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왕청신문 이존영 기자 | 또한 일붕은 세상을 경악케 했던 사이비종교의 발호에 대응하는 의미에서迷信과 正信이란 글을 일간지에 싣기도 했다.
사이비종교 단체들이 신들을 비난하는 사람에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해害를 끼치던 때였기 때문에 상당한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 글에서 일붕은 인륜과 도덕을 무시하고 해악을 끼치는 행위는 결코신, 그리고 정교와 사교의 판단이 이루어져야 한다.
기성종교로서 세계적인 신앙으로 자리 잡은 종교라 할지라도 시대의 추이를 따라가지 못하면 곤란한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이점은 어느 종교도 마찬가지다. 즉 시대정신을 담고 있는 종교여야 한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열렬한 기독교 신앙을 가졌으면서도 당시의 목사나 선교사의 설교를 이렇게 비판했다.
“금과옥조金科玉條같이 믿는 성경 가운데도 어느 시대이건 만인 모두가 받들어 행할 것이있고 너무도 맹랑하고 허황되어 돌아볼 가치가 없는 것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어리석은 교인들은 시대에 맞는 심금을 울리는 교리는 찾으려 하지 않고 원시시대의 신화와 같은 예수의 기적만을 가지고 떠들고 선전하고 있으니 가증스럽고 딱 한 일이다.
기독교는 이런 비판을 겸허하게 수용하고 내부적인 자정과 개혁을 단행했기 때문에 오늘날 가장 큰 종교의 하나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건전한 종교는 내부의 비판과 외부의 지적을 과감히 수용하여 고칠 것은 고치는 기반 위에서 성장을 거듭하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 우리나라에서는 누가 봐도 문제가많은 신흥종교들이 사회적인 상식에 어긋나는 물의를 일으키고 있어 우려를 금하지 않을 수 없다.
소위 백백교, 보천교,태극도, 보화교, 박장로교 등과 같은 종교 유사단체가 그들 이다.
이들은 훌륭한 교리를 갖고 있다고 선전하지만 깊이 따지고 보면 혹세무민의 성격이 짙기 때문에 사회의 지탄을 받는 것이다.
앞서 말한 제3자적인 객관적인 평가란 국가와 사회에 끼치지 않을 교리와 신앙생활을 그 첫째의 기준으로 삼는다. 이 원칙이 사회를 지키고 건전한 문화를 발전시키는데 있어 장애물로 작용하지 않을 최소한의 기본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들 종교 유사단체들은 미풍양속을 해치고 사행심을 조장한 측면이 많다. 민족상잔의 아픔인 6.25의 상처로 인한 사회의 불안심리를 교묘히 이용하여 개인적인 욕심을 채우려는 무리들이 이끄는 단체들인 것이다.
때문에 제3자 적인 관점에서 사회상규社會常規에 어긋난다는 판정을 받은 이들 단체는 사교라고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비유적인 이야기를 하나 하겠다.
옛날 어떤 곳에서 원숭이 한 마리가 바닷가에서 놀다가 토막나무를 타고 재주를 부렸다. 그러다 바닷물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겨우 다시 그 토막 나무를 붙잡았으나 이미 바다 한 가운데로 흘러갔기 때문에 어디론가 떠내려 갔다. 한참을 떠내려 가다 한 무인도에 닿게 되었다.
나무에서 내려 섬으로 걸어가 보았더니 수많은 원숭이들이 떼를 지어 살고 있었다. 그런데 그 원숭이 하나만 있었다.
그 원숭이는 '참 이상한 곳이군, 눈이 하나만 있는 병신들만 우글거리다니'라고 생각했다.
외눈의 원숭이들은 그 원숭이의 눈이 두 개인 것을 보고는 “병신 원숭이가 나타났다”고 수군거렸다. 화가난 그 원숭이는 그 섬의 원숭이들에게 “눈이 하나 뿐인 너희들이 병신이지 두 눈이 멀쩡한 내가 왜 병신이냐"고 따졌다.
그러자 외눈박이 원숭이에게 조롱을 퍼부었다.
“네가 병신이지 우리가 어떻게 병신이냐? 이 바보야. 아무리 찾아 보아라. 눈이 두 개인 원숭이는 너 혼자 뿐이 아니냐. 수천 수만의 원숭이가 모두 외눈인데 너만 두 개이니 네가 병신이지 우리가 병신이라고 우기면 말이 되느냐. 너도 정상이 되려면 눈 하나를 빼던지 못쓰게 만들어야 한다."
가는 곳마다 외짝 눈의 원숭이에게 시달리던 그 원숭이는 마침내 가시나무에 일부러 눈을 찔러 짝 눈을 만들었다.
이 이야기는 정신이 멀쩡한 사람도 유사종교의 단체에 잘못하여 들어가면 그 원숭이 꼴이 된다는 논리로 연결 된다. 사이비 종교에 빠진 사람들은 오히려 정상적인 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불쌍하다고 여긴다. 정말 어이없는 노릇이다.
제발 한 쪽 눈을 가시나무에 찔러 스스로 불구가 된 원숭이가 되지 않으려면 한시바삐 마의 소굴에서 벗어나길 바란다.
신앙의 근본적인 목적은 해탈解脫과 안심安心이다. 이를 추구하는 종교가 선도善導와 정도正道로 나아가는 것이며 正信이며 政敎인 것이다.
근래에 사회가 불안한 틈을 타서 종교의 자유란 헌법상의 숭고한 이념을 악용하여 혹세무민과 사기착취를 일삼듯이 도처에서 날뛰고 있다.
당국의 강력한 단속과 함께 국민 각자의 반성과 경계가 필요하다 하겠다. 또한 기성 종교단체들도 건전한 신앙생활에서 사이비교단으로 빠져드는 신도가 없도록 내부적인 자정을 꾀하는 한편 시대에 걸 맞는 종교로 거듭나야 할 것이다.
이 글이 보도되자 경향 각지의 뜻있는 지식인들은 '비행非行에 철퇴를 내린 쾌거'라는 반응을 보이며 호응하기 시작했다.
사회적인 혼란에 편승 한 사이 비종교의 우두머리들이 저지르고 있던 사리사욕과 음행에 제동을 걸었기 때문이다.
한편 일부에서는 '그렇다면 종교의 본질과 목적이 무엇인가'를 밝혀야 한다는 주문이 들어오기도 했다. 옳다고 생각한 일붕은 즉각 <종교와 실존>이란 글을 발표했다.
일붕은 宗敎와 實存이란 글에서 유럽에서 일어나 세계적인 철학사조가 된 실존주의와 종교와의 관계를 고찰하고 소개함과 동시에 키에르케골과 니이체의 有無神論이 갖는 차이를 밝혔다.
이 글에서는 올바른 종교가 걸어야할 正道를 구체적으로 적시하는 서술을 통해 물음에 답하는 형식을 취했다. 일붕은 이 글에서 인간의 고통을 해소시키는 종교만이 참답고 가치 있는 종교라고 규정짓고 있다. 동시에 불교적인 관점에서 살핀 실제적인 문제를 점검했다.
이어 현대 불교가 나아가야할 방향에 대해서는(중생과 반야와 무명)이란 글을 공표했다. 이 글에서는 불교가 늙고 쇠퇴한 종교가 아니라 문명이 발달할수록 정신적인 면에서 그 위력이 돋보이는 종교임을 조목조목 적시한다.
宗敎와 實存
현재 구미 제국諸國의 철학적인 주요 관심은 종교와 철학을 막론하고 실존주의實存主義의 경향을 보이고 있다.
실존주의는 덴마크의 키에르케골과 독일의 니이체가 창도한 것이다. 그러나 이들 두 학자는 실존 주의를 주창했으면서도 서로 다른 입장을 보이고 있다. 즉 키에르케골은 유신론적有神論的입장이고 니이체는 무신론적無神論的입장이다.
다시 말하면 神의 존재를 인정하느냐, 인정하지 않느냐는 정반대의 상반된 이론을 갖고 각기 실존주의에 접근했던 것이다.두 학자의 주장 중 상반된 주요 골자를 간추려 소개한다.
키에르케골은 향락의 입장으로서 美的 實存의 단계를 세우고, 둘째는 良心의 입장으로서 倫理的實存 단계를 세우고,
셋째는 信仰의 입장으로서 宗敎的 실존의 단계를 세워 哲學的 思想을 전개하였다.
반면 니이체는 첫째 神의 앞에서는 종교적 실존이요, 둘째 神을 肯定도 定도 하지 않는 倫理的 實存이요, 셋째 완전한 神을 부정하는 자유로운 행동적 실존을 주장하면서 철학적 사상을 전개하였다.
이 두 학자의 주장은 방법론에 있어서는 이처럼 다르나 실존적 입장에서 과거의 인습적인 형식을 떠나서 순수하게 사물을 판단하고자 하는 점에서는 일치된다.
말하자면 그들은 진리에 대하여 실제를 말하는 입바르고 경우가 바른 진리의 탐구자라 하겠다. 그들은 살아있을 당시에는 누가 알아 주지도 않고 미친 사람 취급을 받았다. 사회와는 동떨어진 처지에서 고독하게 일생을 마친 불우한 철학자들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사상이 오늘날 다시 새롭게 재 조명되는 것은 문명이 발달한 현대인의 생활이 극도로 불안하기 때문에 참으로 바른 진리를 찾아 안정을 이루려는 과정에서 재평가를 받은 탓이다.
현대인이 不安과 부패한 종교의 피해 인간에게 있어 어떠한 고통도 없는 상황이 된다면 종교는 이 지상에서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이 지구상의 인간에게는 수많은 종류의 고통이 있다. 생존에 대한 고뇌, 질병의 고통, 죽음과 늙음의 두려움, 재산과 명예와 성(性)에서 오는 고통, 전쟁과 기아의 고통, 과연 神이 있느냐 없느냐로 고민하는 고통, 死後世世가 있느냐 없느냐에 대한 궁금증...정말 인간에게는 삶 그 자체가 고통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많은 고통이 있다. 이러한 고통이 사라지지 않는 한 종교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종교는 인생의 고통을 어떻게 하면 줄이고 이길 수 있느냐는 점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이비 종교는 이러한 인간의 근원적인 약점을 이용하여 온갖 나쁜 짓을 저지르고 있다. 실로 개탄스럽고 한심한 일이다. 사이비 집단을 이끄는 지도자도 밉지만 그를 추종하여 인생을 망치는 이들도 가련하기 그지없다.
과학이 고도로 발달하여 달나라와 별나라의 일까지 밝혀내는 이 세상에 '전쟁과 환난이 와도 죽지 않고 살 수 있고,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식의 허무맹랑한 교리를 내세우고 있으니 어찌 한심스럽지 않겠는가. 물론 원시시대에는 인지人智가 덜 깨어나고 자연의 힘을 분석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자연물을 숭배하는 多神時代가 그 존립의 근거를 가지기도했다.
하지만 점차 인지와 과학이 발달함에 따라 분명치 못한 존재는 말살하고 실존의 근거가 있는 것만이 인정받는 증명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종교 역시 사회의 변화와 과학문명의 발전에 걸맞도록 꾸준히 발전되어 왔다. 그럼에도 그 기본적인 존재의 양태는 인간의 불안, 욕심, 어리석음, 사후의 두려움 등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불교 경전에 나오는 詩 한 를 옮겨 본다.
오! 어리석은 곤충들이여!
저들은 반짝이는 등불의 빛을 탐하여 죽는구나.
어찌하여 그러한고? 저들이 무지한 때문이다. 불꽃의 뜨거움을 모르는 무지 때문이로다.
오! 미련한 어족魚族들이여!
저들은 달콤한 미끼를 물고 죽는구나. 어찌하여 그러한고? 저들이 무지한 때문이다. 낚시 끝에 매달린 갈고리를 모르는 무지 때문이다.
어리석은 인생이여!
감언이설에 빠져 기분에 맞는 환락에 몸을 던지고 달콤한 행복에 생명을 던지누나. 환락과 쾌락에는 무서운 낚시와 그물이 들어있음을 깨닫지 못
하는 무지 때문이다.
무지의 앙화여! 탐욕의 재앙이여!
종교의 출발점이 인생의 고통에서 비롯된 것이라 함은 앞서 말한 바와 같다. 종교의 임무는 무엇인가. 인간의 근원적인 고통을 어떻게 해소시킬 것인가 하는 것이 종교의 임무이다.
따라서 인간을고통스럽게 만드는 모든 원인으로부터 인간을 자유롭게 만드는 것이 종교의 가치이자 의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바꾸어 말하면 단순히 관념이나 사상의 체계를 세우려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줄이고 없애는 방향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려는 노력과 움직임이 살아있는 종교의 책무이자 모습이라는 것이다.
이는 결국 종교가 두뇌에 이념으로 남아있는 것이 아니라 전생명全生命과 전생활상全生活上의 체험을 주로 하여 인간을 고통과 두려움에서 해방 시키는 실천력을 가진 실존적인 존재로서 자리매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불교는 어떠한 종교인가.
불교의 교조敎祖이신 석가세존께서는 진실로 이러한 종교의 본질과 목적을 이해하셨기 때문에 인생의 고통을 말씀하셨고, 그 고통에서 벗어나는 여러가지의 방법을 교리에 담았던 것이다.
불교는 실천의 종교이며 체험의 종교이다.
이점이 다른 종교와의 차이다. 인간의 도덕적 능력을 최고도로 높여주고 그러한 경지에 이르도록 전진 하는를 열어주는 正道인 것이다.
즉 어떤 신벌神罰을 겁내서 의식적으로 믿는 하위적인 개념이 아니라 어떤 간섭도 없이 오직 自力으로 스스로를 향상시키려는 가르침인 것이다.
석가는 신비적이고 환상적인 보이지 않는 힘에 의지하는 것을 배격하고 제자들에게 “너는 자신에 의지해서 마음의 光明을 밝혀라. 네가 너의 주인 이니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난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말은 후세에 키에르케골이나 니이체같은 철학자로 이어져 실존주의를 주창하게 만들었다. 이 보다 오래전에 석가는 자기를 알아보라는 설교를 하고 실존을 인식함과 동시에 佛性을 깨닫도록 가르쳤던 것이다.
우리 인간을 구제하는 것은 밖에서 오는 힘이 아니라 마음에서 나온다고 강조하는 불교는 自力性과 合理性을 갖춘 종교이다.
석가모니 당시의 인도 사회는 수많은 종교들이 미신적인 요소를 강조하던 시대였다. 그분은 그러한 암흑사회로부터 인간을 구제하기 위해 불교를 탄생시켰다.
불교가 현대에 들어 와서도 생명력을 가진 종교로 자리잡고 계속하여 발전할 수 있는 까닭은 이성理性에 입각한 신앙생활로 정신의 가치를 숭고히 하고 그러한 과정을 통해 자기를 찾자는 교 리가 많은 사람의 공감을 얻었기 때문이다. 즉 이성과 신앙을 잘 조화시킨 것이다.
석가모니께서는 이런 비유를 하셨다. 어떤 사람이 느닷없이 날아온 화살에 맞았다고 하자. 이때 가족과 친구들이 그런 급보를 듣고 놀란 나머지 의사를 데리고 와서 화살을 빼고 약을 발라 치료하려고 한다고 하자. 그런데 화살을 맞은 사람이미련스럽게 말하기를 “그만두세요.
나는 이 화살을 쏜 자의 남녀 여부, 성질, 생김새, 주소 등을 알기 전에는 화살을 빼지 않겠소. 또 화살과 화살촉의 재료, 화살 끝에 붙은 털의 종류, 활시위의 재질 등을 먼저 알아야만 하겠소"라고 했다고 하자. 그러면 그런 것을 알기 전에 그는 독이 퍼져 죽게 될 것이다.
어리석은 인간들은 화살을 맞고도 고집을 부리다, 알고 싶은 것을 고집하다가 의문이 풀리기도 전에 죽고 만다. 生老病死의 고통에 핍박받는 인간들에게 시급한 당면과제를 해결해주려고 나는 설교를 한다.
다시 말하면 世界가 有限하건 無限하건, 영혼이 있건 없건, 사후의 세계가 있건 없건간에 이런 것을 아무리 잘 안다고 해서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4고(四苦)의 고통을 면하지는 못한다.
때문에 나는 무욕無慾의 담백한 열반의 道를 說하여 인간들이 현재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다.
나는 "말을 해야할 것은 반드시 말을 하고 말하지 않을 것은 절대로 말하지 않느니라.” 그중 꼭 말을 해야할 것이 가장 훌륭한 네 가지의 진리인 사성제四聖諦이다. 사성제란 고집멸도苦集滅道이다.
고苦란 도를 닦지 않는 범부의 생은 고통이라는 것으로 生老病死의 사고에다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는 애별이고愛別離苦, 미워하는 사람을 만나는 원증회고怨憎會苦, 구하고자 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구부득고求不得苦, 오온五蘊에서 생겨나는 오음성고五陰盛苦를 합한 팔고八苦를 말한다.
집集이란 욕심과 성냄과 어리석음에서 비롯되는 온갖 고통이 한 몸에 모였음을 이른다.
멸滅이란 苦와 集을 없앤 해탈의 이상경이란 뜻인데, 아무 것도 없는 소극적인 허무가 아니라 순진무구한 본심本心에서 잡념과 망상이 일어나지 않는 적극적인 不動을 말한다.
도道란 해탈의 열매를 맺자면 그 수행의 원인이 되는 도를 닦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즉 이 道의 내부에 있는 正見, 正語, 正業, 正命, 正,念, 正定, 正精進, 正思惟 등을 착실하게 닦아 마음의 본질을 깨닫는 것이다.
이렇게 될 때 혼돈 가운데에 있는 중생들을 깨달음의 세계로 인도하는 길잡이가 될 수 있는 것이다.
한 마디로 불교는 나의 본질인 마음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불교와 실존주의와의 관계를 고찰할 수있다. ( 다음호에 본성과 영혼을 닦으며(2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