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왕청신문 이존영 기자 | 1967년 일붕이 미국에 뿌린 불교의 씨앗이 나날이 자라는 것이 보인 한 해였다. 박정희 씨의 6대 대통령 당선, 동백림사건, 문무대왕릉 발견, 중동전발발, 정일권 총리 방미 등이 있던 정미(丁未)년이었다. 일붕은 소속된 학교를 벗어나 보다 넓은 범위의 대외활동을 전개했다. 2월 23일 로스만 대학에서 종교지도자(가톨릭, 불교, 이슬람교) 대상의<禪佛敎의 救世主義> 강연, 2월 6일과 16일의 필라델피아 라디오방송(禪을 소개), 2월 24일 국제회관의<선의 근본정신> 공개강연, 3월 14일과 16일 췌스트낫 여자대학의<불교의 역사적 발전>, 4월 4일과 6일의<불교의 인생관과 한국의 선> 강의, 드렛셀공대의 초청강연<한국고승의 열반과 사리><소승불교와 대승불교> 강좌, 법률가 및 종교심리학회 강연, 3월 12일의 필라델피아, 뉴욕, 뉴저지 선원 합동 좌 선회, 7월 뉴저지주 리에 촌의 3일간 특별하기 선회, 8월 뉴욕주 택시도 공원 지대와 펌프킨 지대의 특별 좌 선회, 5월 10일 뉴저지주 아틀랜틱 캄유니대학 초청 <한국불교는 어떤 불교인가> 강연, 4월 2
법왕청신문 이존영 기자 | 일붕이 하와이에서 일본 불교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던 그해에는 미국의 존슨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하고 한미행정협정의 조인 등 한미관계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기 시작했다. 험프리 부통령, 버거 국무성 차관보, 러스크 국무장관 등이 잇달아 방한했고 한미평화봉사단협정에 서명했다. 한편 국내에서는 전 내각 수반을 지낸 장면 씨의 사망(6월 4일), 김기수 선수 세계 주니어미들급 챔피언 획득(6월 25일), 제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발표(7월 29일) 등의 기억할만한 일들이 있었다. 한국과 미국 간에 정부와 정부 또는 각료와 각료 사이에 맹방으로서의 유대를 다지고 있을 때 일붕은 학문과 인격, 그리고 수행에서 우러나온 참선을 갖고 조용히 미국 곳곳을 뒤흔들며 한국의 이미지 제고에 이바지하고 있었다. 다음 글은 일붕이 하와이대학에서 공개강연을 통해 발표한 <왜 불교를 배우는가>란 주제를 간추린 것이다. 불교는 많은 분야가 모여 성립되었으며 깊고 오묘한 사상을 포함하고 있다. 종교이기도 하지만 철학과 과학이기도 하다. 선을 포함한 불교를 우리가 필요로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먼저 종교로서의 불교는 자비의 종교다. 자비의 목적은 현
법왕청신문 이존영 기자 | 일붕은 문화적인 배경과 종교의 성향상 극과 극을 달리는 미국인에게 동양, 특히 한국 고유의 선을 어떻게 이해시켰는가. 이 점은 ‘일붕 붐’을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미국에 불교를 소개했던 사례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각국이 미국에 진출한 교포를 상대로 하는 경우이고 또 하나는 학문적인 차원에서 유럽처럼 지식인 위주로 연구되는 경우이다. 그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 미국인을 대상으로 한 포교는 없었다고 보인다. 일본인 불교학자 스즈키 다이세쯔 같은 사람은 일본 불교의 학문적인 이식에 성공한 사례고 일붕을 미국에 초청했던 중국 승려 禪師 같은 사람은 교포를 상대로 포교하기 위해 도미 渡美한 상자에 해당한다. ‘일붕 붐’은 이 두 가지의 사례를 겸했을 뿐만 아니라 직접 시범을 보이면서 미국인 엘리트를 상대로 파고든 전략이 성공한 탓에 일어난 것이다. 포교는 원칙적으로 밑으로부터 위로 향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이는 기독교의 세계화를 성취한 고전적인 전략이다. 그러나 일붕은 현지 상황을 주도면밀하게 분석하여 그러한 포교 방법이 통하지 않는다고 판단하여 예외적인 전략, 즉,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포교에 진력했다. 하지만
법왕청신문 이존영 기자 | 1965년 3월 24일. 일붕은 컬럼비아대학을 떠나 캘리포니아대학 동양학과 교환교수로 자리를 옮겼다. 국내에서는 한일협정 체결과 월남 파병으로 데모가 그치질 않았고 하와이에서는 독재자 이승만이 숨진 을사(乙巳)년. 이 해에 일붕의 미국 포교는 탄탄한 기반을 구축하고 본격적인 궤도에 오르게 된다. 캘리포니아대학은 그 당시 동양 언어학과장인 로저스 박사가 중심이 되어 해인사<팔만대장경>를 英韓 漢文의 3종으로 목록을 작성했고, 도서관에는 해인사 대장경 목판본 3천여 권을 소장하는 한편 대장경의 영인본과 한글본을 마련했을 정도로 불교연구에 대단한 관심을 쏟고 있었다. 일붕이 이 대학으로 옮긴 것은 연초에 道心이란 법명을 얻고 법제자가 된 완델(Wan Del)씨의 주선에 의한 것이었다. 완델씨는 캘리포니아에 사비를 들여 길을 닦아 완델路라고 붙였을 정도로 재력을 가진 미국인이었는데, 일붕의 제자가 된 이후부터는 禁酒, 禁煙, 1일 2식을 하면서 아침저녁으로 참선을 하는 열렬한 신자가 되었다. 그는 일붕을 흠모하여 자신의 별장에다<조계종 미국불교 선원>을 차리고, 일붕을 집에 모셔다 각종 편의를 제공했다. 부인 완델 여
법왕청신문 이존영 기자 | 1964년 10월 4일. 미국 뉴욕의 불교회관. 이날은 한국 불교의 미국 포교에 일대 전환점이 된 획기적인 날이다. 연일 지식인을 상대로 선을 강의하던 일붕의 진지한 태도와 求道者다운 엄숙함, 그리고 엄한 계율에 반한 미국인 네빌 워위크(Dr. Neville Warwich) 박사가 자청하여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은 날이기 때문이다. 네빌 워위크 박사는 20년간 가톨릭 신부로서 가톨릭의 성의聖衣인 로만 칼라를 입고 활동하다가 몇 년 전 神父職을 포기하고 티베트불교 淨土宗에 귀의했다가 일붕을 만나 한국 불교의 승려가 된 것이다. 그는 일붕의 상좌(上佐: 제자)가 되었는데, 일붕이 상좌에게 주로 내리던 돌림자인 道字를 따 도명道明이란 법명을 얻었다. 일붕은 참으로 흐뭇한 마음으로 도명의 건당식建幢式을 치렀다. 건당식이란 눈 밝은 큰스님과 눈 밝은 제자 사이에 법法을 고스란히 이어주고 이어받는 불교의 엄숙한 의식 중 하나이다. 건당식을 마침으로써 네빌 워위크씨는 도명으로 새롭게 태어났고, 일붕은 벽 안의 지식인 상좌를 얻었으며, 한국 불교는 최초의 미국인 승려가 생겨난 것이다. 도명으로서는 가톨릭의 신부복인 로만 칼라 대신 승복을, 성서
법왕청신문 이존영 기자 | 1964년 8월 29일. 세속의 나이로는 51세, 법랍 33세가 되던 해, 갑진년(甲辰年) 음력 칠월 스무이튿날. 일붕은 마침내 미국으로 향하는 영국 항공사의 트랩을 올랐다. 이 해에 국내에서는 대일 굴욕외교반대 범국민특위가 결성되고 김종필, 오히라의 메모로 불이 붙은 데모 격화로 서울 일원에 비상계엄령선포(6·3사태), 월남파병을 위한 국군파견에 관한 협정체결, 동양방송 개국, 석굴암 복원공사 항공기 국내 첫 취항 등이 있었고 미국 레인저 착륙, 맥아더 사망, 소련 흐루쇼프 실각과 브레즈네프 입각, 존슨 미국 대통령 당선, 중공 제1회 원폭실험 성공 등이 있던 해였다. 인공위성 6호 발사 및 同 7호 달 표면 착륙, 맥아더 사망, 소련 흐루쇼프 실각과 브레즈네프 입각, 존슨 미국 대통령 단선, 중공 제1회 원폭실험 성공 등이 있던 해였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중국 승려 경륜조사慶輪祖師와 불교협회 초청으로 미국행 비행기에 오른 일붕은 동남아시아 미얀마와 스리랑카, 유럽의 서독과 영국에서 보낸 교환교수 시절과 6·25 때의 고생이 연상聯想작용에 의해 겹쳐졌다. 참으로 힘들고 어려운 시기였다. 동남아에서는 더위와 오후 불식(하루에 두
법왕청신문 이존영 기자 | 초대법왕 일붕 서경보 큰스님 전기집 오! 한국의 달마여 佛敎와 文學 불교에는 팔만대장경이란 거대한 경전經典이 있다. 이는 종합적인 성격을 가진 방대한 종합 체이다. 따라서 보는 관점과 입장에 따라 여러 종류로 나누어진다. 예를 들면 철학자, 과학자, 문학자, 정치가, 교육자, 미술가, 경제학자, 군사연구가들이 각각 자기의 기준에 따라 팔만대장경을 다르게 평가하는 것이다. 옛 문장가 소동파蘇東坡가 노산盧山이란 높은 산을 이렇게 그린 시가 있다. 橫着成嶺側着峰하니, 遠近高低自不同이라, 不見盧山眞面目은, 只緣身在此山中이라. 이는 다 같은 노산이지만 멀리서 횡(옆)으로 보면 큰 재가 되고 몸을 기울여 올려다보면 높은 봉우리가 된다. 멀고 가까이서 보는 높낮이가 같지 않다. 그러나 노산의 참모습을 보지 못하는 것은 몸이 노산 가운데에 있기 때문이란 의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불교는 보는 자의 생각과 기준에 따라 달리 표현된다. 그래서 한 가지로 규정짓기 어려운 것이다. 불교는 마음 심(心)자 하나를 온갖 형태로 전개 한 것이다. 그런데도 ‘이것이 불교다'라고 단언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 갈래가 워낙 복잡하기 때문이다. 불교는 마음의 근본 바탕
법왕청신문 이존영 기자 l 오한국의달마여! 불교의 4중 세계관 (3) 일붕의 초기 사상을 엿볼 수 있는 글을 두 가지만 더 보기로 하자. 실제 일붕의 초기사상은 미국으로 건너가기 전에 거의 완결된 상태로 짐작된다. 경전의 연구나 선의 수행에서나 모두 최고의 경지에 도달했다는 게 당시의 중론이었다. 불교의 다면성多面性 가운데 문학적인 요소를 간추린 佛敎와 文學이란 글과 불교철학을 압축시킨 佛敎哲學의 四重 世界觀이란 글은 잘 정돈되고 체계화된 그의 내면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글을 통해 일붕은 불교의 대중화란 신념을 점진적으로 구현하는 발판을 구축한 것이다. “모든 것은 변화합니다. 불교도 시대와 여건에 맞도록 변화하고 적응하는 가운데 시대와 조화를 이루는 슬기를 익혀야 합니다. 그래야만 범세계적인 진리로서의 영구성을 확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는 이를 위해 남들이 꿈조차 꾸지 못하던 시절에 물설고 땅 설은 동남아와 유럽에서 공부했습니다.” 일붕이 절치부심하여 불교의 현대화를 추구하는 이유를 짧게 설명한 말이다. 뒤에 싣는 두 글은 당시 일붕이 어떤 사상의 틀을 형성했는가를 잘 나타낸 것이다. 따라서 다소 긴 인용이 되더라도 꼭 살필 필요가 있는 글이다. 또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부처는 어디에 계신가? 우리는 불교를 믿으면서도 부처는 어디에 있는가를 모르는 사람이 많다. 대부분의 신자들은 산으로 절로 찾아다니면서 부처가 나타나서 은혜를 내려주기를 기도한다. 그러나 실상 부처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가장 가까운 곳에 있다. 불교의 경마다「衆生과 諸佛이 一理齊平하다」 「일체중생에 모두 佛性이 있다. '부처님 몸이 법계에 충만하다'하는 말씀이 들어 있다. 그렇다면 일체중생이 모두 부처요 부처가 일체중생일 터인데, 나라고 부처가 못되란 법이 있는가? 물론 부처가 될 수 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가. 내가 나를 아무리 살펴보아도 절대 부처가 아니다. 또 일체 만물을 보아도 부처가 아닐 뿐 아니라 부처를 조금도 닮지 않았다. 왜 이런 엉터리 말이 나왔을까? 그렇다고 부처님 말씀을 엉터리라고 단정지을 수 는 없는 일인데, 나 또한 나를 잘못 보았다고 할수도 없는 일이다. 내가 나를 잘못 보지 않은 이상 부처님 말씀도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러면 어디에서 이런 차이가 생겼을까? 이 말은 이렇다. 나는 나의 입장에서 나를 본 것이고 부처님은 부처님의 입장에서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과 나 모두
법왕청신문 이존영 기자 | 또한 일붕은 세상을 경악케 했던 사이비종교의 발호에 대응하는 의미에서迷信과 正信이란 글을 일간지에 싣기도 했다. 사이비종교 단체들이 신들을 비난하는 사람에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해害를 끼치던 때였기 때문에 상당한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 글에서 일붕은 인륜과 도덕을 무시하고 해악을 끼치는 행위는 결코신, 그리고 정교와 사교의 판단이 이루어져야 한다. 기성종교로서 세계적인 신앙으로 자리 잡은 종교라 할지라도 시대의 추이를 따라가지 못하면 곤란한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이점은 어느 종교도 마찬가지다. 즉 시대정신을 담고 있는 종교여야 한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열렬한 기독교 신앙을 가졌으면서도 당시의 목사나 선교사의 설교를 이렇게 비판했다. “금과옥조金科玉條같이 믿는 성경 가운데도 어느 시대이건 만인 모두가 받들어 행할 것이있고 너무도 맹랑하고 허황되어 돌아볼 가치가 없는 것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어리석은 교인들은 시대에 맞는 심금을 울리는 교리는 찾으려 하지 않고 원시시대의 신화와 같은 예수의 기적만을 가지고 떠들고 선전하고 있으니 가증스럽고 딱 한 일이다. 기독교는 이런 비판을 겸허하게 수용하고 내부적인
법왕청신문 이존영 기자 | 세계 문명의 새로운 중심지가 된 미국에 직접 뛰어들어 미국을 배우고 한국의 불교를 알리겠다는 각오로 이미 기반이 다져진 한국을 떠날 준비를 하던 일붕은 지나온 세월을 되돌아 보았다. 참으로 바쁘게 살아온 세월이었다. 한날한시도 헛되이 보낼 틈이 없이 늘 시간에 쫓기면서 보낸 지난 50년이 주마등처럼 스쳐갔고, 잊을 수 없는 장면들이 파노라마처럼 전개되었다. 가슴이 찢어지고 창자가 끊어진다는 애 별이고(別離苦)의 고통을 이겨내고 세속 떠나 부처님 품 안에 안긴 32년 전 일이 마치 어제처럼 선명하게 떠올랐고, 스승을 찾아 뭍으로 나와 지리산 〈화엄사>로 들어간 시절이 생생하게 재현되었다. <화엄사>에 계시던 진진응 대강백의 제자를 따라 전주<위봉사>로 가 유춘담 스님으로부터 일붕(一鵬)이란 법호(法號)를 받던 일, <위봉사>의 살림이 어렵게 되어 강원이 폐지되자 춘담스님이 마련해준 학비와 소개장을 들고 서울로 올라와 동대문에 있던 <개운사 대원암>의 박한영 대강백의 수제자가 된 일, 강원도 오대산 <월정사> 선방의 강사 초청을 받고도 부족한 부분을 더 채우기 위해 김제 <
법왕청신문 이존영 기자 | 지난 7일 서울중앙지법(법원, 1심)이 베트남전 민간인학살을 인정한 판결이 나왔다. 베크남전 생존자 응우엔티탄(63) 씨가 한국 정부를 상대로 낸 국가배상 소송에서 55년 만에 첫 승소를 했다. 이와 관련해 10일 불교인권위원회(공동대표 진관 스님) 성명을 통해 '한국군 베트남전 민간인학살에 대한 법원의 판정을 환영한다"고 밝혔다. 불교인권위원회는 "한국군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주장을 인정한 대한민국의 1심법원은 그 배상의 책임이 우리 정부에 있다는 판결을 내렸다"며 "비록 응우옌씨가 대한민국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일부 원고 승소의 판결이기는 하나, 우리 법원이 ‘불행한 인류사의 한 장면에 대해 가해 국임을 인정하고 반성과 화해의 입장에서 내린 결정’이라고 본다"고 밝혔다. 이어 "이를 계기로 베트남 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양국의 모든 분들과 피해자 가족들의 명예회복과 그에 따른 배상이 이루어져 아픔이 치유되기를 간절히 바란다"며 "현재 진행 중인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이 하루속히 끝이 나서 더 이상의 인명피해가 없기"를 촉구했다. 다음은 불교인권위원회 성명 전문이다. 한국군 베트남전 민간인학살에 대한 법원의 판정을 환영
법왕청신문 이존영 기자 | 하처래 하처거(何處來 何處去). 우리 인간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 것일까. 우리 인간은 태어나기 이전의 곳도 모르고 죽음 그 이후의 곳도 알 수 없다. 부처님(佛陀)은 바로 이러한 삶의 이치를 한 조각 뜬구름이요, 죽음은 한 조각 구름의 스러짐이라고 말했다. 나는 무엇일까. 누구나 예외 없이 겪는 생노병사(生老病死)의 과정을 거치는 우리의 인생은 무엇일까. 왜 태어나고 죽을까. 삶의 진정한 목적은 무엇이고 죽음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 무엇을 기쁨이라 이르고 무엇을 슬픔이라 이를까. 삶과 죽음의 경계는 어디일까….… 그는 이러한 본질적이고 근원적인 답을 얻으려 세정(世情)을 끊고 불제자가 되었고, 얻고자 하는 답에 가까이 가려 참선을 통한 수행에 몰두했다. 아니 지금도 고통받는 중생들을 위한 수행을 계속하고 있다. 서기 1914년(불기2458년)음력 5월 9일 술시, 제주도 서귀포시 도순동 331번지에서 徐成賢·李卯生 부부의 3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일붕은 어릴 때부터 총기가 넘쳐 할아버지 鳳辰 선생의 전폭적인 뒷받침을 받으며 당시 제주의 제일가는 문장이자 덕망가였던 외삼촌 선생께 한학을 배웠다. 민족정신이 투철했던 할
법왕청신문 이존영 기자 | “밤과 낮이 한국과는 정반대로 뒤바뀌는 외국에서 온갖 고생을 다 겪으시며 보조가풍(普照家風)을 선양하여 포교하시니, 동방의 제2 보조요, 서양의 제2달마올시다… 서 박사의 미국 포교로 인하여 미국인이 한국의 삼보 사찰인 <통도사, 通度寺> <해인사, 海印寺> <송광사, 松廣寺>를 친견할 풍조가 깊다는 문구를 읽고 화상의 의덕(義德)을 칭송하오며 결제 후에 만나 뵙길 원하나이다.” 이 글은 임자년(壬子年, 서기 1972년) 2월에<송광사> 구산(九山) 스님이 서경보 법왕님께 보낸 편지의 한 부분입니다. 이 편지를 받았을 당시 법왕님께서는 제3차 미국 포교를 마치고 귀국하여 동국대 불교 대학장으로 계실 때였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불행하게도 인물을 제대로 키우고 대접하는 역사를 가져보지 못했습니다. 그릇된 사대주의에 젖어 인물마저 외국인은 높고 내국인은 낮다는 식의 평가를 했습니다. 그 때문에 훌륭한 업적을 남긴 우리의 조상들이 빛을 보지 못한 채 역사의 뒤안길로 흔적 없이 사라졌습니다. 오히려 국내에서는 홀대를 받다가 외국인이 인정하니까 뒤늦게야 연구에 착수하고 법석을 떠는 일이 있었습니다.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윤석열 대통령 부부는 6일 오후 서울 강남구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불기 2567년 대한민국 불교도 신년대법회에 참석하여 대덕 스님들, 불자님들과 함께 새해 인사를 나누고 경제위기 극복과 나라와 국민의 평안을 서원했다. 이날 신년대법회는 불교계 30개 종단의 협의단체인 한국불교종단협의회와 불교리더스포럼이 공동 주최했으며, 현직 대통령 부부의 신년대법회 참석은 이번이 처음이다. 대통령 부부와 종단협 회장 진우스님은 개회 후 국운 융성과 국태민안을 빌며 헌등했다. 이후 천태종 총무원장 무원스님의 신년 인사와 태고종 총무원장 호명스님의 축원에 이어 조계종 총무원장 진우스님의 신년법어로 신년대법회를 봉행했다. 이번 신년대법회를 주최한 종단협 회장 진우스님은 신년법어에서 위기의 시대에 세계 전체가 한 송이 꽃이라는 세계일화 정신의 회복만이 그 해답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이번 법회가 윤 대통령의 안정적인 국정 운영에 조그만 마중물과 디딤돌이 되기를 부처님 전에 기원한다고 말했다. 윤 대통령은 축사를 통해 우리 사회의 따뜻한 등불이 되어준 불교계에 감사를 표하고, 이어서 행사를 기념하여 준비된 6m길이의 떡케이크 커팅식에도 참여했다. 이