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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법왕 일붕 서경보 큰스님 전기집 오! 한국의 달마여 21

스님, 이것이 궁금합니다. 21

 

법왕청신문 이존영 기자 | 보통 사람은 평생에 한 권을 내기도 어렵다는 저서를 어떻게 9백여 권 가깝게 쓸 수 있었을까요?

 

“처음으로 책을 쓴 것은 종로구 창신동 안양암에서 동국대를 다니며 포교사로 일할 때였습니다.

 

그때 학생 신분으로 불교 입문, 불교학개설, 석가여래와 그 제자 전, 한국불교 역사 등을 썼습니다.

 

부처님의 말씀을 널리 전하자는 차원에서 불특정다수를 상대로 한 포교의 한 방편으로 책을 펴낸 것이지요. 

 

이후의 여러 책도 같은 범주에 넣을 수 있겠지요. 다만 한시의 경우는 약간 다르겠지요. 시상詩想이 떠오르면 즉시 메모하는 것을 습관화했습니다. 메모지가 없을 때는 손바닥이나 나뭇잎에도 기록합니다. 

 

한시漢詩는 오랫동안 공부했기 때문에 자유자재로 운을 맞추고 쓸 수 있습니다. 다른 저서는 생각을 정리하고 포교를 위한 법어나 강연한 내용 들이 어느 정도 모이면 책으로 펴내곤 했습니다. 이런 생활 태도를 보인다면 누구나 많은 책을 낼 수 있을 것입니다.

 

항간에서는 다른 사람이 글을 쓰고 서경보란 이름만 붙인다고 비난하는 사람도 있는 모양입니다만 양식이 의심스러운 사람들의 입에서 나온 소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식으로 얘기한다면 역사적으로 유명한 '게티즈버그의 연설'을 한 링컨의 연설문도 타자한 아가씨의 글이란 말입니까? 아마 초안을 잡아 원고를 주니까 그런 얘기가 나오는 모양입니다만,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서를 분야별, 사용언어별, 연도별로 구분 하실 수 있습니까?

 

“분야별로는 소설, 시집, 수필, 교양, 휘호 집, 서화집, 불교 전문서, 철학서, 비교종교학, 한문학, 전집류, 법어집, 강의 집, 수행 및 구도서, 고승전, 설화, 포교서 등에 고루 분포되어 있습니다.

 

사용언어 별로는 영어, 일어, 스페인어, 한문, 국한문 혼용, 한글 등이 주된 내용입니다만 영어나 일어를 제3국들이 자국 언어로 옮긴 것이 워낙 많아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연도별 간행 실적은 89년과 93년에 70권을 냈다는 것 정도를 기억합니다. 그러나 이런 도식적인 분류가 무슨 큰 의미가 있다고 여기지는 않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저서와 의미 있는 책은 어느 것일까요?

 

“책은 꽃들이 저마다 아름다움을 뽐내듯이 각기 다른 가치를 갖고 있으므로 어떤 책이 좋다고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곤란합니다.

 

꼭 예를 들라면 '서경보 인생론집' 이 대표작이고 美 템플대에서 1969년 1월 24일 영문논문으로 정식 박사학위를 취득한 조당집祖堂集을 통한 한국 선불교연구가 뜻있다고 하겠습니다.

 

우리나라의 역대 고승들이 구도求道의 과정에서 남긴 조당집을 기초로 하여 쓴 이 논문은 한국의 불교를 알고자 하는 서양의 학자들에게 유일한 자료로 아직 활용되고 있습니다.

 

조당집은 한국의 선불교가 중국이나 일본과 다른 독특한 면이 있다는 점을 전 세계에 알린 역저力著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아직도 한국의 불교를 알고자 하는 구미인은 맨 먼저 이 책을 참고하고 있습니다.

 

영국 런던에서 발간되는 불교지 The Middle Way는 한국의 불교가 이 책으로 인해 구미인은 탈레스 초크가 소개한 중국적인 것이나 스즈키 다이세쓰가 홍보한 일본적인 것과는 완전히 다른 독자적인 맥을 잇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고 격찬한 일이 있습니다.

 

또 이 논문이 발표된 지 27년이 지난 현재까지 이 논문을 능가하는 한국의 불교 서적이 나오지 않고 있다는 지적이 그 우수성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박사학위 84개는 도대체 어떻게 하여 취득할 수 있었을까요?
참고로 박사학위는 총 124개

 

“세계평화와 인류의 복지증진, 그리고 불교연구에 대한 공로를 높이 사 받은 것들입니다.

 

일부 비판을 위한 비판을 하는 사람들은 ‘돈 주고 산 박사학위'라고 헐뜯는다고 합니다만, 그것은 박사학위가 얼마나 엄정한 심사를 거쳐 수여되는가를 모르기 때문에 나은 말들입니다.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박사학위는 문교부에 등록되고 고유의 일련번호가 부여되는 것입니다. 또한, 세계의 유명 대학은 전통과 명예를 존중하기 때문에 상식에서 어긋나는 박사학위 수여는 절대로 하지 않습니다.

 

 

돈과 권력으로 박사학위를 살 수 있다면 세계의 부호나 역대 권력자들이 왜 박사학위를 많이 받지 못했을까요?”

 

박사학위는 어느 나라의 어떤 대학에서 취득했으며, 그 분야는 어떤 것입니까? 또 연도별 현황은 어떻습니까?

 

“저서와 마찬가지로 너무 많아 다 열거할 수 없습니다. 자세히 알고 싶으신 분은 이 책에 따로 장을 만들어 넣은 도표를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박사를 딴 나라는 한국, 미국, 스리랑카, 영국, 인도, 러시아, 대만, 카자흐스탄, 필리핀, 몽고, 중국 등입니다. 95년도에 약 4개국이 추가될 예정입니다.

 

분야별로는 철학, 문학, 윤리학, 법학, 불교학, 교육학, 美學, 인류학, 심리학, 정치학, 행정학, 사회학, 국제관계학, 경영학, 인간행위학, 고고학, 미래학, 언어학, 역사학, 정신분석학, 인간학, 형이상학, 신학, 행동과학, 민족학, 환경위생학, 문헌학, 문화학, 종교과학 등 30개 분야에 걸쳐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명예박사 학위이므로 연구실적이나 전공과는 무관한 것입니다.”

 

 

일붕 동상과 평화통일기원 시비는 몇 개나 됩니까?
참고로 동상과 흉상은 110여 개, 통일 기원비시는 788개

 

“동상은 1백여 개, 평화통일기원 시비는 7백여 개에 달합니다. 해외에는 미국에 3개의 동상이 세워졌으며 시비는 미국, 일본, 칠레에 1개씩 건립되었습니다.” 동상이나 시비를 세우는 것이 개인적인 명예욕과 현시욕의 과시라는 지적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리나라의 불교는 호국불교를 근본으로 구세 제민을 위해 존재해왔으며, 그러한 바탕 위에서 가치를 인정받아 왔습니다.

 

 

이처럼 한국의 불교는 대대로 국가의 안위를 위해 기도하고 정진하는 성격을 면면히 이어왔는데, 최근 들어 애국애족 정신과 반공정신이 희박해지고 있어 이를 보완하기 위한 고육책으로 평화통일 시비를 곳곳에 세운 것입니다.

 

동상은 살아있다고 못 세우는 것은 아닙니다. 일반적인 고정관념이 그렇게 생각을 유도한 것일 뿐입니다. 외국의 경우 기념이 될만한 업적을 남긴 분의 동상을 生死에 무관하게 세우고 있습니다. 미국 뉴멕시코주 같은 곳에서는 1979년 8월 17일을 낯선 황색인을 위해 '서경보박사 기념일'로 제정 선포하기까지 하지 않았습니까?

 

가장 중요한 사실은 시비나 동상을 자신이 세운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자발적으로 건립한 것이란 점입니다. 세속을 등진 승려가 명예를 얻어 무엇을 하며 이름이 알려진다고 무엇을 하겠습니까?”

 

 

기네스북 5관왕은 어느 부문에서 어느 정도의 기록으로 세운 것입니까?

 

“1994년도 기네스 기록인증서 수여식 때 박사학위 최다취득(73개), 최다작 저술가(741권), 최다 선필보시(50만 2천장), 최다 통일기원시비 건립 (630개), 의령 일붕사 동굴법당을 비롯한 최고령 최다보유기록의 5개 부문에서 기록을 공식으로 인정받은 것입니다. 이러한 기록들은 1955년 8월 27일 기네스북이 탄생한 이래 전무후무前無後無할 대기록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선필禪筆을 너무 많이 보시한다는 지적에 대해 답변해 주십시오.

 

"기네스북에 오른 공식기록만도 50만 2천 장이니 많이 쓰긴 썼습니다. 공식기록에서 제외된 분량까지 합한다면 아마 1백만 장쯤은 되겠지요. 그러나 일반인은 왜 선필을 여러 사람에게 까다롭게 따지지 않고 써 주는 가를 모릅니다.

 

불법을 전하는 포교의 목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대상을 가리지 않고 써주는 것입니다. 불법을 전파하는 데 빈부와 귀천을 가리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의 이치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해가 될 것입니다."

 

 ‘일붕 별一鵬 星’도 하늘에 있다는데 어떻게 하늘에 떠 있는 별을 가지게 되었습니까?

 

“국제항공등록청이란 단체에 미국인 제자들이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등록시킨 것입니다. 다음을 읽으시면 궁금증이 풀릴 것입니다.

 

우리 국제항성등록청은 다음에 명한 별을 일붕 서경보에게 불하 하여 별의 새로운 이름으로 지정하였음을 증명하는 바이다.

 

[별의 이름은 어퀼라]따라서 이 별은 이 순간부터 영원토록 스위스 천체관측소에 등록되며 미국 의회도서관에 위의 이름으로 기록될 것이다. 


[등록사무총장 : 셀라 스타스 도웨이쓰]

이는 서경보 법왕이 하늘의 별자리 하나를 사들여 자신의 이름으로 소유등록을 마쳤음을 공식적으로 증명하는 것입니다. 한국인 최초의 별주인星主이 된 것입니다. 별 이상한 얘기라고 생각하겠지만 엄연한 사실입니다.

 

그러면 어느 단체에서 주고 어떤 별을 ‘서경보 별'로 등록했을까요?

 

마치 땅의 주인을 정하여 등기소에 등록하는 것처럼 하늘에 떠 있는 별자리에 주인을 정하여 불하 하고 등록까지 시키는 국제항공등록청은 어떤 단체일까요? 미국과 캐나다 양국에 본부를 둔 이 단체는 세계적인 저명인사들을 회원으로 가입시켜 별의 소유권을 인정하는 흥미로운 단체입니다.

 

호기심이 많은 사람이 순수 민간단체의 성격으로 25년 전에 만든 이 단체에는 존경받을 만한 업적을 남긴 역사적인 인물들이 가입돼 있습니다. 등록된다고 해서 법적인 효력이 생기지는 않지만 하나의 상징적인 표상으로는 기록됩니다.

 

徐 法王이 받은 이 별은 은하수 동북쪽에 있는데, 여름철에 북반구에서 큰 빛을 발합니다. 많은 별 중에서 이 별을 택한 것은 법호인 일붕과 같은 의미가 있는 별이기 때문입니다. 원래 徐 法王이 회원으로 가입해서 불하 신청을 한 것은 83년 11월이었으나 심사를 거쳐 85년 7월에 정식으로 등록을 마쳤습니다. 

 

소유권 불하등록증명서와 별자리 위치 표시도면은 85년 7월 28일 한일 불교대회 미국 측 대표로 서울에 온 태드 홀로웨이 스님이 徐 法王에게 전달했습니다. 하늘의 별까지 사놓은 徐 法王이지만 물욕은 없어 ‘푸른 하늘이 곧 덮는 이불이요, 퉁소를 희롱하며 시냇물 소리 들으며 지팡이 짚고 거니는 것을 참 취미로 80 평생을 보냈다'라고 말합니다.”

 

 

많은 찬양가는 누가 지은 것이며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작사, 작곡자는 모두 제자들이며 스승의 무한한 法力을 흠모하고 찬양하자는 것이 주된 내용입니다. 대표적인 노래로는 일붕큰스님 찬양가와 법왕 찬가입니다만 이외에도 통일꾼의 노래, 일붕 법왕찬가, 일붕 선심가 등 다수가 있습니다. 그중 두 가지의 가사만 살펴보겠습니다.

 

우리 일붕 스님 사자좌에 오르사 높은 덕과 자비로서 중생 구도하시네! 토하시는 사자후에 온 세상이 감읍하고 걸으시는 걸음마다 불국정토 이루시니 호국안민 선 시비에 가르침을 깊이 담아 억겁 만겁 길이 길-이 이으오리다 우리 스님 일붕 스님 사자좌에 오르사 높은 덕과 자비로서 중생구도 하시네! 님이시여 임이시여 일붕법왕 님이시여 대한의 찬란한 빛 세계의 등불이 되어 사바세계 온 누리에 아니 가심 없으시니 옴아라남 아라다 옴 아라남 아라다 법왕님의 사자후는 우리들의 감로수니 어두움이 사라지고 자비 지혜 충만 되네.

 

앞의 노래가 일붕 큰스님의 찬양가이고 뒤의 노래가 법왕 찬가입니다. 여기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스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스님을 찬양함과 동시에 문도들의 하나 됨을 기리는 의미로 문도끼리 행사 시 부르고 있습니다. 5천 명이 넘는 일붕문도회는 단일계보 조직으로는 가장 많은 수가 되리라고 짐작됩니다.”

 

 

불국사 주지, 종립宗立 동국대 불교대학장, 대학선원장, 조계종 종정 지도위원까지 역임하신 핵심 인물로서 왜 새로운 종단을 만들었을까요?

 

“간단히 답할 문제는 아닙니다만 가장 짧게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나 다소 민감한 사안이라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그 때문에 말한 그대로 받아들이되, 사족을 붙이거나 확대 또는 추측하지 말고 읽었으면 합니다.

 

창종에 관해서는 한국불교의 역사부터 차분히 정리하며 줄거리를 잡아나가야 합니다.

 

우리나라에는 원래 禪宗과 敎宗으로 나뉘어 내려오다가 고려말 태고선사가 이 둘을 합해 조계종을 창종 했는데, 조선 시대의 억불숭유정책과 일제 침략기에 일본계통의 불교가 극성을 부리는 과정에서 선종도 아니고 교종도 아닌 '혼란'이 야기되었습니다. 

 

그러한 흐름이 최근까지 연장되다가 사찰 재산관리법에 따른 등록제가 폐지되자 수많은 종단이 생겨났으나 한국불교 본래의 모습을 찾기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참선도 하고 경전도 읽고 깨치는 선교 겸 종이 필요하다는 인식하고 불기 2532년(서기1988년) 9월 16일 창종 공고를 낸 다음 대한불교일붕선교종을 창종 했습니다. 창종시 내건 슬로 건은 '시대에 부응하는 불교 부흥과 포교 진작' 이었습니다.

 

역사적인 배경을 다시 한번 정리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고구려 소수림왕 327년 불교가 이 땅에 첫발을 내디딘 이래 우리나라의 불교는 선교禪敎 양종이 병립하여 융성 시대를 이루어 왔습니다. 하지만 시대적 변천에 따라 교세가 쇠퇴하려 할 때 보우국사가 여러 종파를 포괄하여 단일 종으로 창종, 통불교統佛敎로서 법맥을 이어왔습니다.

 

그러나 조선 시대의 배불정책과 광복 이후 서구의 물질문명 만연으로 민족종교인 불교가 주체성과 근본 사상이 흔들려 본연의 사명을 다하지 못하고 신뢰성마저 상실했습니다.

 

그 때문에 이러한 시대적 사명감을 되살리고 호국안민 사상을 높이는 한편 서양의 여러 나라에 한국불교를 적극적으로 포교하는 방법을 통해 세계평화에 공헌하고자 새로운 종단을 창종 한 것입니다. 

 

부수적으로는 일붕을 따르는 일붕선종회와 문도회의 지부장들이 사찰운영과 포교를 열심히 하지만, 종단에 소속되지 않은 관계로 여러 가지 불이익을 당하는 불편을 덜어주려는 배려도 있었습니다.

 

창종 후 일붕은 ‘조계종을 큰 집, 일붕선교종을 작은 집의 관계로 유지하겠다'라고 말해 세간에 떠도는 조계종과의 불화설을 부인했습니다.

 

실제 창종 후에도 일붕은 큰 집인 조계종과의 관계를 긴밀하게 유지하여 왔습니다.”

 

 

성격은 어떤 편이며, 건강 유지법은 무엇입니까?

 

“타고난 성품은 불처럼 급한 편이었지만 요즘은 오랜 수행을 거친 노스님답게 평정심에서 우러나온 온화함이 깃들어 있어 보는 이마저 편안하게 만들 정도입니다. 그러나 때로는 직선적이고 솔직담백한 일면을 보일 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거짓이나 꾸밈이라고는 찾을 수가 없습니다. 

 

출가 전의 결혼이나 득남, 출가 후 부인이 산사까지 찾아왔을 때의 번뇌 등을 숨김없이 말하는 면도 있고 어머님의 별세 소식을 듣고는 혼절할 정도로 슬퍼하는 인간적인 면도 보였습니다.


건강은 욕심을 버리고 규칙적인 생활을 하고 스스로 터득한 조식법(호흡법)을 생활화하면서 적게 먹고 녹차를 상용하는 방법으로 지키고 있습니다. 밤에 음식을 먹지 않고 짠 음식을 피하는 것도 비결이 되겠지요. 지금도 해외여행 중 특별한 일이 없으면 젊은 시절과 똑같은 하루 일과를 보냅니다.”

 

해외에 포교를 결심하게 된 이유와 해외 포교 시의 어려운 점은 무엇이었습니까?

 

“부처님의 자비 사상을 동양만이 아닌 서양에도 전파해야만 인류의 진정한 평화가 온다고 생각했습니다. 

 

초창기에는 한국의 전통적인 가사 장삼에 흰 고무신을 신고 붓글씨를 쓰자 이런 모습을 처음 본 서양의 기자들이 호기심으로 취재를 해서 대서특필하는 바람에 가는 곳마다 유명인사가 되었습니다.

 

어려운 점은 문화와 풍토가 달라서 오는 문제였습니다. 예를 들면 가부좌를 못 틀어 도중에 좌선을 포기한다든가 하는 일이었지요. 또 서양인의 개념에 전혀 생소한 불교철학의 용어를 설명하기도 쉽지는 않았습니다. 그때마다 쉬운 설화를 중심으로 이해시켰지요.”

 

 

종교관, 승려의 사회참여, 자화상, 오도송, 생사관, 얻은 호칭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모든 종교의 본질은 선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일치하나 목표를 달성하고자 하는 방법과 절차만 다를 뿐이라는 소신이 있습니다. 그래서 교황이나 추기경과도 만나고 개신교 측 지도자와도 거침없이 교류합니다.

 

일붕은 모든 종단과 종파의 지도자들이 손잡고 합심하여 인류평화와 ‘공동선共同善창출’을 도모하자고 호소합니다. 일붕은 인류 모두가 기도하는 자세와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을 강조하지요.


승려의 사회참여를 지원하는 편입니다.

 

다만 반정부적이거나 사상성이 개입되는 언행은 삼가라고 제동을 걸지요. 수도자의 본분을 망각하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역대 스님 중 혜초 스님이나 서유기에 나오는 삼장법사와 가장 닮았다고 여기고 또 그렇게 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마음도 행동도 걸릴 것이 없으니 / 걸림 없는 마음과 행동 / 이것이 도인의 길 / 흐르는 물 걸림이 없으니 / 구름도 걸림이 없네 / 걸림 없는 운수雲水와 / 사물 밖의 이웃이여, 무애라는 이 시가 일붕의 마음을 전해주고, '마음은 맑은 거울과 같이 항상 깨끗하게 같고 의기는 맑은 날의 기후와 같이 화창하게 가져라'라는 금언金言이 고승의 자세를 보여줍니다.

 

이미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피하려는 소아적인 태도에서 벗어나 ‘삶과 죽음이 하나’라는 생사의生死一의 경지에 올랐습니다.

 

실제 일붕을 만나면 저절로 편안한 마음이 일고 인간존재의 불안정성과 生死의 한계적 상황을 초월한 내적 자유가 풍김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일붕은 견성見性의 의미가 담긴 선시禪詩를 수 없이 많이 발표했습니다.

 

일붕에게 있어 깨달음은 곧 미적 의식이 짙게 깔린 시로 나타났으며, 그 선시 속에 감정과 이성과 오도悟道를 자유자재로 담고 있습니다.

 

家家靜坐 法王城 日出三更 鶴一聲가가정좌법왕성일출삼경학일성

고요하게 법왕성에 앉아 있는데 / 태양이 삼경 밤 자정에 떠오르고 학이 한 소리를 지르고 날았다.

 

일붕이 밝힌 오도송悟道頌 일구 입니다.

 

그가 받은 호칭은 세계법왕, 세계대승왕, 법왕 대승정, 종정, 삼장법사, 라마, 조사, 대조사, 존자, 성사聖師 등이 있습니다.”


스님, 이것이 궁금합니다. 21-이어서 다음 호에는

             불교의 신통력과 윤회에 대해서는 어떤 입장을 갖고 있습니까?가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