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우주의 진리는 큰 북과도 같습니다. 크게 치면 큰 소리가 나고, 작게 치면 작은 소리가 납니다. 우리의 말 한마디, 생각 하나, 행동 하나가 이 북을 두드리는 손길이 됩니다. 정성스럽고 간절히 치면 그 울림은 멀리멀리 퍼져나가, 사람들의 마음을 깨우고 세상의 어둠을 밝히는 법음이 됩니다. 그러나 산만하고 무심히 치면 그 소리는 작고 흐릿하여, 자신조차도 듣지 못한 채 허공에 흩어지고 맙니다. 우리 가족이 오늘 나눈 말들은 어떤 소리로 남았는지요? 격려와 감사의 소리였는지, 아니면 불평과 원망의 소리였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봅니다. 가족은 작은 우주입니다. 이 우주 안에서 울리는 소리는 가장 진하고 깊은 진실이 됩니다. 가장 사랑하는 사이이기에, 가장 조심하고 또 가장 정성을 다해야 합니다. 때로는 큰 북소리처럼 용기 있게 진실을 말해야 하고, 때로는 작은 북소리처럼 다정하고 조용한 말로 서로를 감싸야 합니다. 우주의 북은 거짓을 울리지 않습니다. 진심만이 울림을 남깁니다. 우리 가족의 마음이 진심으로 북을 울릴 수 있도록, 서로의 말에 귀 기울이고, 서로의 마음에 머물기를 바랍니다. 진리를 향해 걷는 길 위에서, 우리 가족이 함께 북을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세상을 살다 보면 우리는 수많은 인연을 만납니다. 어떤 이는 우리의 벗이 되어 따스한 손을 잡아주고, 어떤 이는 우리의 마음에 상처를 남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가르치셨습니다. "怨親平等 同體大悲" 원수와 벗을 가르지 말고, 모두를 평등히 여기며, 한 몸처럼 품는 자비를 지녀야 한다고. 원망하는 이도, 사랑하는 이도, 모두 한 세상의 중생이요, 모두가 고통과 기쁨을 함께 겪는 인연입니다. 우리가 미워하는 그 사람 또한 자신의 무명을 이기지 못해 아픔을 드러낸 것일 뿐, 본성은 모두 부처님과 같은 청정한 빛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미움에 끌리지 않고, 친애에 집착하지 않으며, 모든 인연을 평등하게 대하고, 한없는 자비로 서로를 어루만져야 합니다. 서로 다투는 마음을 거두고, 서로 상처내는 말을 삼가며, 적대와 집착을 초월하여 모든 존재를 있는 그대로 껴안는 것. 그리할 때, 우리 마음은 진정으로 자유로워지고, 이 세상은 고통이 사라진 정토淨土가 될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 모두 '怨親平等원친평등'의 마음을 지니고, '同體大悲동체대비'의 가슴으로 세상을 품읍시다. 그것이 곧, 자신을 구하는 길이요, 모든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오늘 우리는 “인간의 본질”이라는 주제로 마음의 길을 함께 걸어보고자 합니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이 질문은 수천 년 전부터 이어져 온 인류의 깊은 물음입니다. 살을 가진 육신인가, 감정을 느끼는 마음인가, 아니면 생각하는 지성인가? 불교에서는 말합니다. “일체중생 실유불성一切衆生 悉有佛性” 모든 중생은 다 불성을 지니고 있다. 즉, 인간의 본질은 결코 외모나 재물, 지식에 있지 않고, 바로 그 안에 숨겨진 ‘깨달음의 씨앗’, ‘자비와 지혜의 빛’에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때로 화를 내고, 질투하고, 욕망에 이끌려 방황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의 참된 모습은 아닙니다. 그 모든 험한 파도를 지나 고요한 마음의 바다 아래에는 언제나 맑고 밝은 불성이 숨 쉬고 있습니다. 본질은 감추어져 있지만, 사라지지 않습니다. 구름이 태양을 가릴 수는 있어도, 태양 그 자체를 없앨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단 하나. 본래의 나를 기억하는 것. 진실한 나, 자비로운 나, 지혜로운 나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수행을 합니다. 매일 잠시 눈을 감고 호흡을 바라보며, 거짓된 나를 내려놓고, 참된 나와 다시 마주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꽃을 집어 미소하니, 마음과 마음이 서로 통한다. 여러분, 한 번 눈을 감고 상상해 봅시다. 한 스님이 조용히 연꽃 한 송이를 들고 있습니다. 아무 말 없이, 그저 미소만 지었을 뿐입니다. 그 모습을 본 제자 가섭은, 말 없이 웃었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스승과 제자는 말없이 마음이 통했습니다. 이 이야기가 바로 ‘염화미소拈花微笑’입니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깊은 마음의 교감”이지요. 이처럼, 세상에는 말보다 더 깊이 전해지는 마음이 있습니다. 웃는 얼굴, 따뜻한 눈빛, 진심 어린 행동. 이것이 바로 ‘심심상인心心相印’, 마음과 마음이 서로 통하는 길입니다.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특히 많은 갈등과 고민 속에 있는 청소년 여러분에게도 이 마음의 길은 아주 소중한 열쇠가 됩니다. 친구와 다투었을 때, 부모님과의 오해가 생겼을 때, 굳이 말로 다 설명하려 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때로는 진심 어린 미소 하나, 작은 배려 한 번, 그것만으로도 마음은 전해질 수 있습니다. 스님들이 말하는 ‘참된 깨달음’은 거창한 철학이나 깊은 공부에서만 오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아주 작은 순간, 꽃을 보고 미소 짓는 그 마음속에도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불자 여러분, 그리고 도반 여러분, 반갑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는 "자기영광自己靈光"이라는 주제로 마음의 등불을 함께 밝혀보고자 합니다. 자기영광이란 무엇일까 글자를 풀이하자면, '자기自己'는 나 자신, '영광靈光'은 본래부터 지닌 맑고 거룩한 빛'을 말합니다. 즉, 자기영광이란 '스스로 안에 지닌 본래의 빛, 본래의 지혜, 본래의 불성佛性'을 의미합니다. 우리 마음속 깊은 곳에는 태어나기 전부터 존재한, 더럽혀지지 않은 광명이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이것을 '자성自性', 또는 '여래장如來藏', '본래면목本來面目'이라 부르기도 하지요. 그런데 우리는 세상의 시끄러운 소음과 끊임없는 욕망, 비교와 다툼 속에서 이 자기영광의 빛을 점점 잊고 살아갑니다. 마치 거울에 먼지가 앉으면 비추는 본래의 모습을 볼 수 없듯, 우리 마음의 거울도 탐진치貪瞋癡로 흐려져 본래의 자비와 지혜를 비추지 못하게 됩니다. 수행이란 밖으로 나가 무언가를 찾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본래부터 있는 영광, 광명, 불성을 다시 바라보고, 닦고, 깨우는 일입니다. 《능엄경》에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만법은 모두 자성으로부터 비롯된다." 즉, 깨달음도, 자비
법왕청신문 장규호 기자 | 오늘은 거룩하신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우리 수행자들에게 있어, 계戒는 수행의 기초이며, 청정한 삶의 근본입니다. 오늘은 ‘일체계행’이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함께 마음을 모아보고자 합니다. '일체계행一切戒行'이란,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모든 계율과 행실'입니다. 이는 단순히 몇 가지 계율을 지키는 데 그치지 않고, 삶의 모든 순간에 계戒의 정신을 온전히 실천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부처님께서는 계율을 외적으로 지키는 데 머물지 말고, 마음속 깊은 곳까지 계의 뜻을 새기고 실천하라고 하셨습니다. 어떤 이는 계율을 지키는 것을 '억압'이라 여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수행자에게 계는 억압이 아니라 해탈을 위한 보호망입니다. 예컨대, 우리가 자동차를 운전할 때 신호를 지키는 것은 자유를 빼앗기기 위한 것이 아니라, 보다 안전하고 평화롭게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한 지혜로운 선택입니다. 계는 마음의 혼탁함을 씻어내는 약이며, 어지러운 세상 속에서 나아갈 방향을 알려주는 나침반입니다. 그러므로 일체계행이란, 계를 삶의 모든 행동과 말, 생각에까지 확장하여 계율을 삶의 근본으로 삼는 전면적 실천입니다. 우리는 몸으로 짓는 업(신업 身業), 말로 짓는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사랑하는 청소년 불자 여러분, 오늘은 "보불은덕報佛恩德", 곧 "부처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삶"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 합니다. 여러분은 혹시, “내가 왜 지금 이 세상에 살고 있을까?” "왜 힘든 일도 많고, 기쁜 일도 있는 걸까?" "삶의 의미는 뭘까?" 이런 생각, 해본 적 있나요? 부처님은 이런 물음에 대한 해답을 2,600년 전부터 우리에게 전해주고 계십니다. 그 가르침이 바로 불법佛法이에요. 부처님은 어떤 분이신가요? 부처님은 왕자의 자리도, 부귀영화도 모두 버리고 온 세상의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진리를 찾으신 분입니다. 깨달음을 얻으신 뒤, "나만 홀로 자유로울 수 없다. 모든 중생이 함께 행복해져야 한다." 이런 큰 자비심으로 45년 동안 걸으시며 가르침을 전하셨어요. 생각해보면, 우리가 이렇게 불법을 배우고 마음을 돌아볼 수 있는 건 바로 부처님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이 은혜는 말로 다 표현하기 어려운 은혜입니다. 보불은덕, 즉 은혜에 보답한다는 것은 뭘까요? 보불은덕은 단순히 절에 나와 절을 하고, 기도를 드리는 것만을 말하지 않아요.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남기신 가르침을 기억하고, 그것을 삶 속에서 실천하는 것이 바로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오늘은 ‘인위사상人爲思想’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인위사상이란, 인간의 의지와 노력으로 모든 것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을 바탕으로 한 사상입니다. 인간의 능력과 창조성을 강조하는 이 사상은 한편으로는 발전과 개혁의 원동력이 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연의 도리를 거스르는 어리석음으로 이어질 수도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무위無爲"를 중요한 가르침으로 삼습니다. 무위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흐름을 거스르지 않는 지혜로운 실천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종종 스스로의 힘으로 모든 것을 바꿀 수 있다고 착각하고, 지나친 욕망과 집착 속에서 고통을 자초하곤 합니다. 이것이 인위사상의 그늘입니다. 인위사상은 인간이 주어진 운명에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개선하고 발전시키려는 태도를 의미합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인류는 이러한 태도를 통해 문명을 발전시키고, 과학과 기술을 발달시켜 왔습니다. 부처님께서도 출가 전에는 왕자로서 주어진 삶을 살 수도 있었지만, 인간의 고통을 해결하고자 하는 의지로 출가하여 깨달음을 얻으셨습니다. 또한 불교에서도 보살행菩薩行은 적극적인 자비 실천을 강조하며, 이는 인간의 의지를 통해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입춘立春은 24절기 중 첫 번째 절기로, 겨울이 지나고 봄이 시작됨을 알리는 중요한 시점입니다. 보통 양력 2월 4일경에 해당하며, 금년에는 2월 3일로서 대자연의 기운이 다시 살아나고 새 생명이 움트는 때입니다. 불교적으로도 입춘은 새로운 수행과 정진의 시작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겨울 동안 움츠렸던 몸과 마음을 다시 가다듬고, 법法의 씨앗을 심어 한 해 동안 복덕과 지혜를 기르는 시기입니다. "입춘대길立春大吉"은 "입춘을 맞아 큰 길운吉運이 깃들기를 기원한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대길大吉"은 최고의 길함을 의미하며, 집안과 개인에게 복이 깃들기를 바라는 염원이 담겨 있습니다. 또한, "건양다경建陽多慶"이라는 말과 함께 사용되기도 하는데, 이는 "밝은 기운이 세워지고 경사가 많기를 바란다"는 의미입니다. 예로부터 입춘이 되면 집 대문이나 기둥에 "입춘대길 건양다경"과 같은 글귀를 적어 붙이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이를 입춘첩立春帖이라 하며, 액운을 막고 좋은 기운을 맞이하려는 의미가 있습니다. 불교에서도 이러한 풍습을 수행과 연결하여 "입춘기도"를 하거나 "입춘 법회"를 열어 새해의 복덕과 수행의 길을 열고자 했습니다. 입춘은 단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勿爲受惠者(물위수혜자) "받는 자가 되지 말라"는 뜻입니다. '勿(물)'은 하지 말라는 경고를, '爲(위)'는 되다, 행하다를, '受惠(수혜)'는 은혜나 도움을 받음을 뜻합니다. 즉, 남에게서 도움을 받는 데만 의존하지 말고, 스스로의 삶을 개척하라는 가르침입니다. 恒爲施與者(항위시여자) "항상 주는 자가 되라"는 뜻입니다. '恒(항)'은 언제나, 변함없이를, '施與(시여)'는 나누고 베푸는 것을 뜻합니다. 이는 언제 어디서든 베풀며, 나눔의 삶을 실천하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받는 자는 순간의 도움에 머물 수 있지만, 주는 자는 영원히 빛나는 존재가 됩니다. 세상에는 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곁에는 언제나 기꺼이 손을 내미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풍요로워지는 것은 받는 것이 아니라, 나누고 베푸는 데서 비롯됩니다. 받기만 하는 삶은 한계가 있습니다. 받는 데 익숙해지면 감사를 잊고, 더 많은 것을 바라게 됩니다. 반면에 주는 삶은 스스로를 풍요롭게 만듭니다. 마음의 여유가 생기고, 나눔의 기쁨이 삶을 채웁니다. 주는 자가 되는 실천의 길 1. 작은 것부터 시작하세요 나눔은 크고 거창하지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한 제자가 묻기를, "스승님, 무위란 무엇입니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입니까?" 그러자 스승은 미소를 지으며 말씀하셨다. "너는 바람을 잡아본 적이 있느냐?" 제자가 고개를 저었다. "바람은 잡으려 하면 도망가지만, 그저 느끼면 온몸을 스쳐 지나간다. 그것이 무위다. 억지로 잡으려 하지 않아도, 바람은 어디든 가고, 그 속에서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 스승은 손짓으로 숲속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소나무는 누가 그리 곧게 키웠느냐? 백학은 누가 날아오르도록 가르쳤느냐? 누구도 시키지 않았지만, 자연은 스스로 이치에 맞게 움직인다. 무위란 이렇듯 자연의 도리를 따르는 것이다." 제자는 다시 묻는다. "그러면 사람은 아무 일도 하지 말아야 합니까?" 스승은 조용히 차를 따르며 말했다. "너는 지금 숨을 쉬고 있다. 숨을 쉬기 위해 애쓰느냐?" "아니요, 저절로 이루어집니다." "그렇다. 무위는 억지로 하지 않는 것이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을 깨닫고 그 흐름에 따라가는 것이 진정한 무위다." 스승은 다시 말했다. "물을 보아라. 물은 스스로 흘러가며 바위를 깎고, 생명을 적시며, 바다를 이룬다.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오늘 우리는 '자리이타'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자리이타'는 '자신의 이익을 도모함으로써 타인의 이익도 도모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는 불교의 중요한 가르침 중 하나로, 우리 삶 속에서 실천할 수 있는 지혜와 자비의 길을 제시합니다. 먼저, 자리는 자신을 이롭게 하는 것입니다. 이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돌보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자신의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유지하고, 스스로에게 친절하며, 자신의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하는 것이 포함됩니다. 우리는 자주 자신을 돌보는 일을 소홀히 여기지만, 이는 결코 이기적인 행위가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의 행복과 평화가 바탕이 되어야만 다른 사람에게 진정한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잘 돌본 후, 우리는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을 이롭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내면의 평화를 찾고, 자비와 사랑으로 충만해지면, 그 에너지는 주변 사람들에게도 전해집니다. 우리가 행복하면, 그 행복은 가족과 친구, 더 나아가 이웃과 사회에도 전파됩니다. 작은 친절과 배려의 행동들이 모여 큰 변화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자리이타'의 실천은 일상 속 작은 일에서 시작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오늘은 청허請許라는 단어의 깊은 의미와 우리가 삶에서 그것을 어떻게 실천할 수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자 합니다. 청허의 의미 청허란, '청請'은 청하다, 요청하다의 뜻이고, '허許'는 허락하다, 받아들이다의 뜻을 가집니다. 이를 합치면 “상대방에게 정중히 허락을 구함”을 의미합니다. 이는 단순히 부탁의 행위가 아니라, 겸손과 배려, 그리고 상대를 존중하는 마음이 깃든 표현입니다. 청허의 정신은 불교의 가르침에도 닿아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가르침 중에는 "겸손과 공경의 마음을 갖추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무엇을 얻기 위해 강요하거나, 자신의 이익만을 앞세우기보다, 상대방의 입장을 헤아리고 허락을 청하는 자세가 바로 청허의 실천입니다. 청허의 마음가짐 세상은 서로 다른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고, 우리의 욕망과 타인의 욕망이 충돌할 때가 많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청허의 마음가짐은 다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겸손함을 지니기 청허는 나의 뜻을 먼저 내려놓고 상대방의 뜻을 받아들이겠다는 겸손한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이 겸손함은 이기심과 교만함을 내려놓게 하며, 상대방에게 신뢰를 심어 줍니다. 상대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우리가 흔히 말하는 '지혜'란, 단순히 지식이나 경험을 넘어서, 깊은 이해와 통찰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지혜의 첫걸음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자신의 미흡함을 깨닫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자신이 아직 완전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는 태도야말로 진정한 성장을 위한 첫걸음입니다. 1. 자신의 한계를 아는 것의 중요성 많은 이들이 자신의 부족함을 외면하고, 그저 겉으로만 완벽해 보이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스스로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비로소 우리는 새로이 배울 준비가 된 것입니다. 부족함을 인정하는 것은 결코 약함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진정한 강함이며, 참된 지혜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2. 겸손을 통해 진리를 배우다 부족함을 아는 사람은 교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스스로를 낮추고 다른 이들로부터 배우고자 합니다. 이는 겸손의 길이며, 이를 통해 우리는 더 깊은 진리와 깨달음에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이러한 자세는 자기 성찰의 토대가 되며, 내면의 성장을 이끄는 중요한 힘이 됩니다. 3. 매 순간 성장하는 삶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는 삶은 정체된 삶이 아닙니다. 오히려 매 순간 새롭게 배우고 성장하는 삶입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삼십이상(三十二相)"은 불교에서 부처님의 외형적 특징을 나타내는 32가지의 특별한 상(相)을 말합니다. 이 상들은 부처님의 위대함과 완전한 깨달음을 상징하며, 모든 중생에게 자비와 지혜를 나누어주는 분임을 나타냅니다. 이 사상을 바탕으로 법문을 만들어 보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삼십이상"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합니다. "삼십이상"은 부처님께서 성불(成佛)하신 후 드러난 32가지의 외형적 특징을 의미합니다. 이 상들은 단순히 외적인 아름다움을 넘어, 부처님의 내적인 자비, 지혜, 그리고 깨달음의 완전성을 상징합니다. 삼십이상의 각 상들은 하나하나가 깊은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부처님의 손발이 바닥에 닿는 부분이 평평하다는 상(상평족상, 相平足相)은 모든 존재와 평등한 자비를 실천하신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또한, 부처님의 혀가 길게 뻗어 있다는 상(설상, 舌相)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진리이며, 그 진리가 모든 중생에게 미칠 수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러한 외형적 특징들은 부처님의 내면적 성취와 연결되어 있으며, 부처님의 몸 자체가 깨달음의 완전함을 드러내는 도구가 됩니다. 삼십이상을 보고 듣는 것은 부처님의 깨달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