교의 대중적인 음곡만 대상으로 삼지 않고 범패까지 포함했다.
12월에 자료를 취합하여 무형문화재 조사보고서 제65호로 발간된 화정은 우리나라 불교음악의 귀중한 자료를 총망라하고 있다. 일붕이 귀국하자마자 탄생시킨 불교음악의 걸작품이다. 그 개요를 몇 가지만 뽑아 본다. (이 보고서는 총 320페이지로 구성되었으며 말미에 북가락, 세 마치 장단, 타령형 장단, 아미타불 행군곡, 염불북, 장엄염불북 등의 악보가 실려 있다.)
역사적인 유래: 화청의 본 듯은 여러 불보살을 고루 청하여 망자(亡者)의 정토왕생을 발원하는 것이나 초기에는 정토사상에 입각한 불교의 대중화 과정에서 여러 용도로 쓰였다.
의상과의 구법행당로(求法行唐路)에서 원효(元曉)대사의 타력왕생사상(他力往生思想)은 보현보살의 행원을 통하여 정토사상을 일으키고 아미타불을 모심으로써 일체중생을 이롭게 하는 방향으로 나타났다.
원효는 이를 위해 표주박을 두드리며 마을마다 돌아다니며 노래 부르고 춤추면서 부처님의 진리를 전파했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원효의 무애가나 월명사(月明師)의 도솔가도 그 한 형태일 것이다.
이러한 것이 시대의 변천에 따라 탁발승이나 걸립패로 이어졌고 범어사의 ‘어산계(魚山契)’로 결집 되었을 것이다.
화청의 특징 : 넓은 의미에서의 화청은 장가의 형식으로 된 원왕가(願往歌), 자책가(自責歌), 회심곡(回心曲)등과 기타 범패성이 아닌 토속적인 염불송이다. 좁은 의미의 화청은 범패성이 아닌 장가 형식으로 된 불교 가요 전반이다.
가사 면에서 살핀 화청은 약 37종이 있으며 장단악기(長短樂器)인 북, 목탁, 강쇠(꽹과리)와 깊은 연관이 있다. 장단악기는 보통 오른손에 부채를, 왼손에 꽹과리를 잡는다. 보통 우리나라 국악에 있어 성악(聲樂)을 나누어 판소리나 민요는 ‘소리한다'라고 하며 가곡, 가사, 시조는 ‘노래 부른다’라고 하는 데 반해 화청은‘친다’라는 용어를 쓴다. ‘북을 친다'라는 말을 생각하면 화청이 음곡은 북치고 목탁 치는 것을 위주로 하고 그 장단에 불교적인 가사를 붙인 것으로 추정된다.
화청은 의식(式) 음악과 포교 음악으로 써의 기능을 갖는다. (이어 불교의 대중성과 음악성을 상술하고 지역별로 작성된 내용을 실었다. 새롭게 채록된 신불가信佛歌를 옮겨보자).
① 불교 믿는 우리 형제·자매들이 세존께서 육년 수도하시라 팔만 사천 대장 미묘법문(微妙法門)으로 사십구 년 고구(苦口) 설연(說演)하셨네
② 자비심으로써 슬피 여기사 사랑하신 배로 건져주신 뒤에 한량없는 큰 복 베풀어 주셨네.
③ 중하고 크신 은덕입은 우리들이 보리수에 봄이 놓아 있도다 미혼(迷昏) 깊이 든 잠 어서 바삐 깨어 부처님의 은덕 보답해 보세.<후렴>
경배합시다. 경배합시다. 석가세존님께 경배합시다. 경배합시다. 경배합시다. 석가세존님께 경배합시다.
일붕이 화청을 조사하고 연구하던 69년. 불교계는 끊임없이 내분과 소요에 휘말린 한 해였다. 그간 비구와 대처의 통합, 총무원의 기구 개편 등으로 잠잠해진 것 같은 문제들이 다시 고개를 들고 일어났다.
(69년에 일어난 분란이 70년으로 연결되므로 간략히 짚고 넘어가도록 한다.)한국 불교의 행정 수반 격인 총무원장에 崔月山스님을 내세운 조계종은 10월 대대적인 기구 개편을 통해 문제해결을 시도했지만 불과 몇 개월이 안 돼 사의를 표명하고 법주사에 내려가 상경하지 않는 사태에 직면했다.
일이 시끄럽게 된 원인은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는 봉은사奉恩寺 임야 매각을 통한 계획이다.
종단과 동국대는 동국대 남쪽(장충동 2가100의 5-23, 산 14의 32)에 있는 국유지인 중앙공무원 연수원의 건물과 대지를 정부로부터 사들여 불교계의 숙원인 한국불교중앙회관으로 쓰기 위해 서울 근교의 종단 유휴지를 일부 매각하기로 합의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총무원은 8월 宗會(전국대의원회의)를 소집하여 그 내용을 결의하고 해당 유휴지의 선택은 간부회의에 위임했다. 위임을 맡은 총무원은 12월 총무원 간부와 재서울 불교 중진들과의 연석회의를 열어 비교적 땅값이 많은 봉은사 임야 중 11만 평을 매각하기로 했다.
그러나 봉은사 신도들과 주지가 강력히 반발, 청와대에 진정서를 제출하는 사태에까지 이르렀다. 결국 봉은사 측이 양보하는 선에서 일단락되었다.
이 건에 대해 일붕은 “공무원교육원을 동국대가 아닌 다른 단체나 기관이 매입하게 된다면 동국대가 절름발이로 변하므로 오히려 사명당 동상이 서 있는 장충단 일부까지 사서 한국 불교 센터를 세워야 한다. 정부 당국과 국민의 협조가 필요하다.”라는 견해를 내세웠다.
둘째는 팔만대장경 영인본 사업이다.
동국대 부속기관의 하나인 역경원은 지난 56년부터 66년까지 학교 예산 2천6백여만원을 들여 대장경 영인본 20권을 간행한 경험하고 있는데 그 나머지 23권은 70년과 71년에 각 8권씩, 72년에 7권을 완성할 예정이었다.
당시 문공부는 69년 7월 동대의 역경원이 70년도 대장경 영인본 사업을 위해 보조 신청을 한 2천 8백만 원을 기각했으나 방침을 곧 변경하여 9천 1백만 원을 융자해 대장경 원판 복원사업과 동시에 3개년 계획으로 시행키로 했다.
그러나 문공부는 다시 담보가 없다는 이유로 보조나 융자 조처하지 않고 다른 연구기관으로 보조비를 돌렸다. (이후 문화재관리국은 다음 해 1월 23일 불교문화연구원에 대장경인 출본 10질을 제작하도록 허락함으로써 영인본과 인출본 제작계획을 뒤바꿔 당초 영인본 간행계획을 세운 역경원을 곤경에 빠뜨렸다.)
이에 대해 일붕은 “정부가 영인 사업을 계속하려는 역경원에 보조를 계속해야 한다."라는 태도를 개진하면서 서구 여러 나라의 불교 연구를 예로 들었다.
셋째는 대처 측의 종헌(宗) 무효확인 소송으로 명목상의 통합이 실제적인 문제에서 브레이크에 걸린 경우다. 69년 10월23일 대법원판결로 끝난 것으로 보인 비구와 대처 간의 분쟁은 대처 측이 새로운 종단 이름으로 비구 측 종헌 무효확인 청구 소송을 서울민사지법에 제출함으로써 다시 불이 붙었다.
대처 측은 62년 10월 4명의 이름으로 냈던 소송을 종단 명의로 변경, 다시 소송을 낸 것이다.
그러나 이 소송은 종래의 비구 종헌 무효 주장에서 벗어나 비구 측과 대처 측 종헌은 별개의 것이며, 따라서 비구 종단과 대처 중단은 별개의 중단임을 확인해 줄 것에 역점을 두고 있다.
그러니까 소송이 宗主權을 쟁취하자는 목적보다 비구 측과 대처 측의 종단을 분리하기 위한 소송으로 해석된다. 대처 측은 “이 소송은 민주국가에서 종교와 결사의자유가 얼마나 향유될 수 있는가에 대한 시금석이다.”라고 주장했다.
일붕은 이런 주장에 대해 “비구와 대처승은 이미 통일 중단이 된 지 오래다. 대처 측의 극히 일부가 반발한 것이다.
정말 중이 되고자 한다면 아무리 대처승이라도 가족은 집에 두고 유니폼인 승복을 입고 사찰을 지켜야 하지 않겠느냐?”고 반문하면서 신랄히 꼬집었다.
이 세 가지의 문제에 대해서는 “종단의 최고 의결기구인 종회의 결정이 잘 하달되도록 총무원의 행정 능력을 체계화하고 승려대학 같은 전문 교육기관을 세워 엄한 훈련을 거친 비구가 배출되어야 한다”라는 주장을 강하게 내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