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글, 김용규 삼장전법사 | “만물의 영화와 시듦에도 저마다의 시詩가 있다.” 이 짧은 한 구절 안에, 자연과 인생, 그리고 세상살이에 대한 불교적 통찰이 응축되어 있다. 자연은 시들어야 다시 피어난다.
봄이 오면 꽃이 피고, 가을이 오면 낙엽이 진다. 이 단순한 자연의 흐름 속에도 부처님의 가르침은 살아 숨쉰다. 꽃은 피기 위해 지고, 지기 위해 피는 것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도, 시듦은 다음 생명의 순환을 품고 있다. 세속에서는 ‘성공’과 ‘실패’라는 이분법으로 세상을 나눈다.

그러나 불교는 묻는다. “영榮만이 삶인가? 고枯는 실패인가?”
삶의 진리는 언제나 ‘무상’의 법法 위에 서 있다. 영화로움도 시듦도 모두 ‘변화하는 과정’일 뿐, 본질은 아니다. 그리고 그 모든 변화 속에는 한 편의 시가 깃들어 있다.
시들어도 인생은 시詩입니다 한 청년이 낙방 후 말했다. “제 인생은 끝났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에게 되묻고 싶었다. “끝이 아니라 쉼표입니다. 시 한 편이 완성되기 위해 중간 중간 침묵이 필요하듯, 지금 당신은 새로운 문장을 준비하는 중입니다.”
노인의 손등에는 주름이 있고, 노동자의 손에는 굳은살이 있다. 그 주름과 굳은살도, 다만 시의 한 줄이다. 우리는 삶의 영고榮枯를 판단하려 들지만, 부처님의 눈에는 그 모든 것이 법法의 시, 생명의 시일 뿐이다.
지금 우리 사회도, 하나의 시절 속에 있다 오늘날의 한국 사회는 격변의 한 가운데에 있다. 갈등, 불신, 고립, 경쟁이 모든 흐름 속에서도 우리는 묻는다.
“지금은 어떤 계절인가?” 지금이 시듦의 시절이라면, 이 또한 지나가고, 피어날 새봄이 준비되고 있음이다. 그리고 그 속에는 연기緣起의 이치와 자비의 언어로 쓰여진 시 한 편이 숨어 있다.
법法은 곧 시詩다.
불교에서 말하는 ‘법法’은 진리이며 동시에 ‘이치’다. 그 법은 반드시 말로 쓰이지 않는다. 때로는 침묵으로, 때로는 시듦으로, 우리 삶의 가장 낮은 곳에서 고요히 쓰여지고 있다.
만물이 피고 지는 일상 속에서 우리는 모두 시인이자 수행자이다. 삶의 영화로움을 찬탄하되, 시듦을 부끄러워하지 마시라. 그 모두가 하나의 시, 하나의 수행의 구절이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말씀하셨다.
“세상은 고통으로 가득하지만, 그 속에도 깨달음의 길이 있다.”
그 길은 늘 우리 곁에 있다. 영화로움 속에서도, 시듦 속에서도 저마다의 시가 피어나고 있음을 기억하자. 그 시를 읽는 눈이 곧 지혜般若이고, 그 시를 품는 마음이 곧 자비慈悲이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