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왕청신문 이존영 기자 | 1965년 3월 24일. 일붕은 컬럼비아대학을 떠나 캘리포니아대학 동양학과 교환교수로 자리를 옮겼다.
국내에서는 한일협정 체결과 월남 파병으로 데모가 그치질 않았고 하와이에서는 독재자 이승만이 숨진 을사(乙巳)년. 이 해에 일붕의 미국 포교는 탄탄한 기반을 구축하고 본격적인 궤도에 오르게 된다.
캘리포니아대학은 그 당시 동양 언어학과장인 로저스 박사가 중심이 되어 해인사<팔만대장경>를 英韓 漢文의 3종으로 목록을 작성했고, 도서관에는 해인사 대장경 목판본 3천여 권을 소장하는 한편 대장경의 영인본과 한글본을 마련했을 정도로 불교연구에 대단한 관심을 쏟고 있었다.
일붕이 이 대학으로 옮긴 것은 연초에 道心이란 법명을 얻고 법제자가 된 완델(Wan Del)씨의 주선에 의한 것이었다.
완델씨는 캘리포니아에 사비를 들여 길을 닦아 완델路라고 붙였을 정도로 재력을 가진 미국인이었는데, 일붕의 제자가 된 이후부터는 禁酒, 禁煙, 1일 2식을 하면서 아침저녁으로 참선을 하는 열렬한 신자가 되었다.
그는 일붕을 흠모하여 자신의 별장에다<조계종 미국불교 선원>을 차리고, 일붕을 집에 모셔다 각종 편의를 제공했다.
부인 완델 여사는 정신심리학 박사였는데, 각종 환자에게 정신질환을 한국 불교의 참선으로 고치라고 권유했다.
또 프로이트식의 해몽을 시도하면서 일붕에게 자문하기도 했다. 완델씨는 조계종 미국신도회 대표직을 맡았다.
5월13일부터 17일 사이에는 뉴욕 월드 오스트리아 빌딩에서 미국, 영국, 일본, 브라질, 스리랑카, 호주 등에서 온 7백여 신도들이 모여 국제불교부인회를 열었는데 일붕을 초청하여 설교를 들었다.
캘리포니아대학은 불교의 연구열이 왕성한 탓에 일붕이 강의를 할 때는 항상 초만원을 이루었다.
그래서 제자가 급속히 늘어나기 시작했는데, 그 제자들 각자는 색다른 경력을 가진 지식인이라는 특징을 가졌다.
초기 제자들의 면면을 알아보자. 유진 와그너 씨는 49년 미시간대학 재학 시부터 불교를 연구하여 캄보디아, 라오스, 자유중국, 말레이시아, 홍콩, 필리핀 등의 아시아 국가를 돌며 수도를 계속했으며 하와이에서 포교 활동을 했던 경력의 소유자다.
그는 일붕에게 법인(仁)이란 법명을 받았고 석탄일인 5월 9일 금문 공원에서 열린 기념행사를 주도했다.
그는 미국 불교 승단방직을 수행하면서 강연회를 자주 개최하여 포교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막스는 심리학을 전공한 학자인데 법심(法心)이란 법명을 받았으며, 호로비츠란 여성은 뉴욕 불교 제일학원과 일본 조동종 사원에서 선을 연구한 불교학자로 도향(道香)이란 법명을 얻었다.
도성 道聖인 루이스는 퍽 독특한 사람이다.
그는 일붕보다 20여 세 정도의 연장자로 20년 이상 선을 연구하여 미국에서 이름을 드날리던 불교학자였다.
그는 일붕의 제자가 되기 전에 일본 임제종 사원과 동남아의 여러 불교국가에서 수도를 계속했으며, 꽤 많은 책을 낸 관계로 인도 대학으로부터 교환교수 초청을 받았다.
회화교의 일파를 신봉하여 추종자들로부터 성인에 따르는 대접을 받던 루이스는 일붕에게 참선을 배운 뒤 주장자와 함께 禪師(Zen Master)란 칭호를 얻었다.
후에 그는 두 명의 수제자 중 나이가 어린 제자에게 이 주장자를 내렸는데, 받지 못한 연장자가 학식과 수도에서 자신이 주장자를 받은 제자보다 우월하다면서 캘리포니아주 연방법원에 소송을 제기하여 많은 화제를 뿌렸다. 결국, 주장자를 양보하고 화해하는 선에서 사건이 마무리되었지만 일붕의 법맥을 이어받으려 소송까지 제기할 정도였으니 일붕의 명성이 얼마나 높았는가 추측할 수 있겠다.
루이스는 세상을 떠난 다음 그를 숭배하던 제자들이 숨을 거둔 샌프란시스코 자택에서 뉴멕시코까지 시신을 비행기로 옮겨 성대한 장례를 치러 또 한 번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일붕은 이 루이스의 협력을 받아 뉴멕시코주의 포교를 활발하게 진행할 수 있었다.
이외에도 조동종 미국 불교 부인 단체 대표인 엘시 여사가 제자 이상으로 가깝게 지내며 일붕의 포교를 도왔다.
배움이 많고 재력이 좋은 지도자급 인사들이 속속 귀의해오자 일붕의 미국 포교와 활동은 차츰 깊이를 더해가고 넓이를 넓혀 갔다.
기적 같은 지성인들의 귀의에 대해 일붕은 인과에 따른 숙연이라면서 침개상투針芥相投이자 맹귀우목盲龜遇木이라 여겼다.
즉 하늘에서 떨어뜨린 바늘이 겨자씨의 눈을 꿰뚫듯,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눈먼 거북이가 나무토막에 뚫린 구멍을 찾아 집으로 삼듯이 기묘하고 어려운 사연이지만 그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인연에 따른 결과일 뿐이라는 것이다.
일붕은 어느 날, 미국인들이 귀의하기 전에 꿈을 꾸었다.
그 꿈에 일붕은 어디인지 알 수 없는 곳으로 갔는데, 그곳에 있는 절에서 설법을 들었다.
설법이 끝나자 사미승의 안내를 받아 법당으로 들어가면서 지붕을 쳐다보니 높다란 곳에 ‘佛光西漸하니 非公誰弘이라. 弘法在公하니 受多弟子하시라'고 쓴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걸음을 멈춘 일붕은 그 뜻을 새겼다. '불타의 광명이 서방으로 번져가니 공이 아니면 누가 능히 키우겠는가. 법을 키움이 마땅히 공이 할 일이니 많은 제자를 받아들이라.’ 참 이상한 일도 다 있구나라고 생각하다가 꿈을 깨었다.
이 꿈을 꾸고 나서 일붕은 좋은 징조라고 여겨 일절 발설하지 않고 지냈다. 그런지 얼마 후 제자들이 연이어 생긴 것이다.
法人(J. Eugene Wagner)은 65년 7월 11일 <대한불교>지의 지령 백호를 축하하면서 일붕의 활동을 국내에 소개했다.
원고지 약 20매 분량의 글에서 그는 자신들이 얼마 전 샌프란시스코에 조계종 불교협회를 설립했으며 道明과 힘을 합해 불법을 전파하고 있다고 적었다.
비구니인 호로비츠(道香)도 일붕의 포교 실력이 탁월함을 감탄하는 글을 같은 신문에 기고해 게재되었다.
제자가 늘어나자 일붕은 그들의 한국식 승려복을 준비해야만 했다.
현지에서 해결하려고 시도했으나 장삼에 먹물을 들이기가 어려워지자 부산신도회에 보조 장삼 15 벌과<천수경 예문> 을 부탁했다. 하지만<천수경>만 오고 승복이 오지 않아 애를 태웠다.
일붕의 성가가 높아지고 한국 불교의 붐이 일자 워싱턴대학에서도 교수로 초빙한다는 공식 문서가 날아왔다.
일붕은 제자들과 상의한 끝에 '좋은 기회'라는 의견이 합치되자 여름 방학을 이용, 그동안 설립된 불교단체에서 참가한 신도들을 이끌고 미국 내 명승지 탐방 및 불교단체 친선방문을 마치고 워싱턴대학으로 옮겼다.
워싱턴대학에서는 하와이로 떠난 66년 1월 약 6개월을 머물렀는데, 주로 특별강연회를 통해 한국 불교의 선 사상과 한국의 찬란한 고대문화를 설명했다.
즉 해인사<대장경> <불국사>와 석굴암,<법주사><통도사><범어사> 에밀레종 등 미리 준비한 슬라이드 자료를 십분 활용한 것이다.
한국을 잘 이해하지 못하던 미국인들은 일붕이 문화재를 소개하자 ‘원더풀’을 연발하면서 방문하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이 워싱턴대학 시절 일붕은 龍正(라셀 윌리암), 聖龍(자크 헌), 마샬거사 등의 제자를 맞이했다.
또한, 하바드대의 연미학회(燕未學會)에서 <新修大藏經>을 연구하던 安啓賢 교수와 캘리포니아 선이 볼 市의 불교학자인 아이드만 박사 등과도 교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